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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5)화 (55/144)

55화

에른스트는 릴리엇, 페터와 더불어 대공저의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꽃구경을 한다는 핑계로 모인 것이기는 했지만, 정작 모여서는 꽃구경은 뒷전인 채 3왕자와 5왕자 사이에 일어난 분란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3왕자님이 먼저 5왕자님께 선전포고를 했단 말이지?”

릴리엇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에른스트가 차를 마시며 우아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아직 선전포고를 한 것까지는 아니야, 릴리엇.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지.”

“맙소사, 내란이 일어나는 건가?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뭐 어떻게 할 게 있겠어? 릴리엇, 너희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일이지.”

페터가 말했다. 드라인 남작가의 후계자인 그는 릴리엇과 마찬가지로 작위를 이어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이가 한 살 어린 릴리엇보다도 그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였기 때문에, 장차 작위를 이어받아 수도에 발이 묶일 것을 생각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페터, 넌 어쩜 그렇게 건조하게 말하는 거야! 걱정도 안 돼?”

“걱정이 될 게 뭐가 있느냐구. 란츠호프 후작가든, 드라인 남작가든 3왕자나 5왕자 쪽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말이야. 이제 와서 군사라도 징발하겠답시고 그들이 우리 집안을 찾아오지도 않을 텐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릴리엇. 큰일은 없을 거야.”

에른스트가 끼어들어 말했다. 릴리엇은 그것을 어떻게 장담하느냐는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장담해? 만약 일이 커진다면 다른 귀족들도 물론이지만 에른스트, 당신에게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고요. 그 탐욕스러운 두 사람이 대공인 당신을 그냥 둘 것 같아요? 어떻게든 끌어들이거나 쳐내려고 안간힘을 쓸 텐데.”

페터가 에른스트의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릴리엇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른스트 역시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면 3왕자와 5왕자의 행보에 온 촉각을 다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릴리엇과 페터가 모르는 사실을 한 가지 더 알고 있었다. 두 왕자들을 뒤에서 몰래 부추긴 것이 다름 아닌 필리파 왕녀라는 사실이었다.

필리파가 대체 무슨 수로 3왕자와 5왕자를 한꺼번에 몰아내려 하는지는 에른스트의 오랜 의문거리 중 하나였다.

그녀를 다음 대 왕으로 삼고자 하는 뜻은 내비쳤다지만, 정작 당사자인 국왕이 오늘내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대서야 그 선언이 대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왕이 비밀리에 ‘너를 다음 대 국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해 봐야,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말을 믿어 줄까?

이렇다 할 연줄도, 뒷배도 없는 필리파가 3왕자와 5왕자를 상대로 ‘왕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만을 근거 삼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에른스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여러 번 필리파에게 충고했었지만, 필리파는 ‘때가 되면 알 것’이라는 모호한 말만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엊그제 필리파에게서 온 서신의 내용을 다시 떠올린 에른스트의 뒷목이 쭈뼛, 곤두섰다.

다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는 3왕자와 5왕자를 부추겨 서로 전쟁을 하게 만든 다음, 그 죄를 빌미 삼아 귀족 회의에서 그들을 반란죄로 추방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걸 위해서 필리파가 어떻게든 왕의 목숨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 영감이 안 죽는 게 아니라, 못 죽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야.’

에른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듯 뇌까렸다.

“에른스트, 왜 그래요?”

릴리엇이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네가 이야기한 부분이 좀 걱정되어서 그래.”

마음씨 착한 릴리엇은 당연히 그럴 만하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에른스트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설마하니, 3왕자랑 5왕자가 멍청하고 포악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생각이라는 게 있겠지. 폐하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그 최소한의 생각도 없는 작자들이니 문제인 건데.

에른스트는 한숨을 쉬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 * *

바깥에서 돌아온 아체리아는 자신의 방문 아래에 밀어 넣어져 있는 작은 종이쪽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귀퉁이가 해지고 구깃구깃한 종이다. 펼쳐 보니,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요리장님, 고민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밤에 주방으로 잠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요아킴으로부터.]

요아킴?

‘무슨 고민이지?’

요즘 요아킴은 주방 일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고민하고 있는 게 뭘까?

아체리아는 그 편지를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밤에 이야기하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알게 될 일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을 여니, 예시카가 서 있었다.

“예시카?”

“빵을 좀 구웠는데 먹으러 내려오지 않을래?”

“빵이요? 좋죠. 지금 내려갈게요.”

아체리아는 신이 나서 옷매무새를 단장한 뒤 주방으로 내려갔다.

예시카는 요리사가 아니었지만, 디저트를 만드는 솜씨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비는 시간이면 이따금 주방에 들어와 빵이나 단 과자들을 굽는 게 그녀의 취미 생활이었다.

그리고 옛날부터 그것을 맛보는 건 늘 아체리아와 얀 헨릭의 몫이었다.

“와, 맛있는 냄새.”

