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머리가 무척 아프다. 아체리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얻어맞은 뒤통수에서부터 정수리, 그리고 이마에 이르기까지 온 머리가 빠개질 듯이 욱신거리고 저렸다. 눈을 몇 번 깜빡여 보았지만 처음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덜컥 겁이 났다.
‘미치겠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묶인 손목과 발목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지?
“저기요!”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음산하고 쩌렁쩌렁하게 울릴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아체리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장소다. 아마도 해가 떠 있는 시간인 듯했지만, 창문마다 드리운 낡은 휘장과 태피스트리 때문에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돌아 버리겠네, 정말.”
이곳이 어딘지 알아내는 것도 우선이지만 일단은 묶인 손목과 발목부터 풀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엉망으로 부서진 나뭇가지며 가구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손발 양쪽이 다 묶여서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판이다.
그나마 자신의 몸이 튼튼한 것만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약한 아가씨였다면 머리를 얻어맞자마자 충격으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아체리아는 움직이기 힘든 몸을 버둥거려 겨우 일어나 앉았다. 팔이 뒤로 묶여 있는 탓에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하고, 손목에서는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손을 쓸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면 요리도 하지 못할 텐데.
‘아니, 요리를 못 하게 되는 게 문제가 아냐. 여기서 며칠만 더 있다가는 죽어 버리고 말 거야.’
기묘하게도, 아체리아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자마자 머리가 냉정하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하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의 눈에 띌 만한 곳에 사람을 이렇게 부려 놓지는 않았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머릿속으로 자문해 보던 아체리아는 쉽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공작저에서 습격을 당했다. 감히 저택 내부에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로널드 락케의 짓이야, 틀림없이……. 어쩌면, 여긴 공작저와 가까운 곳인지도 몰라.’
자신이 며칠 동안이나 여기 쓰러져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오래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잠깐 사이에 자신을 수도 밖으로 빼내지는 못했으리라.
“윽……! 젠장, 좀, 일어나, 자……! 제발!”
아체리아는 앉은자리에서 몸을 힘껏 버둥거렸지만 묶인 채로 일어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동그라졌다가 상체만 겨우 일으키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이마에서 진땀이 배어 나오며 힘이 쭉 빠졌다.
“생각…… 생각을 하자. 계속 이렇게 힘만 빼서 될 일이 아니잖아.”
스스로를 다독거리기 위해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게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은 여기에 갇혔고, 이대로 누군가 구하러 와 주지 않는다면 나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가 구하러 온단 말인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알면 클라우스는 어떻게 할까?
락케는 교활한 자다. 그런 자가 아체리아가 사라진 데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또 모르지, 바람이 나서 갑자기 공작저를 떠나게 되었다는 편지라도 썼을지…….
‘편지.’
그랬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요아킴이 보낸 편지부터가 조작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편지를 보자마자 요아킴에게 가 보기만 했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주방에 아무도 없는 걸 보자마자 밖으로 나오기만 했더라도…….
‘아냐.’
이제 와 이런 후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은 여기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게 최선이야.’
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보련만. 아체리아는 먼지가 더께처럼 쌓인 바닥에 누운 채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나무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손목이나 발목 중 하나라도 자유로워진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텐데…….’
이윽고 마음을 굳힌 아체리아는 몸을 앞뒤로 꿈틀거리듯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나무대는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머리까지 다시 아파 오기 시작했다.
“윽…….”
아체리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모로 누운 몸을 웅크렸다. 눈앞에 번쩍번쩍 불이 튀는 것 같았다. 막심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또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 * *
공작저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클라우스는 몇 시간 동안 자리에 한 번 앉지도 않은 채 초조하게 서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호즈만은 그가 또 쓰러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클라우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지금의 클라우스에게는 그마저도 거추장스럽고 신경질을 돋우는 일에 불과했다.
“사람들로부터 소식은 없나?”
벌써 똑같은 질문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호즈만이 침통하게 고개를 젓자, 클라우스는 아랫입술을 지근지근 깨물며 꽉 움켜쥔 주먹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사람 한 명 찾지 못해서 여태……!”
