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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7)화 (57/144)

57화

“더 빨리 움직여! 더 빨리!”

로널드 락케는 수레를 끄느라 헉헉거리며 언덕을 오르는 바키와 듀켄을 밉살스러울 정도로 재촉해 댔다.

그들은 서쪽 언덕을 빙 둘러 오래전에 텅 비어 버린 저택으로 향했다.

이 저택을 둘러싼 온갖 기괴하고 음산한 소문 때문에, 마을 전체가 아예 비어 버리게 된 것도 모두 옛일…… 이제 이 근처로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널드 락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체리아가 그 전말을 잘 몰랐던 것은, 단지 로널드 락케보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저택의 주인이 미쳐서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저 자신도 자살한 사건은, 아체리아가 공작저에 오기 10년 전쯤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저택 앞에서 헉헉거리며 걸음을 멈춘 바키와 듀켄은 락케의 재촉에 기절한 아체리아를 질질 끌다시피 해 스산하고 차가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발은 제대로 묶었겠지?”

“예, 묶었습니다.”

“좋아. 이제 문을 닫고 여길 빨리 튀자고.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곳이니까.”

“락케 씨, 혹시 누가 여길 찾으면 어쩌죠?”

소심한 듀켄이 안절부절못하며 묻자, 락케는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그의 멱살을 잡았다.

“누가? 누가 여길 찾아? 네놈들만 입 닥치고 있으면 여긴 아무도 찾지 못해. 내 말…… 잘 알겠지? 누가 여길 찾아왔다면, 그건 네놈들 탓인 거야. 알겠어?”

“아, 아니. 락케 씨! 진정해요. 진정하라니까요. 이봐, 듀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지? 응?”

당장 듀켄을 죽여 버릴 기세로 달려드는 락케를 말리며 바키가 물었다. 듀켄은 겁에 질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정신을 잃은 아체리아를 텅 빈 저택 홀의 한복판에 내려놓았다.

“자, 이제 가자.”

로널드 락케는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쓰러진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음험하고 잔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저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깨어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은 밖에서 잠가 버릴 것이고, 손발도 묶여 있으니까 말이다.

설령 비명을 지른들 누가 여기까지 올 것인가? 아무도 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분 나쁜 저택에서 비명까지 들린다면, 오려던 놈도 달아나겠지.

“잘 있어라, 아체리아 클링.”

락케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키와 듀켄은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싶은 표정으로 문을 닫아걸었다. 세 사람은 빈 수레를 저택 뒤에 내다 버린 채 재빠르게 공작저로 돌아갔다.

어둠이 깔린 언덕 너머는 고요했다. 아무도 아체리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아체리아가 사라졌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온 요리사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요리사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은 다름 아닌 요아킴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뒤를 이어 내려온 락케 패거리는 저희들끼리 은근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요아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요리장님이 계시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어서 방문을 두드렸는데…… 조용했어요.”

요아킴이 훌쩍거리고 울면서 말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은 텅 비었고…… 책상 위에 이런 게 있었어요.”

프레드가 요아킴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쪽지를 휙 빼앗아 그 내용을 읽었다. 하도 엉망으로 휘갈겨 쓴 글씨라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다급한 사정으로 공작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아체리아 클링]

“이게 무슨 소리야? 아체리아가 공작저를 떠나다니, 말이 돼?”

“다급한 사정이 뭐야? 가족도 없잖아?”

“혹시 그거 아냐? 남자가 생겼다든지…….”

“요리장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요아킴이 울분에 차서 소리치자, 남자 문제를 이야기한 요리사의 입이 쑥 들어갔다.

뒤에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로널드 락케는 배를 잡고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 옆에 서 있던 바키와 듀켄은 락케처럼 악랄하지 못했기에 초조한 표정이었으나.

“공작님께 말씀을 드려야지.”

도미닉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들 중에서는 아체리아가 사라진 데에 대한 공작의 분노를 받아 낼 각오가 되어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요아킴이 나섰다. 다른 요리사들이 놀라서 요아킴을 바라보았다.

“요리장님은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런데…… 요리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이때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공작님께서 반드시 아체리아를 찾아 주실 거예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요아킴은 프레드의 손에서 다시 쪽지를 받아 들고 주방을 나섰다. 그러면서, 그는 문간에 서 있는 락케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뭘 쳐다봐?”

지레 속이 뜨끔한 로널드 락케가 일갈했다. 요아킴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는 곧 바깥으로 나갔다.

“저 쥐방울만 한 놈이…….”

“에이, 락케 씨. 참으세요. 저놈이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렇죠.”

“맞아요. 동경하던 아체리아가 남자랑 눈이 맞아 도망갔으니 그럴 만도 하죠.”

