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정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들어 봐야 재미도 없는데, 이런 자리에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끼어들어야 하니 정말 고역이라니까. 오늘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릴리엇이 소곤거렸다. 마치 단짝 친구라도 생긴 꼬마 같은 그녀의 모습에,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띠면서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떻겠어요? 정말, 무슨 말들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걸요.”
릴리엇이 술잔으로 입가를 가린 채 까르르 웃었다.
“하긴, 클라우스가 집 안에서 정치 이야기 같은 걸 할 리가 만무하니 넌 더욱 재미가 없겠구나. 대관절 클라우스는 무슨 재미로 사는 걸까?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단 말이야.”
“릴리엇, 내 험담을 하려거든 좀 더 목소리를 낮춰서 하지 그래.”
아체리아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클라우스가 끼어들었다. 릴리엇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흔드는 시늉을 했다.
“숙녀들끼리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실례예요, 클라우스.”
“엿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아체리아에게 이상한 말을 속닥거리지 말아 주겠어?”
“어머, 웃긴 사람이야. 내가 언제 아체리아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고 그런담? 당신이 대체 집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짓궂은 농담에 클라우스가 헛웃음을 쳤다.
아체리아는 조용히 식사를 하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로 사교계에 떠도는 그저 그런 소문들에 관한 잡담이 많았지만, 역시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3왕자와 5왕자가 일으켰던 내란에 대한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개중에는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다음 대 왕위를 차지할 사람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예측하는 내용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필리파 왕녀가 왕으로부터 무슨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을 대신하여 그녀가 이런 자리를 열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필리파 왕녀님이 다음 대 왕위를 잇겠다고 말한다면 들고일어날 사람이 많을 거야.”
릴리엇이 필리파 쪽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소곤거렸다.
“그건 왜요?”
“그야 왕궁에는 왕녀와 왕자들이 아직 많으니까. 그들 중에는 필리파 왕녀님보다 훨씬 더 센 배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거든. 필리파 왕녀님이 어째서 이 시기에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모든 일들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준비라면…… 아마도 왕성에 꽤 큰 파장이 일 거야.”
“파장이라면…….”
“위험한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지.”
아체리아는 에른스트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필리파를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차려 입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엄숙해 보이는 옆모습에서는 위기감이나 위험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이렇게 연회를 열고 있는 순간에도, 필리파 왕녀님을 향해 눈과 귀를 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릴리엇이 말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계시기만 했던 분이니 더욱 그렇겠지.”
“릴리엇은…… 필리파 왕녀님께서 다음 대 왕위를 노리실 거라 생각하세요?”
아체리아의 질문에 릴리엇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그리 민감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눈과 직감은 꽤 발달해 있었다.
“글쎄……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럴 공산이 꽤 크다고 봐.”
그때, 접시들이 치워진 자리에 디저트가 서빙되었다. 황금빛으로 구워진 페이스트리 위에 굵은 설탕 결정이 달라붙어 별처럼 빛나고, 새콤달콤한 여러 가지 과일 소스를 무지갯빛으로 끼얹은 아름다운 과자였다.
페이스트리를 집어 먹던 아체리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얀 헨릭이 해 준 이야기인데, 옛날에는 이런 녹색 소스를 쓸 때 매우 조심해야 했대요.”
“그래? 왜?”
“다른 색의 소스에 비해서, 녹색 소스는 독이 들어갈 가능성이 더 많았다나 봐요. 왜, 독초 같은 것 말이에요.”
“아하, 색깔이 비슷하니까 속이기도 쉬웠겠구나.”
“네. 그리고 그런 풀들 중에서는 맛을 느끼기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주로 진한 맛으로 독초의 향을 가려 버리는 방법을 자주 썼다고 하네요.”
“아체리아는 요리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아는구나.”
릴리엇이 솔직하게 칭찬하자, 아체리아는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요리밖에 모르는데요, 뭘.”
“한 가지 분야를 깊게 아는 게 진짜 대단한 거야. 안 그러니?”
식사가 끝나자 테이블 위에는 치즈나 올리브 따위의 간단한 음식과 술이 차려졌다. 음악이 시작되자, 몇몇 사람들은 가운데로 나가 춤을 추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던 아체리아의 앞에 에른스트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릴리엇은 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에른스트는 개의치 않고 아체리아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클링 양,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아체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대공 전하, 저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그러니…….”