“공작님, 부디 노여움을 다스리십시오. 이러시다가 공작님께서 쓰러지시면 더욱 큰일입니다.”
“고용인들에 대한 심문은?”
“마쳤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아체리아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클라우스는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삼키면서 양손으로 창틀을 짚고 어깨를 숙였다.
“……혹시, 누군가에게 납치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클라우스의 말에 호즈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은 그도 한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그리 연약한 아이가 아닙니다. 분명 잘 빠져나왔을…….”
“빠져나왔다면 집으로 돌아왔어야 하지 않나.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게, 호즈만.”
위로를 하려다 되레 욕만 얻어먹은 꼴이 되었지만 호즈만은 감히 불만스러운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클라우스는 초조함에 그만 돌아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아체리아가 스스로 집을 나가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일절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사고였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생겨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공작 각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에른스트의 도착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며 에른스트가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소식 듣고 바로 왔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체리아가 어디로 간 건데?”
“……에른스트.”
“말해, 클라우스. 아체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는 얼마나 빨리 말을 달려왔는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다 흐트러진 상태였다. 뺨은 벌겋게 상기되었고, 숨은 턱까지 차 있었다.
클라우스는 가만히 에른스트를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문제라니? 공작저에서 대관절 문제가 생길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이걸 봐.”
클라우스가 요아킴으로부터 받은 쪽지를 내밀자, 에른스트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클라우스를 노려보면서 그것을 낚아채 읽었다. 그러고는 곧 쪽지를 손 안에서 마구잡이로 구겨 버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도 알아.”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본 거야?”
“전부 다 뒤졌어. 이전에 그만둔 요리장의 가게에도 가 보았고, 아체리아가 자주 다니는 곳도 전부 다 뒤져 보았지만…… 없어.”
“없다고 하면 다야?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 두다니, 대체 뭘 하고 있었어!”
에른스트의 입에서 성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클라우스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린 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아체리아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이 더는 없는 거야?”
“유감스럽지만, 그래. 다른 요리사들이나 고용인들도 모두 심문했지만, 아체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대답뿐이더군.”
“미치겠네.”
에른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으면서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이맛살을 거칠게 찡그렸다. 손에 든 쪽지를 한 번 더 읽어 보던 그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며 몸을 휙 돌렸다.
“어딜 가는 거야?”
“찾으러 가야지. 여기서 손 놓고 인상만 쓰고 있는다고 뭐가 해결이 되나?”
“내가 바보라서 가만히 있었던 것 같나? 대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으러 간다는 거야!”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낼 거야! 여기 가만히 처박혀 있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해. 난 내 마음대로 할 테니.”
환멸이 난다는 투로 뇌까린 에른스트가 서재를 나가 버리자, 클라우스의 양 뺨이 희게 질렸다. 한참 동안이나 이마를 짚은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클라우스가 말했다.
“호즈만.”
“예, 공작님.”
“나갈 준비를 할 테니 말을 가져와.”
“공작님, 이 상태로 나가시면 도중에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부디…….”
“말을 가져와!”
호즈만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갔다. 클라우스는 이미 말을 타고 공작저를 벗어나는 에른스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여기 가만히 처박혀 있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누가?”
창가에 서 있던 클라우스가 몸을 휙 돌렸다.
* * *
시드레는 한가로이 자수를 놓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전 다녀간 하인의 보고는 시드레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내용이었다. 멍청하게 강등이나 당했다기에 해 봐야 얼마나 잘 해낼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그 로널드 락케라는 자는 수완이 좋은 것 같았다.
아체리아를 쥐도 새도 모르는 곳에 가두어 놓았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세상이 다 평화로워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지,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감히 그까짓 요리사 한 명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나저나,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클라우스가 공작저의 모든 고용인들을 집 안에만 머물도록 명령한 것은 의외였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남자였단 말이지?’
고작 사라진 요리사 한 명을 찾기 위해 발휘되는 강단이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의외의 일면을 발견했다는 듯한 즐거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