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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60)화 (60/144)

60화

너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열 살쯤이었나, 그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였나.

소년 클라우스는 저택의 난간을 붙잡은 채 서서 못마땅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깥으로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총총히 걸어 들어오는 어린 여자아이, 눈에 띄는 빨간색 머리카락이 부숭부숭 일어났고 입은 옷도 꾀죄죄하기 짝이 없는 그 아이가 클라우스는 왠지 신경에 거슬렸다.

“클라우스, 거기 있었니?”

어머니가 고개를 들고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내려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클라우스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 어머니를 마주하고 섰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사방을 힐끔거리는 낯선 여자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아이는 클링이란다. 아체리아 클링. 앞으로 우리 집에서 일을 하게 될 아이야.”

“하녀들은 많이 있잖아요, 어머니.”

클라우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당시 공작 부인이었던 어머니는 그 이름답게 부드러우면서도 고요한 책망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클라우스가 무언가를 실수해도 결코 입 밖으로 내어 혼내는 법이 없었다.

“가엾은 아이란다. 얼마 전에 위쪽 지방에서 큰 산사태가 난 것은 너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아체리아는 그 사고로 가족을 전부 잃어버렸어. 그러니 우리 집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돌봐 줄 거란다. 너와 나이도 비슷하니, 네 시중을 들게 하면 어떨까?”

“전 싫어요. 여자애는 필요 없어요.”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히 무슨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선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무언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어머, 싫으니? 손이 꼼꼼해서 너와 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전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왜 그렇게 싫다고 고집을 부렸을까?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 무렵의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보며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는 어린 소년, 하지만 그 나이대의 귀족가 아이들이 그렇듯, 누구에게나 어른으로 대접받고 싶을 나이였다. 이런 어린 하녀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싫다고 소리치는 와중에도 한마디 말도 없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표정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이 더욱 클라우스의 심기를 거슬렸다.

울지도, 주눅이 들지도 않고, 다만 다갈색 눈동자를 빤히 뜬 채 ‘저 꼬마는 뭐가 문제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새벽녘에 퍼뜩 눈을 뜬 클라우스는 문득 목 뒤와 어깨가 견딜 수 없이 찌뿌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채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기절한 아체리아를 간호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체리아.”

클라우스는 뻐근한 목을 풀 겨를도 없이 침대에 누운 아체리아를 불러 보았다.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상처가 난 손목과 발목에도 약초를 붙인 채 잠든 아체리아는 평소와 달리 몹시 가냘프게 보였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의 성화로 허둥지둥 불려 온 늙은 치료사는 아체리아의 상태를 보더니 ‘조금만 더 오래 방치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섬뜩한 진단을 내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상처가 부어올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클라우스는 마치 자신이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체리아가 이런 일을 겪도록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머리가 뻥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경연 따위를 여는 게 아니었는데.’

아체리아가 뭐라고 말하건, 그때 로널드 락케와 그 패거리를 쫓아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오늘날 아체리아가 이런 험악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자신답지 않게 너무 물렀다. 그 무름이 아체리아를 다치게 한 것 같았다. 오갈 데 없는 분노는 텅 빈 방을 한 바퀴 돌아 클라우스의 등을 채찍처럼 후려쳤다.

“……음.”

그때 누워 있던 아체리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체리아?”

“……누구…….”

눈꺼풀이 가물가물하게 깜빡인다. 클라우스는 순간 아체리아의 손을 꽉 잡으려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차가운 손끝이 손바닥을 살짝 간지럽히는 느낌에, 아체리아는 초점이 흐린 시야를 좀 더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공작님?”

“그래, 나야.”

참으로 멋없는 대답이었지만 그 순간 아체리아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빈 저택이 아닌 공작저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통수는 여전히 얼얼하고 손목과 발목도 욱신거렸지만, 등에 닿는 침대의 감촉이 믿을 수 없이 푹신하고 베개에서는 향기가 났다.

“어떻게…… 저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지금은 말하지 마. 말하지 말고 좀 더 자도록 해.”

