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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64)화 (64/144)

64화

몇 마디 불평은 했으나 클라우스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식사를 했다.

아체리아가 납치를 당했다가 구출된 이후, 이런 점도 나름대로 소소한 변화라면 변화였다. 클라우스의 편식은 여전했지만, 구구절절 토를 달며 먹기 싫다고 밀어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공작저의 모든 사람들이 아체리아를 ‘극진하게’ 대하고 있었다. 호즈만이나 하인들, 요리사 같은 고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공작인 클라우스 본인까지도 그랬다.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당사자인 아체리아 한 사람뿐이었다.

“……공작님.”

“왜?”

“저기, 하던 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뭘 하던 대로 하라는 거야?”

“아니, 사람이 너무 갑자기 바뀌니까 이상하잖습니까! 평소처럼 이건 맛이 어떻다, 저건 모양이 어떻다, 색이 어떻다, 그런 식으로 트집을 잡으시라고요!”

클라우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변태야?”

“예?!”

“그게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대체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흘러가지요?”

“내가 잘 먹는 게 소원이라며? 접시를 싹싹 핥게 만들어 주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소원대로 잘 먹어 주니까 이제 와서 하던 대로 하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딱 한 번 말했던 걸 가지고 정말 징그럽게도 우려먹는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부드럽게 구워진 자고새 구이를 천천히 먹었다. 겉은 쫄깃쫄깃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육즙을 그대로 머금은 것이, 농후한 풍미가 느껴지는 소스와 어우러져 기가 막힐 정도로 맛이 좋았다.

“제가 납치당했던 것 때문에 제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거라면…….”

“내가 그것 때문에 지금 너한테 이렇게 대한다고 생각해?”

“그럼 아닌가요?”

클라우스는 코웃음을 치며 다소 거만한 눈으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든지.”

물론 아체리아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연애 경험이 없다고는 해도 눈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납치당한 것 때문에 이렇게 대해 준다’고 둔한 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클라우스가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아체리아로서는 선뜻 그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신분에 대한 의식은 일개 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 사라지거나 흐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귀족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공작이 아닌가. 단순히 변덕스러운 마음이겠거니 생각하려 해도, 휘황하기까지 한 그의 높은 신분 때문에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에게 얼마간 마음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요리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화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낀 아체리아가 말을 돌렸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짓이라 스스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클라우스는 별 표정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왕궁의 왕자님들 사이에 무슨…… 싸움이 벌어졌다면서요?”

“평범한 싸움이 아니야. 왕위 찬탈을 노리고 벌인 내란이었지.”

“왕위 찬탈이요?”

아체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클라우스는 새콤하게 절인 버섯 절임을 삼킨 뒤 설명을 해 주었다.

“3왕자와 5왕자가 서로 다음 대 왕이 되겠답시고 사병을 일으켰다가 충돌한 거야.”

“동시에 그랬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양쪽 다 강력한 계승 후보였으니, 아마 서로의 움직임을 내내 주시하고 있었겠지.”

단지 우연의 일치였다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클라우스도 그들의 싸움 뒤에 필리파가 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인가. 왕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자리보전을 한 지는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동안 무슨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했다.

“그럼 그분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들리는 말로는 국외 추방되었다고 하더군.”

“왕위를 노렸기 때문에요?”

“그래. 내란죄로 다스려진 거지. 지금 정치를 이끌어 나가는 귀족들은 그런 데에 엄격한 자들이니까.”

아체리아는 “무섭네요”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왕위니 추방이니, 듣기에는 심각한 이야기였지만 사실 아체리아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아체리아는 문득 또 궁금증이 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다음 대 왕이 되실 분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죠?”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직접 지정하지 않으신 이상, 계속 이 상태일 테지.”

“왜 빨리 지정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건…….”

어려운 이야기다. 클라우스는 문득 필리파의 야심만만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왕이 그녀를 비밀리에 왕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알 만했다. 필리파의 어머니에게 반감을 가진 자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특히 란츠호프 후작과 같은 진보파 소속의 귀족들은, 필리파가 당연히 보수파를 규합할 것이라 생각해 기를 쓰고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뭔가 결정적인 수를 노리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클라우스는 이내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왕은 그렇게 철두철미한 자가 아니다.

