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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4)화 (54/144)

54화

“아니, 도대체 왜 갑자기…….”

“내 마음이야. 식사 안 해?”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식기를 집어 들었다. 은식기의 묵직한 무게감이 손 안에 감기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맛있군.”

오믈렛을 집어 먹은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려는 찰나, 클라우스의 입에서 한마디가 더 떨어졌다.

“호박과 당근만 안 들어갔다면 완벽했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호박과 당근이 들어갔기 때문에 완벽한 거라고요. 이 색깔의 조화를 좀 보세요. 그리고 씹는 느낌도 하나하나가 달라서 예술적이란 말이에요!”

“……뭐가, 어떻게 예술적인데?”

“호박은 부드럽고, 당근은 살짝 아삭하게 씹히죠. 그리고 다른 채소들을 한 번에 어우르는 기러기 알의 폭신하고도 촉촉한 느낌과 버터 향기! 그런데 어떻게 호박과 당근을 빼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그 아삭아삭한 식감이 싫어, 나는.”

순 어린애 입맛. 아체리아는 속으로 종알거리면서 보이지 않게 입술을 실룩였다.

요리는 맛이 좋았다. 오늘도 한 건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이 아체리아의 가슴속을 꽉 채웠다. 게다가 요아킴이 고기를 다듬은 솜씨도 훌륭해서, 힘줄이나 뼈 같은 것이 전혀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요아킴은 센스가 있어. 분명 훌륭한 요리사가 될 거야.’

완벽하게 구워진 기러기 스테이크를 씹으며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기러기 고기는 소고기보다 기름기가 덜해 담백하게 먹을 수 있었다. 다음번에 또 요리할 일이 있다면 다른 허브를 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왕궁에서 했던 것처럼, 곡식과 함께 푹 끓여 포리지처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오늘 오후에는 뭘 할 거지?”

“오늘 오후요? 어디 보자…… 간만에 향기 광장 쪽 시장으로 가서 향신료를 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얀 헨릭의 가게에도 들렀다가, 새로 문을 연 가게는 없는지도 좀 보고…….”

“새로 문 연 가게들은 왜 찾아다니는데?”

“무슨 맛있는 요리를 파는지 가서 먹어 보고 싶으니까요.”

“점심을 먹고도 또 먹으러 간단 말이야?”

뭐가 문제지? 아체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클라우스는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알겠어. 다녀오도록 해.”

“공작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내가 왜 그런 곳엘…….”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뒤에 서 있던 호즈만이 입술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감히 누구에게 그런 말버릇이냐’는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체리아는 모르는 척 클라우스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난 별로…….”

“같이 가시는 거죠?”

클라우스는 한참이나 아체리아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같이 가지.”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싱긋 웃었다. 그런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수긍해 주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런데 이거 왠지, 데이트 신청 같기도 하네.’

* * *

“왕녀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필리파는 타티아나의 말에 손을 멈춘 뒤 악보를 덮었다.

타티아나가 전해 준 봉투에서는 불타고 남은 재처럼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편지인지 아는 사람은 필리파 한 사람뿐이었다.

“나가 보도록 해,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게 허리를 숙인 뒤 필리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피아노 옆의 서랍에서 편지 나이프를 꺼낸 필리파는 봉투를 찢어 그 안에 있던 종이를 꺼냈다.

[3왕자와 5왕자의 병력은 파악되었습니다. 약간의 불씨만 당겨진다면, 그들은 곧 서로를 공격할 것입니다.]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필리파는 옆에 놓인 화로에 편지를 던져 넣은 후 그것이 재가 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은 벌써 며칠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잠시 의식을 되찾았다가도 다시 쓰러지기를 몇 번째, 이대로 가다가는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 것이라는 의견이 치료사들 사이에 나오고 있다는 것을 필리파도 알고 있었다.

3왕자와 5왕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언제고 상대방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들은, 다음 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보이지 않는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필리파가 할 일은 그 칼이 서로 부딪쳐 둘 다 부러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둘이 손을 잡고 애꿎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틀림없이 서로를 향해서만 칼을 겨누도록 아주 약간의 양념을 첨가해 주는 일. 그것이 필리파가 당면해 있는 최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3왕자와 5왕자가 뒤엉켜 싸우다 멸망하고 나면, 그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었다. 한 치의 허점도 없는 계획이라고, 필리파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약간의 불씨만 당겨진다면, 이라…….”

거의 다 타들어 가 재만 남은 종이를 내려다보던 필리파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불씨를 당겨 줘야지.”

* * *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를 태운 마차는 향기 광장의 한복판에 이르러 멈추었다.

“여기에 시장이 있다고?”

