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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9)화 (59/144)

59화

시드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 보지 못한 일이 없었다. 거칠 것 없는 인생이라는 말은 어쩌면 시드레를 위해 준비된 말인지도 모른다.

백작가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당연한 듯 약속되어 있던 삶이 시드레가 아는 전부였다.

시드레 자신의 세계에서, 그녀가 저지르는 모든 일들은 악행이 될 수 없었다. 손에 넣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자신의 앞에 바쳐지는 왕녀와 같은 삶은 시드레가 자연스럽게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에른스트를 손에 넣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수록 시드레는 초조해져 갔다. 어떤 방법을 써도, 어떻게 다가가도 좀체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굴러 들어오지 않는 그를 안달하는 내내 시드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에른스트 하나만을 원하던 마음이 느닷없이 클라우스로 옮겨 간 것만 보아도 그랬다. 마치 손에 닿지 않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로 쉽게 건너가듯, 시드레에게는 그것이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시드레는 아체리아에 대해서도 별달리 깊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다면 치우고 가는 것이 당연하듯,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누군가를 치워 버리는 것도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기심이야말로 시드레를, 그리고 백작가를 지탱해 온 힘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보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질서였다.

‘그러니까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말렴.’

붉은색 실을 꿴 바늘이 수틀에 걸린 천의 앞뒤를 오락가락하며 만개한 장미를 수놓았다. 시드레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당기며 마지막 한 땀의 수를 놓은 뒤 실을 툭, 끊었다.

* * *

아체리아가 갑자기 사라진 일로 공작저가 발칵 뒤집힌 후, 락케 패거리의 듀켄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원래 생겨 먹길 소심하게 생겨 먹은 그는, 클라우스뿐만이 아니라 대공인 에른스트까지 나서서 아체리아를 찾으러 갔다는 말을 듣고 일이 너무 커져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아냐…… 아냐! 나는…… 나는 락케 씨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뿐이잖아. 내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 그리고 아체리아를 때려서 기절시키기까지 한 건 락케 씨고 말이야! 수레를 끌고 갈 때도 바키 녀석이 거의 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씹는 모습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 같았다.

만약 이러다 공작이나 대공이 빈 저택에 갇힌 아체리아를 찾아낸다면?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지만, 공작저에서 아체리아를 해코지할 만한 사람이 락케 패거리 이외 달리 누가 있겠는가. 아니라고 발뺌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젠장…… 젠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괜히 덤터기를 쓰게 되는 거 아니야? 젠장…… 만약 사실이 밝혀지면, 락케 씨는 분명 나나 바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할 텐데……!’

락케는 이 일을 하는 대가로 백작가의 요리장 자리를 약속받았다지만, 자신과 바키에게는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어. 락케 씨보다 내가 먼저 그…… 그 백작가로 가서 거둬 달라고 하는 수밖에는.’

듀켄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용인들은 요리사를 포함해 그 누구도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공작의 엄포가 있었지만, 그 공작이 아체리아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웠으니 달아나려면 지금뿐이었다. 해가 떨어진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그는 고용인들이 쓰는 숙소를 살금살금 빠져나갔다. 공작저에서 일을 한 지도 벌써 몇 년째, 남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갈 만한 출구 정도는 몇 군데나 알고 있었다. 주로 농땡이를 부릴 때나 이용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좋아…… 좋아. 아무도 없군.’

빨랫물을 버리는 뒤뜰 쪽으로 나온 듀켄은 풀 밟는 소리조차 조심하면서 도둑처럼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늦은 밤에 몰래 외박을 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개구멍을 찾아 담 밑을 더듬거리며 걷던 듀켄은 그만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악!”

땅바닥에 머리를 찧은 듀켄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의 억센 손에 의해 듀켄의 멱살이 위로 휙 꺼들려 올라갔다.

“힉……!”

“뭐 하는 놈이냐?”

겨우 눈을 떠 멱살을 거머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듀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 대공……!”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에른스트는 낮게 이 가는 소리를 내면서 주방 일로 다져진 근육질의 듀켄을 한 손으로 잡아 일으켰다.

“컥……!”

“말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무슨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거지?”

“저, 저는,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멱살을 거머쥔 에른스트의 손아귀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아체리아를 찾아 뛰쳐나갔던 그는 결국 어디서도 그녀의 행방을 찾지 못한 채 클라우스보다 앞서 공작가로 돌아왔다. 그러다 아체리아가 무슨 단서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 어둑한 뜰을 배회하던 도중, 수상쩍게 서성거리는 듀켄을 발견했던 것이다.

