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지금까지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에게 원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부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소원은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아체리아가 기대한 것만큼 요란한 반응은 아니었을지언정, 한두 스푼 먹고 나면 그릇을 물려 버리곤 하던 이전에 비하면 요즘의 클라우스는 대식가 수준이었다.
그럼 이제 자신에게는 소원이랄 것이 없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귀한 식재료를 마음껏 써서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 보고 싶었고, 오로지 식도락만을 위한 여행을 떠나 보고도 싶었다. 서부 지방에서만 난다는 귀한 치즈도 먹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클라우스가 말하는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클라우스가 없어도 언젠가 그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체리아가 결국 그렇게 말하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생각나면 얘기할게요.”
아체리아가 황급히 덧붙였다.
이렇게 휘둘려도 되는 건가? 아체리아는 ‘정신 차리라’던 예시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과연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까? 그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걸까? ‘좋아한다’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것인지 이 사람은 정말 알고 있을까?
자신의 그 말이 나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 * *
필리파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들은 소식은 3왕자와 5왕자 사이에 일어난 반목이 양쪽 모두에게 무위로 돌아갔다는 낭보였다. 필리파가 시기적절하게도 왕의 총사대와 기마군을 보내어 그들의 사병들을 진압한 덕분에, 민간에는 큰 피해 없이 싸움은 종결이 되었다.
아픈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섭정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급하게 주요 귀족들을 호출하여 내부 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3왕자와 5왕자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단순한 형제간의 다툼이 아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분은 어찌 되었다던?”
필리파의 질문에 타티아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2왕자 전하의 모후께서 섭정과 더불어 결정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3왕자 전하와 5왕자 전하는 각각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 합니다, 왕녀님.”
“하.”
필리파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국외 추방이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건만 뜻밖의 수확이었다. 더는 왕위를 노릴 수 없도록 금족령 정도만 내려 줘도 좋을 거라 생각했건만.
“섭정이 의외로 훌륭한 일을 해 주었구나.”
“3왕자와 5왕자를 내내 경계해 온 인물이었으니까요.”
“그자는 불필요할 정도로 왕에 대한 충성심이 두텁지……. 이번에는 일을 잘해 주었다만, 내가 왕위에 앉고 난 후에도 내게 충성을 바칠지는 좀 고민이 되는구나.”
“듣는 귀가 많습니다, 왕녀님.”
실제 필리파의 방에는 자신들 이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타티아나는 특유의 조심스러운 성격을 발휘하여 조언했다. 필리파는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는지 말없이 은은한 미소만 띠고는 턱을 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구나.”
왕위가, 그토록 바라던 그 자리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장 거추장스럽던 자들을 단숨에 제거해 버렸으니, 나머지 왕자나 왕녀들은 신경 쓸 건덕지도 못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필리파는 테이블 위를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조그만 거미에 시선을 주었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이제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인 듯했다. 비틀거리며 테이블 테두리를 따라 기어가는 거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리파는 턱을 괴었던 손을 천천히 빼내어 거미의 위로 가져갔다.
“왕녀님, 만지지 마십시오! 제가 치우겠습니다.”
“놔두렴, 타티아나.”
당황한 타티아나가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던 손을 움찔, 멈추었다. 필리파는 계속해서 거미를 눌러 죽일 듯 말 듯, 더듬거리는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손가락을 띄운 채 매끄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조그만 것도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기어 다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느냐.”
“……예?”
“버러지 같은 목숨이라도 어떻게든 붙여 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겠지. 그 본능이야말로 아바마마, 나의 부왕을 아직까지도 살려 두고 있는 것일 테고.”
“왕녀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그 순간 필리파의 손가락이 거미의 볼록한 배주머니 위로 툭, 내려앉았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네 쌍의 다리가 잠시 바둥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내가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이대로 만족할 수 없지. 발버둥을 치겠다면, 눌러 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필리파 왕녀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필리파는 타티아나가 건네준 손수건에 지저분해진 손끝을 닦고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방금 전, 징그러운 거미를 눌러 죽일 때 느껴졌던 기이한 살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해맑은 모습이었다.
“연회를 열어야겠다.”
“연회를요……?”
