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체리아가 예시카에게 한바탕 훈계를 듣고 있을 무렵,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제법 즐거운 기분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테이블 위에는 아체리아가 준비한 간단한 다과와 크림을 넣은 차가 있었다.
클라우스의 위장병이 나아진 후로, 아체리아는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크림 넣은 차를 마시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단 하루도 그 차 시중을 거른 날이 없었다.
‘봐요, 뭐든 잘 드시게 되니까 기분도 좋아지잖아요.’
오늘은 차를 가져다주면서 시건방지게도 그런 말을 했던가?
클라우스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차를 마시는 순간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아체리아와 단둘이 외출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왕궁에 가거나 대공저에 가는 것 말고, 혹은 에른스트를 끼워 말을 타러 나가는 것 말고…….
오로지 둘이서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그런 곳에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클라우스는 왠지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허브 주머니를 받고 기뻐하던 아체리아의 그 표정.
고작 그까짓 것, 금화 한 닢만큼의 가격도 되지 않는 것을 받고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순진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 모습을 이렇게 사랑스럽다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체리아가 자신의 마음을 다 모른다는 생각은 클라우스도 하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짐작은 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해도 기꺼이 들어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싼 드레스라든가, 보석이라든가, 구두라든가…….
그런 것들을 사 달라고 했더라도 자신은 흔쾌히 사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그런 주머니 하나 때문에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짓다니.
“호즈만.”
“예, 공작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겠나?”
호즈만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굴렸다.
“여자들…… 말씀이십니까.”
“불특정 다수는 아니고 한 명이야.”
“……공작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시 누구에게 선물을 하고 싶으신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호즈만이 물었다. 클라우스는 별 걸 다 묻는다는 눈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가장해 대답했다.
“아체리아 클링.”
호즈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틀림없었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에게 푹 빠지고 만 것이다.
첫사랑을 겪는 소년처럼,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그런 상태에 와 있음을 호즈만은 알 수 있었다.
“공작님, 아체리아에게 선물을 하고 싶으시다는 건…… 혹시 아체리아를 칭찬하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호즈만은 비스몽트 공작저의 집사로서, 그리고 아체리아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클라우스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호즈만을 쳐다봄으로써 그의 조심스러운 배려를 박살 냈다.
“그냥 선물을 하고 싶을 뿐이야.”
“선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공작님.”
“매일 내 식사를 만들어 주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 두지.”
“그게 요리사의 직분입니다.”
클라우스는 이제 슬슬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호즈만은 물러날 수 없었다.
“공작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체리아는 귀족 아가씨가 아닙니다. 단지 비스몽트 공작저의 요리사이지요.”
“그래서?”
“……만약 공작님께서 아체리아를 정부로 삼고 싶으시다면 저 역시 말릴 수는 없지만, 아체리아는 그런…… 아이가 되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한번…….”
“방금 뭐라고 했나, 호즈만?”
클라우스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쏟아졌다. 호즈만은 더욱 당황한 얼굴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정부로 삼으시기에는 아체리아의 재능이 아깝다는 그런 뜻으로…….”
“정부라니? 내가 그 애를? 아체리아 클링을?”
“……그러시려는 의도가 아니십니까? 이유도 없이 선물을 하시고, 단둘이 외출을 하시는 건…….”
클라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충직한 호즈만마저도 ‘아체리아가 공작의 정당한 연인이 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이야말로 에른스트에게 그토록 여러 번 충고했던 내용이면서도, 정작 본인이 겪게 되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난 그 애를 정부로 둘 생각은 추호도 없네, 호즈만.”
“그러시면 도대체 왜…….”
“난 아체리아를 좋아하는 것뿐이야. 정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나 호즈만의 표정은 클라우스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열변하는 듯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만 방금 그 말씀은…….”
“됐어. 선물을 추천해 줄 생각이 없다면 나가 봐. 뭐 괜찮은 게 있다면 나중에 알리러 오고.”
“공작님…….”