바키와 듀켄이 수선을 떨었다. 다른 요리사들도 요아킴과 별로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로널드 락케는 개의치도 않았다. 그는 아체리아를 처리해 버린 것만으로도 온몸과 마음이 충만해진 기분에 한껏 거만을 떨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아체리아 뒤에서 물고기 똥처럼 붙어 다니던 놈이니까 말이야. 내가 봐줘야지 어쩌겠나? 안 그래?”

락케가 비열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그 시간, 쪽지를 손 안에 쥔 채 계단을 올라간 요아킴은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려고 애쓰면서 침실의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히, 지금껏 한 번도 노크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이다.

클라우스는 깨어나 있는 것 같았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갈아입을 옷이나 세수할 물을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요아킴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는,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요아킴?”

안에서 클라우스의 수발을 들고 있던 호즈만이 의아한 표정을 한 채 바깥으로 나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넌 주방에서 공작님의 아침 식사를…….”

“호즈만 집사장님, 크…… 큰일이 났어요. 저기, 요리장님이…….”

준비한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요아킴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잠겨들어 갔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감지한 호즈만이 눈치 빠르게 문을 닫으려는 순간, 클라우스의 손에 의해 문은 다시 활짝 열렸다.

“방금 뭐라고?”

“고, 공작님.”

요아킴은 감히 클라우스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의 발치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체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겨? 똑바로 얘기해라. 그녀가 아픈가?”

“그, 그게, 공작님. 그게. 요리장님이…….”

“똑바로 얘기하라고 했다.”

클라우스의 싸늘한 목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요아킴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머리 위로 불쑥 들어 올렸다.

호즈만이 먼저 쪽지를 받아 들었다. 구깃구깃하게 접혀 있던 쪽지를 펴고 내용을 확인한 그의 얼굴도 흙빛으로 시커멓게 변했다. 클라우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호즈만과 요아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쪽지를 탁 빼앗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던 클라우스의 입이 드디어 열린 순간, 요아킴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애원하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 공작님…… 요리장님은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세요.”

“뭐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냐?”

“도, 도망을 가거나…… 그럴 분이 아니시라고요. 제발…… 요리장님에게 무슨, 무슨 큰일이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제발 요리장님을…… 찾아 주세요, 공작님.”

거의 빌다시피 하는 목소리였다. 클라우스는 별안간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눈앞이 번쩍번쩍 점멸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클라우스 님!”

집사장 호즈만이 그를 다급하게 부축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호즈만의 손을 뿌리치면서 똑바로 서려 안간힘을 썼다.

“……호즈만,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 아체리아의 행방을 찾도록. 번화가를 중심으로 수도를 전부 뒤지고, 얀 헨릭의 가게에도 연락해 봐. 그리고 대공저로도 사람을 보내서 아체리아가 오지 않았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클라우스 님, 잠시 앉아서 쉬셔야…….”

“잔말 말고 당장 알아봐!”

클라우스가 소리를 지르자 호즈만은 물론이거니와 요아킴마저도 펄쩍 뛸 듯이 놀라 황망하게 움직였다. 호즈만이 계단을 내려가 하인들을 불러모으는 사이, 클라우스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요아킴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너, 따라 들어와라.”

요아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클라우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절하지 않는 게 용한 안색이었지만, 클라우스는 지금 요아킴의 담력 따위를 칭찬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넌 분명 지난번 연회 때 도망쳤던 녀석이지. 이름이 요아킴이었나?”

“……그, 그렇습니다. 공작님…….”

“또 무슨 술수를 꾸미고 있는 거지?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네 혓바닥을 잘라 버리겠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살벌한 협박에 요아킴은 그만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은 채 울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공작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 아침에 요리장님을 깨우러 갔다가, 이 쪽지가 있는 걸 발견하고 바로…… 바로 주방으로 내려가 요리사들에게 알렸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입니다!”

“아체리아가 사라진 걸 다른 요리사들도 알고 있나?”

“네, 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쪽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빌어먹을. 클라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신경질적으로 쪽지를 팽개쳤다.

아체리아의 글씨체가 어땠더라? 이렇게 글씨를 못 썼던가? 아니, 글씨는 쓸 줄 알았던가?

자신은 아체리아에 대해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요아킴을 협박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에 대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고…… 공작님, 저도 요리장님을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얀 헨릭 씨의 가게에도 가 보고…….”

“아니, 넌 여기서 꼼짝도 못 한다. 그리고 다른 고용인들에게도 전해. 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한 발자국도 저택을 나갈 수 없다고. 당장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요아킴은 눈물을 닦으면서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며 뛰쳐나갔다. 클라우스는 자신이 내팽개친 쪽지를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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