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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69)화 (69/144)

69화

릴리엇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화가 나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런 릴리엇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릴리엇은 그 손마저 거절해 버렸다.

“둘 다 정말 질렸다니까.”

“난 아체리아를 힘들게 하지 않을 거야.”

“물론 그렇겠죠. 아체리아가 힘들어지는 이유는 클라우스, 당신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그 세상 사람들이 아체리아를 힘들게 만들 원인을 제공한 건 당신, 클라우스고요.”

“에른스트에게도 이런 말을 했어?”

“날 믿어요. 에른스트에게는 더 심하게 말했으니까요.”

클라우스는 릴리엇이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 잊고 조금 웃을 뻔했다. 그리고 연회장 안쪽으로 시선을 돌려, 순간순간 지나치는 아체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눈으로 좇았다.

“왜 하필 아체리아였어요?”

릴리엇이 물었다. 그때, 클라우스는 가을의 단풍잎처럼 휘날리는 아체리아의 붉은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잘 모르겠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인가 눈길이 갔어. 어쩌면 아주 옛날부터였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것치고는 아체리아를 잘도 괴롭혔잖아요. 아체리아가 오냐오냐 받아 준다고 너무 응석 부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오늘따라 말이 너무 날카로운데?”

“안 그러게 생겼어?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할 상대를 찾아야 해요. 어렸을 때는 결혼이 마냥 꿈같은 일일 줄 알았지만, 눈앞에 닥쳐 보니 알겠더군요. 이건 인생이 걸린 문제예요. 누구랑 혼인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남은 내 몇십 년의 인생이 지옥이 되느냐, 천국이 되느냐가 달려 있다고요. 불공평하다고 생각 안 해요?”

“네가 느끼는 혼인의 불공평함 때문에 아체리아를 이렇게 두둔하는 거라고?”

릴리엇은 입술을 움츠리면서 다시 양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그래요. 그런 거예요. 아체리아도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에른스트나 클라우스를 통해서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잘 알겠지만, 사교계는 누군가를 따돌리고 배척할 기회만 엿보는 인간들로 뭉친 곳이니까요.”

“아체리아가 그렇게 되도록 내가 놔두지 않을 거라고 해도?”

“클라우스, 제발. 내가 당신을 대체 몇 살 때부터 봐 왔다고 생각해요? 당신 사교술은 완전히 꽝이잖아요!”

“그거야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지.”

클라우스는 화가 난 릴리엇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릴리엇은 팩, 소리가 나도록 손을 빼냈지만 표정에서만큼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아체리아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마요.”

“아체리아도 나를 좋아한다면 힘들지 않겠지.”

“대단한 자신감이셔. 그렇다면 빨리 약혼이라도 발표해요. 벌써부터 당신이 아체리아를 에스코트해서 연회에 오는 걸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약혼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그건 또 왜요?”

“아체리아가 아직까지는 나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니까.”

기가 막힐 노릇이다. 릴리엇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고는 마치 남동생을 혼내는 누나처럼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클라우스나 에른스트, 페터에게마저 응석 부리는 여동생 같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진짜 아체리아를 위하는 게 뭔지, 한번 잘 생각해 봐요. 에른스트나 클라우스의 마음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밀어붙여도,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친 릴리엇은 클라우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연회장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테라스에 혼자 남은 클라우스는 밤바람을 맞으며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피로한 눈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 * *

그 시간, 아체리아는 에른스트의 리드에 맞추어 벌써 두 곡째의 춤을 추고 있었다. 스텝을 밟는 법조차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지만, 한 곡을 추고 나니 몸이 저절로 음악의 흐름에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잘 추는데, 아체리아.”

“농담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 발을…… 밟지 않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찼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체리아는 제법 날렵한 몸짓으로 에른스트의 손을 잡고 반 바퀴를 휙 돌았다. 치렁치렁하게 풀어 내린 단풍빛 곱슬머리가 향기롭게 흩날릴 때, 에른스트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체리아.”

“네, 대공 전하.”

“네게 할 말이 있어.”

아체리아의 두 눈동자가 소리 없이 깜빡였다.

“말씀하세요.”

“지금 여기서는 그렇고…… 잠시 후에 후원으로 나와 주겠어?”

“후원……요? 어디인지 잘 모르는데요.”

“쉬워. 저쪽에 열려 있는 문이 보이지? 그 문을 나와서 복도를 쭉 따라 걸으면 후원으로 가는 회랑이 나올 거야. 그 회랑 끝에서 만나.”