“하지만 여긴 제 방이 아닌 것 같은데…… 잠깐만요. 여기, 설마…… 공작님이 쓰시는 방 아닌가요?”

“그런 건 상관하지 말고 자도록 하라니까.”

어떻게 상관을 안 할 수가 있나. 당황한 아체리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클라우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누워 있어.”

“제가 여기 누워 있으면 공작님은 어디서 주무시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호즈만 집사장님이 아시면 난리가 나실 텐데…….”

“나보다 호즈만의 말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호즈만 집사장님은 자기 몸보다도 공작님 몸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감히 저 같은 게 공작님의 침대를 차지하고, 공작님은 오늘 바닥에서 주무시게 하면 큰일 나지 않을까요?”

“……잘만 떠드는 걸 보니 내일이면 일어나겠군.”

이게 지금 놀리는 거야, 뭐야? 아체리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다가 얼얼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시커멓고 축축한 것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손목에…… 이건 뭐예요?”

“치료사가 얹어 두고 간 약이야.”

“……다행이다. 더 이상 손을 못 쓰게 되는 줄 알았어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자신이 무사히 살아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도 더한 안도감이 담겨 있어서, 클라우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손을 못 쓰면 요리를 못 하게 되니까…… 그러면 저는 공작저에 있을 수 없게 되잖아요.”

“……요리를 못 한다고 해서 내가 널 내쫓을까 봐 그러는 건가?”

아체리아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우스는 그 시선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리사가 요리를 못 하는데, 뭘 핑계로 데리고 있으시려고요? 설마 저를 말동무 삼고 싶으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말동무 삼고 싶을 수도 있지.”

“맨날 제가 무슨 말만 하면 건방지다, 건방지다 하시면서?”

“그건 네가 건방진 말을 하니까 그런 거고. 지금처럼.”

“이것 봐, 공작님은 그냥 제가 말을 하는 것 자체를 건방지다 생각하시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그건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클라우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굳이 무의미한 말싸움으로 아체리아나 자신의 기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정말 절 어떻게 찾으셨어요?”

“안 잘 거야?”

클라우스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당장 잠이 오지 않는걸요…… 여태까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제가 얼마나 잤어요?”

“아직 몇 시간도 안 됐어.”

“정말로요? 엄청 많이 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체리아가 눈을 감았다.

“듀켄이 도망치려던 것을 에른스트가 잡았어.”

클라우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요?”

“그래. 그자가 모든 것을 다 실토했지. 지금 그 패거리들은 지하실에 갇혀 있다. 내일 법관들에게 넘길 예정이야.”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말을 들으면서도 왠지 홀가분하다거나 고소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래야 마땅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자들의 배후에 의외의 인물이 있더군.”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배후라고요?”

“그래. 시드레 백작이 이 모든 일을 조종했어.”

‘시드레 백작이라고?’

아체리아는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분이 도대체 왜 저를……?”

“글쎄. 에른스트가 널 좋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우습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체리아의 얼굴에 일순 당혹스런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에른스트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다고?

클라우스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은 그 빈 저택에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영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로, 바짝 말라 버린 끔찍한 몰골의 시체가 됐겠지. 그리고 언젠가 그 빈 저택을 산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면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이야깃거리로 두고두고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떻게…….”

충격을 받은 아체리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귀족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지.”

클라우스가 담담히 말했다. 그는 시드레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한편, 그녀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납득을 할 수 있었다. 시드레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을지 알 것 같았다.

“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워 버리려는 귀족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전 죽을 뻔했어요!”

아체리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이제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것이 로널드 락케 혼자서 벌인 일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듯이 미워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이유가 자신은 관심도 없는 에른스트 때문이라니.

“락케 패거리를 법관들에게 넘기면서 시드레 백작도 고발할 예정이야.”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발을 하신다고요?”

“그래. 이런 일을 사주했으니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지.”

“……하지만, 그쪽은 귀족이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든 빠져나올 거예요.”

“물론 그럴 확률이 높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넘어갈 수는 없어.”

“왜죠?”

클라우스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냐니?”

“공작님께서는 이미 제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걸 해 주셨어요. 왜 그렇게까지 제 일에 마음을 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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