“향신료를 파는 시장이에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아체리아는 클라우스를 데리고 향기 광장을 벗어나 향신료를 파는 뒷골목 쪽의 시장으로 갔다.

복잡하고 좁고 구불구불한 길과, 그 길의 양쪽을 가득 메운 채 좌판을 벌여 놓고 있는 상인들을 본 클라우스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벌어졌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처음 와 보시는 곳이지요?”

처음 와 볼 뿐만 아니라 이곳이 진짜 베르데사가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다른 나라로 끌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귀에 꽂히지 않고 튕겨 나가는 수많은 방언에서부터 외침, 고함, 흥정하는 소리…… 클라우스로서는 생전 처음이다시피 한 소란이었다.

“뭐가 보이기는 해? 들리기는 하고?”

“네? 그럼요, 당연하죠. 길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손잡아 드릴게요.”

아체리아가 손을 뻗자, 클라우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얌전히 아체리아의 손을 잡았다.

“공작저의 향신료들을 전부 다 이런 곳에서 샀단 말이야?”

“네? 아뇨, 당연히 아니죠. 공작님께서 드시는 것들은 대부분 검증을 거친 상인들에게서 직접 들여오는 것이에요.”

“그럼 여기서 사는 것들은?”

“여기서 사는 것들은 제가 먹거나, 요리사들과 함께 먹을 요리에 먼저 써 봐요. 그리고 괜찮은 것이 있으면 상인들에게 구해다 달라고 해서 공작님의 요리에도 넣고…… 그런 거죠. 지난번에 드셨던 고추냉이는 여기서 샀던 거지만요. 동쪽에서 들여온 물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향신료를 사더라도 쓰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쓰지도 않을 걸 왜 사는 건데?”

“그냥 취미니까요.”

아체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이런 것들이 취미라고? 클라우스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향신료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공작님도 취미가 있으시잖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취미?”

“네. 책을 읽으신다든지, 뭐 그런 거…… 저도 그냥 이런 걸 모으는 게 취미일 뿐입니다. 딱히 이걸 써서 요리를 하지 않아도 말이에요.”

“이런 걸 어디다 모아 두고 있는데? 주방에?”

“아뇨, 제 방 선반에 보관해 둬요.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 때가 있거든요.”

이런 걸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클라우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장을 몇 번 돌아보다 보니 아체리아가 왜 이런 취미를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신료를 파는 상인들 중에는 다양한 색으로 만들어진 아기자기한 유리병에 향신료를 담아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향신료 자체의 색깔도 갖가지였거니와, 병에 담아 놓은 것을 보니 그럴싸한 장식품의 용도로서도 가치가 있어 보였다.

단순히 ‘음식’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서 별 재미가 없을 거라 여겼던 클라우스의 생각은 오산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아체리아가 사는 향신료들은 음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재료인 동시에 수집품인 셈이었다.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말린 허브들을 구경하던 클라우스는 비단 주머니 하나에 서너 가지의 허브를 담아 달라고 해 그것을 샀다. 상인이 북부 민족 출신인지, 비단 주머니의 입구를 묶은 끈은 보기 드문 꼬임 장식과 알록달록한 색실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거.”

클라우스가 주머니를 아체리아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선물이야.”

아체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클라우스와 주머니를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물에 잉크가 번지듯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그녀의 표정에서 클라우스는 좀처럼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저 주시는 건가요?”

“……그래. 이런 거 좋아하는 거 같기에.”

“뭘 사신 거예요? 세상에, 향기가 참 좋은데요.”

아체리아는 기분 좋은 얼굴로 몇 번이나 주머니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알싸하면서도 상쾌한 향기가 나는 것도 좋고, 비단 주머니에 수가 놓인 모양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옷에 달고 다닐래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손에서 주머니를 다시 받아 들었다.

“내가 해 줄게.”

좁은 길로 사람들 몇몇이 지나가며 아체리아의 어깨가 툭, 툭 부딪혔다. 클라우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아체리아를 길 안쪽으로 당겨 부딪히지 않게 감싸고는, 그녀의 허리춤에 허브가 든 주머니를 매달아 주었다.

“이제 됐어?”

“아주 멋져요. 감사해서 어떡하지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까짓 것 가지고 뭐가 그렇게 감사해.”

“감사하죠! 그까짓 것이라뇨, 공작님께서 직접 골라 주신 선물인데. 호즈만 집사장님이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엎드려 절이라도 하셨을걸요?”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혼내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장난꾸러기처럼 같이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다음번엔 더 좋은 걸로 사 줄게.”

클라우스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이것보다 좋은 건 없을 거예요. 전 이게 딱 좋아요.”

아체리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클라우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만, 허브 주머니를 연신 어루만지면서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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