“나가 보라고 했다.”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목소리였다. 가엾은 호즈만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한 태도로 서재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은 클라우스는 호즈만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괘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부라니, 주변에 달려드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 에른스트도 아니고, 설마하니 자신이 아체리아를 그런 눈으로 보았으려고? 말도 안 되는…….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지.’
정부를 삼지 않는다면 에른스트도 결벽한 자였다. 단지 그의 얼굴을 보고 모여드는 여자들이 많을 뿐, 그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여자들 중 아무나와 놀아난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자신은 에른스트에게 호즈만이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에른스트가 반박하는 걸 들으며 우습다고도 생각했다.
어떻게 대공이라는 자가 고작 요리사를, 그것도 저렇게 진지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기도 안 차던 시절이 자신에게도 있었다.
‘호즈만이 보기에는 나도 똑같아 보인다는 거겠지.’
원해서 된 것이건 아니건, 자신은 비스몽트 공작이다. 아체리아는 그가 예전에 자주 말했던 것처럼 ‘단지 시건방질 뿐인 요리사’에 지나지 않고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체리아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에른스트도 아체리아를 포기하지 않는데, 자신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공작 부인으로 삼고 싶다면 아체리아는 아마 질색할 테지만, 클라우스는 그녀가 비스몽트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붉은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저택의 난간 위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나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리는 모습 같은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그런 걸 묻는 건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아체리아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까, 생각하며 짜릿하게 흥분했던 기쁨과 설렘은 이제 차갑게 식어 사그라져 있었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허브 주머니를 받고 기뻐하던 아체리아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들어차 있었다.
‘당분간은 이대로가 좋아.’
이 마음을 안전하게, 깊숙하게 파묻으면 아체리아는 쉽사리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조금씩, 아체리아 쪽에서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도록.
그래서 자신과 아체리아의 보폭이 맞추어지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허브 주머니 정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값비싸고 휘황찬란한 것을 휘감아 아체리아가 놀라 도망가지 못하도록, 서서히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가도록 기다리는 것은 클라우스 자신의 몫이었다.
‘당분간은…….’
클라우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면서 눈을 감았다.
* * *
밤이 되고 달이 떠올랐다. 클라우스의 침실을 밝히고 있던 불이 꺼진 이후, 공작저는 어둠에 잠겼다.
아체리아는 밖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숄을 걸치고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내려갔다. 요아킴이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혹시 요아킴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 보이지는 않나 살펴보았지만, 해맑게 채소를 다듬는 모습에서는 고민거리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아체리아는 요아킴에 대한 걱정으로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 무슨 고민이길래 남들 앞에서 티도 내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 걸까?’
혹시 락케 말고 또 누군가가 요아킴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요리를 더 배우고 싶은데, 잔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럴 수 없다는 고민일까?
그러면 요아킴 이외 견습 요리사를 더 두어야 하나…… 요리사들을 관리하는 건 아체리아의 몫이었지만, 고용은 클라우스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요아킴 하나만을 위해 불필요한 고용인을 늘리는 걸 그가 허락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체리아는 온갖 생각을 하면서 어둠에 휩싸인 주방으로 내려갔다. 내일 아침에 쓸 재료를 다듬어 놓은 것들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요아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텅 빈 주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체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램프를 내려놓으면서 어깨에 걸친 숄을 더욱 단단히 여몄다.
“요아킴, 여기 없어?”
아체리아가 한 번 더 요아킴을 부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네 개가 아체리아의 팔다리를 꼼짝달싹 못 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뭔가 둔탁한 충격이 아체리아의 뒤통수를 퍽, 내리쳤다.
아체리아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속았어…….’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밖으로 옮겨!”
“윽, 락케 씨…… 무겁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조용히 하지 못해? 누가 들으면 사달 나는 것 몰라? 빨리빨리 움직여!”
어두운 주방에 숨어 있다가 아체리아를 공격한 것은 락케 패거리였다. 애초에 요아킴은 아체리아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다. 모두가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축 늘어진 아체리아의 몸을 수레에 아무렇게나 실은 채 야음을 틈타 공작저를 벗어났다.
세 사람이 향하는 곳은 서쪽 언덕, 아체리아와 클라우스, 에른스트가 승마를 하러 갔던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