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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62)화 (62/144)

62화

“어서 오세요, 비스몽트 공작님.”

응접실에서 클라우스를 맞은 시드레의 표정은 밝고 환하기 그지없었다.

클라우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애꿎은 사람을 해칠 계획을 짜고 그걸 실제로 실행했으면서도 잘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군.

시드레는 비스몽트 공작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맞아들인다면 단순히 미친 사람일 것이고 말이다.

“왜 그렇게 서 계시나요? 자리에…….”

“시드레 백작.”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던 클라우스가 차분히 그녀를 불렀다.

“네, 공작님. 말씀하세요.”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왔소.”

시드레의 얼굴로 천천히 손을 뻗은 클라우스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시드레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아픈 사람처럼 온기가 제대로 오르지 않은 찬 손끝, 그 손끝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상상을 하자, 순간 무척이나 황홀한 기분이 시드레를 사로잡았다.

“뭐든지 물어보세요.”

“이 예쁘장한 얼굴 밑에 대체 얼마나 두꺼운 가죽을 깔고 있는 거지?”

시드레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클라우스는 낯빛이 파리해진 그녀를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천천히 뒷짐을 졌다.

“다른 곳도 아닌 내 집에 잘도 쥐새끼를 풀어놓으셨더군.”

“……고, 공작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 락케라는 요리사를 데려가고 싶었다면 굳이 그런 지저분한 방법을 쓸 거 없이 그냥 말을 하지 그랬소. 동전 한 푼어치만도 못 되는 그런 놈, 내 달라고 했다면 얼마든지 내어 주었을 텐데.”

“저는 도통 무슨 말씀인지…….”

“법정에 불려 가서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그제야, 그제야 시드레는 이 모든 상황의 전말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머저리 같은 놈들, 들키지 않게 하라고 그렇게 단단히 일렀건만 결국에는 일처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 것이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공작님, 법정이라니요? 무서운 말씀 마세요. 저는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제게 이렇게…….”

클라우스는 가련을 떠는 시드레를 토악질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분명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다 알았을 것임에도 뻔뻔스럽게 발뺌을 하려는 태도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당신이 사주한 그자들은 법정에 가서도 당신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쳐 대겠지만, 결국 증거가 없으니 당신은 처벌을 받지 않겠지. 그것까지 다 알고 있소. 물론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을 감옥에 처넣고자 한다면 그게 어렵지 않다는 것쯤,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 믿고.”

시드레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공작은 나를 직접 고발하지 않으려는 거야. 나를 고발했다가는 길고 지난한 싸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백작가를 옹호하는 다른 귀족들과도 맞부딪혀야 할 테니까…….

클라우스가 그런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시드레는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흥, 약점은 내가 쥐고 있는 셈이라고.’

“공작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대체…… 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그래서 뭔가 오해를 하셨나요? 저는 절대로…….”

“내가 어디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주는지 시험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이 자리에서 뻔뻔한 그 뺨을 올려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아 준 것이니까.”

드러내 놓고 모욕을 당한 시드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시드레를 몰아붙였다.

“경고하겠는데, 두 번 다시 아체리아에게 손댈 생각 하지 마시오. 그대가 남편감으로 대공을 원하든, 왕자를 원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아체리아 클링은 엄연히 공작저의 사람이오. 한 번만 더 이런 더러운 짓을 벌였다가는 결코 용서치 않겠소.”

“더러운 짓이라니요? 공작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 아체리아라는 그 사람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 당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 당신 손에서 놀아난 쥐새끼들이 했을 뿐. 안 그렇소, 시드레 백작? 당신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사람을 시켜 수도의 시궁쥐들을 죄다 잡아다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라 해야겠어.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릴 테니까.”

“무슨……!”

“말로만 끝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오. 다음번에 또 이런 짓을 했다가는 내게서 자비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혀나 깨무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될 거요.”

할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벌컥 문을 열자, 바깥에서 안쪽의 상황을 엿듣고 있던 하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쥐새끼 소굴 아니랄까 봐 키우는 하인들도 죄다 그 모양이군.”

클라우스가 차갑게 일갈했다. 시드레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쏘아보자, 하인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시드레는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온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 파들파들 떨어 댔다. 쥐 가죽으로 드레스를 만들겠다느니, 혀나 깨무는 게 나을 거라느니 하던 클라우스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북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려 댔다.