“요아킴이 딸기가 애매하게 남았다기에 써 봤지.”

예시카가 만든 것은 딸기 샤를로트였다. 만들기 어렵고 까다로운데. 아체리아는 솔직한 말로 감탄했다.

“이거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언제 다 만드신 거예요?”

“하녀 중에 주방으로 가고 싶어 하는 애가 있어서 말이야. 정 그러고 싶다면 내 허락부터 받으라고 손을 빌렸지.”

“그래요? 어떤 아이인데요?”

“루비라는 애야.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아이인데 지금은 견습으로 일하고 있고. 좀 지켜보다가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주방으로 보낼 테니까 잘 부탁해.”

“지금 주방은 일손이 부족하지 않지만…… 하고 싶다면 시켜 줘야죠. 예시카가 잘 알아서 해 주세요.”

아체리아는 딸기즙을 머금어 촉촉하고 부드러운 샤를로트를 한 입 베어 물고 감탄했다. 약간 눅진해지기 시작해 홍매색으로 무른 딸기의 단맛이 아래에 깔린 시트와 어울려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오늘 공작님과 데이트를 했다면서?”

샤를로트를 먹던 아체리아의 입에서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빵가루가 튀어나왔다.

“예시카! 데이트라뇨!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호즈만이 그러던데? 그 양반, 너 때문에 아주 머리가 다 벗겨지게 생겼더라. 어찌나 중얼중얼 말이 많은지…… 딸기라도 먹여서 닥치게 해야 했어.”

예시카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입을 가리고 있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호즈만 집사장님이 그러셨다고요? 저, 저랑 공작님이 데…… 데이트를 갔다고?”

“그 양반이야 감히 그런 소리는 못 했지. 공작님이 널 데리고 향신료 파는 시장에 가셨다기에 내가 데이트겠거니 한 거지.”

“데이트 아니에요, 예시카!”

“어이구, 데이트가 아니신데 들어오면서 그렇게 표정이 싱글벙글이야?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예시카가 투박한 손가락으로 아체리아의 허리춤을 가리키자, 지레 속이 뜨끔해진 아체리아가 슬그머니 허브 주머니를 손으로 가렸다.

“못 보던 걸 달고 왔잖아. 공작께서 사 주신 거야?”

“그, 그런 건 맞지만…… 데이트는 아니에요. 정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까짓 게 무슨, 공작님과 데이트라니…….”

“너답지 않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데이트쯤이야 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아체리아, 조심해야 한다.”

아체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예시카를 보았다.

“조심하라니…… 뭐를요?”

“데이트는 괜찮지만 정부가 되는 건 안 돼.”

“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저, 저, 정부라니…… 정부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허이구, 그럼 아닐까 봐? 귀족들이 하녀나 요리사쯤 건드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몰라서 그래? 그리고, 귀족이 아니어도 남자들이란 다 그런 법이야. 처음에는 분위기를 잡네, 데이트네 하면서 살살 꼬드기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말을 할걸? ‘난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뭐 이런 소리 말이다.”

“그럴 리가…….”

“그렇게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가는 큰코다칠지도 모른다, 아체리아. 네가 염려돼서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듣도록 해. 너야 어렸을 때부터 요리밖에 모르는 애였잖니. 발랑 까져서 나돌아 다니길 했어, 뭘 했어? 너처럼 순진한 여자애 한둘 꼬드기는 게 남자들에게 그리 힘든 일일 줄 알아?”

순진하다니, 살다살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아체리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딸기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저 순진하지 않아요, 예시카.”

“얘 좀 보게. 네가 순진하지 않으면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은 죄다 뭣 하는 애들이라니? 똑똑한 거랑 순진한 건 완전히 다른 거야. 네가 공작님 앞에서도 할 말, 못 할 말 가리잖고 쏟아부을 만큼 똘똘한 건 나도 인정한다마는, 제아무리 똑 부러진 애라도 순진한 구석이 한둘쯤은 있는 법이라고. 그리고 내 생각에는, 네 순진한 구석은 남자고 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께서 그러실 것 같지는…….”

“남녀 간의 문제에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없어. 알겠니? 그러니까 네가 순진하다는 거야.”

예시카는 마치 잔소리를 퍼붓는 친척 아주머니처럼 아체리아를 닦달했다. 결국 아체리아는 꿈처럼 달콤한 딸기 샤를로트를 얻어먹은 대가로 그녀에게 ‘절대로 순진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아무 말이나 턱턱 믿지 말고, 공작님이든 대공 나리든 너한테 잘해 주겠다, 결혼하자, 이런 말 한다고 바보처럼 설레지 말고. 마음 다치지 않으려면 초반부터 잘 추스르는 게 답이다. 명심해, 아체리아.”

“알겠어요…… 알겠다니까요.”

아체리아는 지친 표정으로 딸기를 집어 먹으면서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고작 허브 주머니 한 개 받은 대가치고는, 잔소리의 위력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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