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클라우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유가 알고 싶어?”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요.”
“그냥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안 돼요.”
아체리아는 그럴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클라우스는 헛웃음을 치면서 어둠 속에 잠긴 아체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 봐.”
“……이유 없이 받는 건 싫어요.”
“네가 내 식사를 만들어 주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 그럼.”
“식사를 만들어 드리는 게 저의 일인데요.”
이런 대화를 이전에도 한 번 하지 않았던가? 클라우스는 호즈만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깨물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것만큼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대답을 듣지 않으면, 아체리아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였다.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라면 대답이 되나?”
숨을 쉴 때마다 천천히 오르내리던 아체리아의 가슴팍이 일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눈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렇게 벌어졌고, 입술 역시 좀처럼 꼭 다물리지 않고 벌어진 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체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라우스는 왠지 가슴속이 후련해진 듯한 기분에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것을 참으며, 베개 위로 흩어진 아체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네가 좋아서 이러는 거라고.”
“거짓말 마세요.”
아체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 움직이지 마. 내일까지는 안정을 취하라고 했어.”
“지금 안정을 취하게 생겼…….”
반박하려던 아체리아는 자신의 뺨을 감싼 클라우스의 손끝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 장난을 하나? 농담인가? 하지만 장난이고 농담이라기에는 클라우스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다.
‘정신 차려야 해, 아체리아. 꼬드기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정부가 돼 버리면, 네 인생은 그 길로 진창으로 끌려 들어가는 거라고.’
예시카가 했던 말이 진짜였을까? 클라우스가 자신을 정부로 삼고 싶어 하는 걸까?
아체리아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클라우스의 표정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을 볼 때는 거의 항상 미간을 찡그리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았다는 듯하던 표정은 이제 그에게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공작님.”
“왜.”
“……저기, 설마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썩 신통한 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군.”
“설마 절 정부로 삼고 싶으세요?”
머리칼을 매만지던 클라우스의 손이 우뚝 멎었다. 아체리아는 그런 질문을 한 것을 곧장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물으면 안 되는 거였다. 좀 더 에둘러 말할 것을…….
“네 눈에도 내가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클라우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허탈한 것 같았다. 아체리아는 미적거리며 말을 얼버무리다가 다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좋아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요.”
“왜?”
“그거야,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 귀족이 아니니까. 고용된 요리사일 뿐이니까. ‘건방진 빨간 머리’니까.
이유를 대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클라우스의 저 표정을 눈앞에서 부정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체리아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는 어린아이처럼 혼란에 빠져 말을 잃었다.
“난 너를 정부로 삼고 싶은 게 아니야. 정부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아.”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날아와 꽂히는 것을 아체리아는 막을 수가 없었다.
‘입처럼 귀도 여닫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듣지 않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클라우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체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열이 내린 이마를 한 번 쓸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아체리아의 얼굴 위로 길게 드리운다. 우묵하게 괸 어둠은 다정하고, 조금은 초조하게 느껴졌다.
“네게 당장 날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거다.”
“……차이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시건방진 소리를 하고 싶거든 마음대로 해. 어쨌든, 왜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걸 해 주느냐’에 대한 내 대답은 그것뿐이니까. 다른 질문은?”
숫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 같은 어조다. 아체리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클라우스가 늘씬한 상체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미지근한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럼 이제 얌전히 자도록 해. 내일 치료사를 한 번 더 만나 보도록 하고.”
“……공작님은 절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어요.”
문득, 클라우스는 쪽잠을 자며 꾼 꿈 생각을 했다. 어린 아체리아를 처음 만났던 날의 꿈. 그 꿈속에서 자신은 온몸으로 아체리아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었어.’
불타는 것 같은 빨간 머리를 한 처음 보는 소녀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 주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소녀가 자신을 멋지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했다. 동경하고, 좋아해 주었으면 싶었다.
이렇게 허약하고 신경질적인 자신이 아니었으면 했다. 에른스트처럼 밝고 건강했다면, 아체리아가 자신을 좀 더 긍정적인 눈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 싫어해.”
“…….”
“잘 자.”
낮은 인사를 남긴 뒤, 클라우스는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아체리아는 가만히 침대에 누운 채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클라우스가 남기고 간 여러 가지 말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제발, 잘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 안 그러겠습니다!”
“공작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정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비스몽트 공작저는 울부짖는 소리들로 요란했다. 클라우스는 법관들이 파견한 병사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납죽 엎드린 락케 패거리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순서지.”
클라우스가 말했다. 패거리들은 무릎걸음으로 클라우스에게 기어 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금세 병사들에 의해 제지되었다.
“끌고 가라.”
병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바닥에 엎드린 세 사람을 강제로 일으켰다. 끝까지 버둥거리던 락케는 결국 그들 중 한 명에게 복부를 얻어맞고서야 헛구역질을 하며 얌전해졌다.
그들이 이토록 발광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노름판 같은 곳을 들락거리다 싸움이 나거나, 길 가다 시비가 붙어 법관 앞에 가는 것과 공작에게 정식으로 고발을 당해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건 시비가 걸린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셋이서 작당하여 사람 하나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운이 좋으면 평생을 감옥에서 푹 썩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 달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공작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빕니다!”
클라우스는 추할 정도로 꽥꽥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가는 락케 패거리를 보고 있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이 나가고 나자, 타월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던 호즈만이 잽싸게 달려와 그의 구두와 바짓단을 털어 주었다.
“아체리아는?”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호즈만의 대답에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락케 패거리는 병사들이 끌고 갔지만,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마차를 준비하게, 호즈만.”
“외출하십니까?”
“시드레 백작저로 간다.”
호즈만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클라우스는 생각만 해도 피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법관 앞에 끌려간 락케 패거리는 클라우스 앞에서 그랬듯, 자신들을 사주한 자가 시드레 백작이라는 사실을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며 외쳐 댈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드레 백작이 실제로 벌을 받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시드레가 정말로 그들을 사주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법관들이 나서서 백작을 구속하고 심문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다. 만약 시드레가 법정에 끌려간다 하더라도 끝끝내 아니라고 우긴다면 무사히 풀려 나올 여지가 다분했다.
결국 실질적인 처벌을 받는 것은 락케와 바키, 듀켄까지 세 사람으로 끝나게 되리라. 그러나 클라우스는 이 문제를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시드레뿐만이 아니라 에른스트까지 데려다 놓고 민폐 끼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시드레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꿈에도 알 길 없는 클라우스로서는, 여전히 시드레가 에른스트 때문에 아체리아를 질투했다고만 생각했다.
“공작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아체리아를 잘 돌봐 주도록 해.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바로 가져다주고, 또 열이 오르면 치료사를 데리고 오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클라우스는 호즈만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린 뒤 저택을 나서 마차에 올랐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그제야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일을 겪었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시드레 백작…….
클라우스는 되도록 정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았던 이유도 불필요한 적을 만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걸 질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그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시드레는 클라우스에게 당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앙심을 품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지만.’
클라우스는 햇빛이 내리쬐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마차는 매끄럽게 뻗은 길을 달려 금세 시드레 백작저에 도착했다. 공작저에서 일어난 소란은 아직 전혀 모른 채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시드레는 클라우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비스몽트 공작이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백작님.”
“그럼 어서 안으로 모셔야지! 뭘 하고 있어? 차를 준비하고, 아니지, 식사를 같이 하시려나? 일단 응접실로 모시도록 해.”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시드레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턱을 살짝 치켜들고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차에서 내린 클라우스가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