“악!”

몸을 떨고 서 있던 시드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주저앉은 그녀는 이를 갈면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비스몽트…… 가만히 안 둘 거야. 날 이렇게 모욕하고…….”

시드레가 이런 수모를 겪은 것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세게 깨물고 있던 그녀는 그러쥔 주먹으로 융단을 내리치며 활짝 열린 문을 쏘아보았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호즈만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곧장 침실로 올라갔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다녀간 치료사가 오늘까지는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말라는 말을 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호즈만 집사장이 눈에 불을 켠 채 한시도 빠짐없이 아체리아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어났군.”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아체리아는 누운 채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절 괴롭히시려는 거죠?”

“이건 또 신선한 헛소린데?”

“저 이제 다 나았어요. 일어나서 움직여도 된다고요. 호즈만 집사장님한테 눈 좀 그만 부릅뜨라고 말해 주세요.”

“호즈만이 일을 아주 잘 했나 보군. 포상으로 휴가라도 줘야겠어.”

약이 오른 아체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능청스레 웃은 클라우스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오늘까지는 쉬라고 치료사가 말하는 걸 못 들었어?”

“들었어요. 두 번, 세 번 들었어요. 하지만 공작님, 저는 정말 누워 있는 게 적성에 안 맞는다고요.”

“누워 있는 게 적성에 맞으면 관 뚜껑 열고 들어갈 때가 된 거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저 좀 내보내 주세요. 네?”

“절대 안 돼. 오늘까지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아체리아는 온 세상의 절망을 다 겪는 표정으로 요란하게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내렸군. 다행이야. 계속 열이 오르면 위험하다고 했는데.”

“열도 안 나는 데 환자 행세하면서 누워 있으려니까 벌 받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를 내보내…….”

“내가 너를 벌주지 않는데 누가 너를 벌준다고 야단이야? 나갈 생각 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야기해.”

“먹고 싶은 거라고요?”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데 무슨 음식이 먹고 싶겠는가. 그런 말을 하려던 아체리아는 문득 예전의 클라우스도 똑같았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몸이 허약한 그를, 공작저의 사람들은 모두 다 불면 그대로 날아갈 민들레 홑씨처럼 취급했다. 호즈만은 특히나 극성이어서, 그가 조금만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침대에 눕힌 채 일어나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 배려들 때문에 오히려 더 약해지셨던 거야.’

빤히 바라보는 아체리아의 시선을 느낀 클라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제가 뭘요?”

“왜 이상한 눈으로 봐?”

“제가 언제 이상한 눈으로 봤다고 그러세요?”

“지금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어.”

“그냥 제 눈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세요.”

“아니, 네 눈은 예뻐.”

순간 아체리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디 아프세요?”

“안 아픈데.”

“그럼 혹시 제정신이 아니신가요?”

“생각이 바로 입으로 줄줄 흘러나오는군. 아무래도 더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얌전히 누워 있도록.”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적응 안 되게!”

“언제는 나한테 적응한 적 있었나?”

없긴 했지. 기묘하게 수긍이 되는 말이라 아체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공작님.”

“왜 불러.”

“……정말로 저를 좋아하세요?”

대답이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아체리아는 놀랍게도 마음 깊이 실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 소스라쳤다.

그래, 그게 진심이었을 리 없다. 그냥 밤중이었고, 어두웠고…… 나는 아파서 누워 있었고. 그런 것들이 맞물려 묘한 분위기가 되어서 얼결에 튀어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뭐 하나 부족한 거 없고 모자랄 것도 없는 비스몽트 공작이, 고작 나 같은 요리사에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게 당연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생각을 싸그리 배신했다. 가만히 잡아 올린 아체리아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것이다.

상처 때문에 더욱 거칠어진 손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순간, 아체리아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어질어질 흔들리고, 한기가 드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래, 정말로 너를 좋아해.”

“……제가 못 믿겠다면요?”

“당장은 못 믿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믿게 될 거야. 난 밑지고 손해 보는 건 질색이니까, 좋아한다고 말한 이상 네가 내 말을 믿게 만들 거야.”

“어떻게 믿게 하실 건데요?”

“말로든, 행동으로든. 네가 믿고 안심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생각인데. 원하는 거라도 있나? 고려해 보지.”

원하는 것? 아체리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속으로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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