그가 오늘내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와중에도 필리파를 후계자로 지정하지 않는 것은 단지 그 변덕과 우유부단함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혹은, 필리파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보수파를 아예 와해시킬 것을 마음 한켠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그 정도의 통찰력이 아직 남아 있다면 애당초 이렇게 혼란해질 일도 없었겠지만, 젊은 시절의 왕은 분명 정치적 감각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그렇다고 믿고 있었겠지.

그러나 병든 몸은 그의 정신을 뿌리부터 쇠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여전히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뭔가 결정적인 수가 떠오르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폐하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결국 클라우스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시드레는 잠에서 깨자마자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신경질을 부리며 물을 찾았다. 요즘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변덕스런 주인을 보필하느라 머리칼이 빠질 지경인 하녀는 종종걸음을 치며 그녀를 위해 물을 떠다 주었다.

“물이 너무 미지근하잖아!”

내던진 유리잔이 바닥에 나뒹굴며 물이 다 쏟아지고 말았다. 융단에 얼룩이 생기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시드레는 양 어깨가 오르내리도록 거칠게 씩씩거리면서 하녀를 향해 쿠션을 내던졌다.

“왜 모두들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용서해 주세요!”

“다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시드레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자 바닥에 납죽 엎드린 하녀의 표정이 두려움과 짜증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평소에도 그리 모시기 편한 주인은 아니었지만, 요즘 시드레의 행동은 최고참 하녀까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트집을 잡아 시종들을 매질하거나 욕을 하는 것은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며 고용인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시드레가 왜 그렇게 변해 버렸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클라우스가 찾아왔던 날, 그와 시드레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하인이었다.

그는 시드레를 위해 그 어떤 지저분한 일이건 마다하지 않고 나섰지만, 무식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그조차도 요즘의 시드레를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서 알핀을 불러와.”

알핀은 그 하인의 이름이었다. 엎드려 있던 하녀는 마치 구원자라도 만난 듯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침대에 앉아 씩씩대고 있던 시드레는 이를 갈면서 커튼 틈으로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노려보았다. 백작저에서는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비스몽트 공작저가 있는 방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알핀이 왔다. 시드레는 하녀를 꾸짖을 때처럼 온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든 명령을 내리십시오.”

“비스몽트 공작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 알아봐.”

알핀의 시선이 비스듬히 시드레를 향했다.

“원한…… 말씀이십니까?”

“그래.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죄송합니다만, 백작님. 어떤 종류의 원한을 말씀하시는지…….”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자를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란 말이야!”

누구를 찾더라도 아마 자신만은 못하겠지만. 시드레는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마구잡이로 악을 썼다. 대개 그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면 고용인들은 알아서 제 발밑에 기게 마련이라는 듯이.

“잘 알겠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알핀이 말했다.

클라우스에게 모욕을 당해 찌그러진 시드레의 자존심은 쉽사리 회복이 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악의를 마주한 어린애처럼 당황하기까지 했다. 결단코 시드레는 그런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원하는 것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한데, 심지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그자는 내게 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한 거지?

그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원망과 증오가 얼룩덜룩하게 그녀를 갉아먹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이제 시드레의 마음속에는 클라우스를 향한 거대한 분노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른스트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신사적으로, 에둘러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은 시드레의 요청을 못 이기는 체 받아 주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클라우스는 아니었다. 마치 저를 모욕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 매끈하고 훤칠한 전신에 혐오와 경멸을 둘둘 감은 채 자신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시드레가 살면서 평생 들어 본 적 없던, 들어 보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들로 그녀를 상처 주었다.

‘감히, 감히 내게. 절대로 용서 못 해. 절대로.’

하나만은 분명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런 모욕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리라.

시드레는 분노로 새하얘진 입술을 씹으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클라우스를 무너뜨릴 만한 것이라면 괴물이라도 기꺼이 이용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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