두 번째 춤곡이 끝났다. 아체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에른스트와 맞절을 했다.

샴페인을 가지러 가는 척, 에른스트가 먼저 연회장을 나서고 나자 아체리아는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에 물을 연거푸 마셔야만 했다. 내리 춤을 춘 탓인지 목도 말랐다. 그러나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는 거지?’

자신을 내려다보던 에른스트의 미묘한 표정이 이제야 신경 쓰였다.

아체리아가 연회장을 벗어나려는 그때, 손 하나가 아체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아체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클라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공작님.”

“혼자 어딜 가?”

“아, 잠시…… 잠시 바깥에 바람을 좀 쐬러 가려고요.”

“같이 가. 혼자 다니다 위험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왕성에 들어올 만한 위험한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싶다마는. 클라우스가 진짜로 따라올 기색을 취하자 아체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금방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또 쓸데없이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체리아는 어색하게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망치듯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왜 그런지, 클라우스에게 에른스트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이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클라우스에게 에른스트에게 잘 대해 주라고 한 건 자기 자신이었음에도, 아체리아는 마치 숨겨야 하는 비밀처럼 에른스트를 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클라우스에게도, 에른스트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아체리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뿐이었다.

“이제야 왔네.”

에른스트는 정말로 회랑 끝에서 아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 밤공기가 닿자,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추워?”

“조금요. 안이 따뜻해서 그랬던 모양이에요.”

아체리아의 말에 에른스트가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

“자, 걸쳐.”

“이러시면 대공 전하께서 추우시잖아요.”

“난 괜찮아. 마침 딱 시원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걸쳐. 감기 들면 큰일이잖아? 요리사인데.”

아체리아는 결국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에른스트가 내미는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품이 넓어 재킷에 감싸인 꼴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대공 전하, 하실 말씀이라는 게…….”

“일단 좀 걸을까?”

쾌활하게 말한 에른스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체리아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 손을 잡고 그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 건 네 덕분이야, 아체리아.”

“그럴 리가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나랑 같이 두 곡이나 춤을 춰 준 건 벌써 잊은 거야?”

“잊지 않았어요. 그냥…… 그런 건 대공 전하께 익숙한 일이니까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 생각한 것뿐이지요.”

“의미 없지 않아. 아니, 아주 큰 의미가 있지.”

에른스트는 샹들리에 불빛이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비치는 구석까지 아체리아를 데리고 갔다. 아체리아가 등지고 있는 창문 너머에서는 사람들이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땅바닥에 드리우는 빛의 그림자. 안온하고 따뜻한 불빛에 휘감기듯 선 아체리아의 양손을 에른스트가 부드럽게 붙잡았다.

“네게 할 말이 있어.”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인상을 남기는 그의 유록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체리아, 나랑…… 결혼해 주지 않겠어?”

아체리아는 순간 에른스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에른스트는 그 손을 놓아주지 않고 더욱 힘껏 붙잡았다.

“대공 전하, 놓아주세요.”

“나는 도저히 안 되는 거야?”

“되고 안 되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분이에요.”

“왜? 귀족이기 때문에?”

“귀족일 뿐만 아니라 왕족이기도 하시죠. 그러니 대공의 지위를 가지셨고요. 저 같은 사람은 대공 전하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나와는 안 되지만, 클라우스와는 함께할 수 있다는 거야?”

에른스트의 말에 손을 뿌리치려 애쓰던 아체리아의 움직임이 문득 멈추었다. 에른스트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클라우스가 청혼해도 이런 식으로 거절할 건가?”

“지금 공작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니, 필요가 있어. 클라우스가 너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아체리아. 그리고 내 마음이 어떤지도 알고 있지. 네가 클라우스를 마음에 품고 그와 연인이 되는 게 가능하다면, 나와 그러지 못할 것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순간, 아체리아의 손이 드디어 에른스트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아체리아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하면서 부산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난 너를 위해서라면 대공의 자리 같은 건 포기할 수 있어, 아체리아.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디로든 우리 둘이 사라져 버려도 좋아.”

“대공 전하께서는 그러시면 안 돼요. 왕족이시잖아요. 폐하의 조카이시잖아요.”

“난 그런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어!”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일순 높아지자 아체리아는 흠칫,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언성을 높인 장본인인 에른스트조차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것 같았다.

“미안해, 아체리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괜찮습니다.”

그 순간, 에른스트의 눈높이가 확 낮아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풍경에 아체리아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체리아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은 에른스트는 간절함을 넘어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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