“그래. 성가신 오라버니들께서 뒤엉켜 싸우다 알아서 자멸하지 않았니? 부왕께서는 몸도 편찮으신데, 그런 변변찮은 아들들을 거느리시느라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느냐. 나라도 홀로 축하를 해 드려야지. 그게 딸로서 당연한 도리이고말고.”
그러니까, 3왕자와 5왕자가 국외 추방된 것을 축하하고 싶다는 말인가. 자신의 주인이지만 가끔은 이해할 수 없음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한마디 반문도 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락케 패거리가 사라진 이후, 비스몽트 공작저의 주방에는 몇 가지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우선, 프레드에 이어 도미닉이 부주방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여전히 견습 요리사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던 요아킴이 신참 요리사로 승진했고, 그 아래로 예시카가 추천한 루비라는 아이가 새로운 견습 요리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체리아는 수석 요리장으로서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좋았다. 물론 이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락케 패거리가 워낙에 말을 듣지 않아 통솔에 어려움을 겪는 때가 왕왕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요리사들은 무조건적으로 아체리아의 말을 따르고 그녀에게 순종했다. 물론 거기에는 아체리아의 능력이 가장 큰 몫을 했지만, 클라우스가 직접 요리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엄포를 놓은 것도 이유가 되었다.
‘앞으로 아체리아 클링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이유가 무엇이건 변명을 듣지 않고 내쫓겠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이 직접 그런 말을 하는데 감히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아체리아 씨, 이건 이 정도로 하면 되나요?”
이제는 완전히 아체리아의 수족이 되다시피 한 요아킴이 절구에 넣고 빻은 자고새의 구운 내장을 보여 주며 물었다. 육수를 끓이고 있던 아체리아는 절구 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리 가져와.”
오늘의 메뉴는 트레몰릿 소스를 곁들인 자고새 구이였다. 그리 흔치 않은 요리 재료라, 아체리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자고새 구이를 만들 때 내장까지 다 쓰는 줄은 몰랐어요.”
절구에 빻은 것을 육수에 넣고 소스를 만드는 것이 요아킴의 눈에는 마냥 신기하게만 보였다. 대체로 새 요리를 만들 때, 아주 작은 멧새 따위를 제외하고는 내장이야 따로 빼내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내장을 구워서 소스를 만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풍미가 좋아지거든.”
“아체리아 씨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주방에 있다 보면 너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거야.”
요아킴이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견습 딱지를 떼고 드디어 정식 요리사가 된 요아킴은 근래 지나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아체리아조차 요아킴을 보고 쉬엄쉬엄하라며 충고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였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공작님은 내장이라면 질색하시는데.”
“소스에 뭐가 들어갔는지는 비밀로 해야지.”
아체리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클라우스는 모든 종류의 내장을 싫어했다. 귀족들이 별미라며 좋아하는 해산물 내장을 이용한 요리도 그에게는 끔찍한 악몽 따위로나 취급되었다.
“순서대로 가지고 나가세요!”
조리가 끝난 접시들이 순서대로 놓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들어와 그것을 내어 갔다. 아체리아는 마지막 자고새 구이 접시에 소스를 끼얹어 건네주고는, 모자와 앞치마를 벗고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내렸다.
“나도 나가 봐야지.”
요아킴이 끼어들었다.
“공작님이랑 같이 식사하는 거,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아체리아는 어쩔 수 있냐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같이 먹자고 고집을 부리시니 내가 이길 수가 있어야지.”
“공작님께서 아체리아 씨를 정말 많이 아끼시는가 봐요.”
사실은 아끼는 정도가 아니지만.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체리아는 요아킴의 머리를 슥 쓸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나올 때까지 식기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체리아가 테이블 가까이 다가오자, 클라우스의 뒤에 서 있던 호즈만이 직접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이게 제일 고역이라니까.’
아무리 클라우스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연차며 나이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집사장 호즈만이 마치 시중을 들어 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긴 호즈만뿐이겠는가. 요즘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아체리아를 마치 귀족 아가씨를 대하듯 했다. 그것도 전부 클라우스가 시킨 일이었다.
“오늘의 요리는 소스를 끼얹은 자고새 구이와, 백합조개와 아스파라거스를 이용한 샐러드, 그리고 버섯 오일 절임을 올린 수프입니다.”
“난 조개 싫어하는 거 알잖아. 모래가 씹힌다고.”
“해감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모래 같은 건 안 씹히실 거예요.”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