에른스트는 버둥거리는 듀켄을 질질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그와 마찬가지로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클라우스와 마주쳤다.

“에른스트, 그자는 뭐야?”

“뒤뜰에서 수상쩍은 짓을 하고 있길래 잡아 왔네.”

외마디로 일갈하면서, 에른스트는 단단한 홀 바닥에 듀켄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홀이 소란스러워지자 호즈만이 가장 먼저 달려 내려왔다.

“대공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공작님도…….”

“호즈만, 이자의 이름이 분명 듀켄이었지?”

클라우스의 말에 호즈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방의 요리사지요.”

“공교롭군.”

클라우스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내던지고 듀켄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그를 일으켰다.

“악! 고, 공작님!”

“아체리아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해라.”

“저,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 저는 그냥…… 그, 그냥……!”

“그냥, 뭐지?”

“그냥, 그냥 시키는 대로……! 악, 공작님……!”

클라우스는 이제 부츠를 신은 발로 듀켄의 손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무게를 실으면 실을수록 고통스러운 비명은 더욱 커져만 갔고, 이 소란을 들은 다른 고용인들까지 홀에 모여든 상황이 되었다.

“공작님! 그 사람은 로널드 락케와 한 패거리인 사람이에요!”

요아킴이었다. 듀켄은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부러지기 전에 입을 여는 게 현명했다.

“라, 락케 씨가 시켰습니다! 락케 씨가 시켜서 한 짓이에요……!”

그 순간, 한쪽에서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로널드 락케가 저택 밖으로 달아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저자를 잡아라!”

에른스트의 외침에 그들을 빙 둘러싸고 있던 고용인들이 락케를 뒤쫓았다. 그중에서 요아킴의 발이 가장 빨랐다. 순식간에 락케를 따라잡은 요아킴은 버둥거리며 발악을 하는 그의 멱살을 잡고 마구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악! 그만, 그만두지 못해! 아악!”

“이 빌어먹을 자식! 아체리아 씨를 어떻게 했어! 어떻게 했냐고!”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과 발길질이 락케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듀켄은 자신의 손가락이 이미 두 개쯤 부러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체리아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

“저, 저택에…… 아으윽, 저택에…… 가, 가둬 놓았는데…….”

“저택이라고? 무슨…….”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클라우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는 손을 싸쥔 채 뒹구는 듀켄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버려둔 채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클라우스!”

에른스트가 외쳤지만, 클라우스는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곧장 말을 탄 클라우스는 미친 듯이 고삐를 휘둘러 서쪽 언덕으로 향했다. 이미 어두워진 탓에 아래로 드리운 나뭇가지를 피할 수도 없어 얼굴에 생채기가 생기는 것도 몰랐다.

언덕을 달려 내려간 클라우스는 흥분한 말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해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진득진득한 늪처럼 발목에 휘감겼다.

“아체리아!”

클라우스가 외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체리아! 여기 있으면 대답해!”

저택 주변을 서성거리며 외치던 클라우스의 눈에 문을 막고 있는 굵다란 나무대가 보인 것은 그때였다. 그는 어떻게든 나무대를 빼내 보려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빌어먹을……!”

나무대를 밀고 당기며 애를 쓰던 클라우스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손을 감쌌다. 그러고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유리창 중 하나를 향해 망설임도 없이 주먹질을 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졌다. 클라우스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금이 간 유리들을 마구잡이로 내리쳐 깨뜨린 뒤 창문턱 위로 올라섰다. 그쯤에서 이미 숨이 턱까지 차 있었지만,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단한 창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월에 메말라 있던 창틀이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저택 안은 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어수선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아체리아!”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빈 석조 저택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공작님?”

어디선가 가냘픈 대답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클라우스의 눈에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아체리아!”

클라우스는 다급하게 아체리아를 향해 달려가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아체리아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고, 머리를 제대로 가누기 힘든 듯 자꾸만 늘어졌다.

“아체리아, 정신 차려. 아체리아?”

“……공작님, 여긴 어떻게…… 내가 꿈을, 꾸나…….”

“아니, 꿈 아니야. 아니니까 정신 차려. 아체리아, 일어날 수 있겠어?”

“아뇨, 저…… 못 일어날 것 같은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아체리아가 힘없이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겨우 일으켰던 몸이 다시 축 늘어졌다.

“아체리아!”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끌어안은 채 절규하듯 외쳤다. 깨진 창문 너머로 횃불들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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