“나만 따라오면 되니까 괜찮아. 이리 와.”
에른스트는 결국 곤란해하는 아체리아를 데리고 가운데로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필리파는 문득 옆자리에 앉은 클라우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가 미묘한 미소를 띠었다.
‘이것 좀 봐라?’
클라우스는 따로 말을 보탤 것도 없이 불쾌함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에른스트와 아체리아 쪽을 보고 있었다.
“비스몽트 공작.”
이름이 불리고서도 듣지 못한 채 앞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뒤에 서 있던 타티아나가 헛기침을 하고서야 퍼뜩 놀라 필리파를 바라보았다.
“예, 왕녀님.”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치고는 내 사촌을 바라보는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요. 설마 클링 양을 억지로 데리고 나가서 화가 난 건가요?”
“…….”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것을 필리파에게 다 들켰으리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링 양을 아주 아끼는 모양이지요?”
“……아낀다기보다는.”
“그럼? 사랑하고 있어요?”
그때였다.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릴리엇의 포도주가 식탁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다.
놀란 시종이 황급히 그녀에게로 달려왔고, 클라우스와 옆에 있던 귀족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리엇, 괜찮아요?”
필리파가 묻자, 릴리엇은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왕녀님.”
“드레스가 젖진 않았나요? 어서 란츠호프 후작 영애를 안으로 모셔라.”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다행히 잔이 떨어져 깨진 것일 뿐, 릴리엇은 다치지도 않았고 드레스가 얼룩진 것도 아니었다. 시종이 지저분해진 바닥과 테이블을 치우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릴리엇은 클라우스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테라스 쪽을 턱짓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클라우스는 필리파를 향해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릴리엇을 따라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훈훈한 공기가 고여 있는 실내에 있다가 바깥으로 나오니 머릿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릴리엇의 표정은 그런 상쾌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필리파 왕녀님이 하신 말씀이 대체 무슨 뜻이야?”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군, 릴리엇.”
“말 돌릴 생각일랑 하지도 마요, 클라우스.”
클라우스는 눈을 뾰족하게 뜬 릴리엇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듯 웃었다.
“너한테서 추궁당하는 건 별로 즐겁지 않은데.”
“그럼 추궁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죠. 아체리아? 진담이에요?”
“아체리아가 뭐가 어때서?”
“난 지금 아체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맙소사, 분별없는 남자 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분별없는 남자 둘?”
“그래요. 당신과 에른스트 말이에요! 왜 아체리아를 곤란하게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구는 거예요?”
“난 아체리아를 곤란하게 할 생각 없어, 릴리엇.”
그의 대답에 릴리엇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고개를 휘저었다.
“그런 사람이 사랑이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해요? 솔직히, 에른스트보다도 당신에게 더 질렸어요. 그보다는 분별이 있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아체리아 입장을 좀 생각해 봐요. 당신과의 스캔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 애가 어떻게 되겠어요?”
“릴리엇, 넌 걱정이 너무 많아.”
“적어도 지각이라곤 없는 당신과 에른스트보다는 낫죠.”
“내가 아체리아를 쉽게 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요? 그 애를 공작 부인으로 만들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릴리엇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클라우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귀족과 평민의 신분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인이나 교제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릴리엇은 여성으로서 아체리아의 입장을 보다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른스트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체리아가 남들의 입에 ‘귀족의 정부’로 오르내리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애 인생 전체가 걸린 일이에요, 클라우스.”
“언제 아체리아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
“친하고, 친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냐! 아체리아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요. 정말로 아체리아가 할 수 있다고 봐요? 공작 부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클라우스. 정말 알기는 하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체리아는 ‘뭘 할’ 필요가 없어. 아체리아는 그냥 그녀답게 살면 되는 거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클라우스, 공작 부인은 사교계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의 사람이에요. 그냥 슬그머니 나타나서 춤만 춰도 되는 자작 부인이나, 남작 부인이 아니라고요. 알겠어요? 그 모든 걸 감당하지 않고, 아체리아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벌 떼처럼 달려들어 아체리아를 물어뜯을 사람들이 널리고 깔렸다는 걸,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