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시드레 백작저의 정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곳마다 어딘지 스산한 느낌이 풍기는 곳이었다.
시드레는 응접실 창가에 선 채 초조한 표정으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마차 하나가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얼른 표정을 고친 채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백작님, 다녀왔습니다.”
응접실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드레가 수족처럼 부리는 하인이었다. 시드레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그는 문을 닫으며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아보았어?”
“예, 알아봤습니다.”
“어때?”
“비스몽트 공작저의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 중, 로널드 락케라는 자가 있습니다. 얀 헨릭이 수석 요리장으로 있을 때 부주방장이었던 인물이라는데, 아체리아 클링이 수석 요리장이 된 후 그녀에게 하극상을 시도하다 지금은 강등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 이야기를 해 줬지?”
“공작저에 재료를 대는 상인 중 한 명이 그자의 이복동생이라 하더군요. 그자에게 들은 내용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시드레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좋아……. 그런 배경을 가진 자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겠지.”
“그리고 바키와 듀켄이라는 요리사가 있는데, 그들도 로널드 락케를 따르며 아체리아 클링과는 반목하는 사이였습니다.”
세 사람씩이나. 일이 쉽게 풀린다. 시드레는 창틀에 놓여 있던 조그만 주머니를 하인에게 건네주었다.
“그 락케라는 자에게 가서 전해.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나면 비스몽트 공작저가 아닌, 백작저의 수석 요리장으로 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급료는 물론 공작저의 부주방장으로 일하며 받았던 것만큼 받게 해 주겠다고 말이야.”
“잘 알겠습니다.”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고도 전해.”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잘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얼른 가 보렴.”
시드레는 손짓으로 하인을 내보낸 뒤 후련한 표정으로 창틀을 짚었다.
비스몽트 공작저에 사람을 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을 시켜 내부를 조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공작저를 드나드는 인부나 장사꾼들을 포섭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시드레는 아체리아에게 해코지를 하는 일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로널드 락케라는 그자가 아체리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거슬리는 것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것뿐이었으니까.
에른스트를 공략하든 클라우스를 공략하든, 어쨌든 아체리아가 사라져야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조차 시드레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필리파 왕녀까지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때에 차일피일 일을 미룰 수만은 없었다.
시드레 백작가가 더욱 높은 곳까지 부상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중 한 명과의 혼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걸 감히 요리사 따위가…….’
주먹을 꼭 움켜쥔 시드레가 아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뭐, 이제 곧 사라지겠지만.’
락케라는 자가 아체리아를 미워하는 만큼 일을 제대로 끝마치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시드레는 창틀을 짚었던 손을 탁, 털어 내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 * *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쉿, 목소리 낮춰.”
락케의 핀잔에, 바키와 듀켄은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으면서 주방 쪽의 눈치를 살폈다.
“시드레 백작이라는 자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죠?”
“그래. 그 집의 하인이 나를 직접 찾아와서 이걸 줬다니까…… 보라고.”
락케가 소매 속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어 바키와 듀켄의 눈앞에서 흔들어 댔다. 짤랑거리는 소리, 분명 저 안에는 금화나 패물 같은 것이 들었으리라. 바키의 눈이 다급하게 번쩍거렸다.
“아체리아를 없애 버리면 우리도 다 같이 백작가로 갈 수 있는 겁니까?”
“거기선 나 혼자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말만 잘 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
락케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백작가의 하인이라고 밝힌 남자는 락케가 외출했을 때를 기다려 그에게 접근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선금이라며 건네준 금화만큼은 진짜였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던 바키와 듀켄이 락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제발 우리도 데려가 주세요!”
“락케 씨, 우릴 버리면 안 돼요!”
“이 머저리 같은 자식들아, 호들갑 떨지 말고 일어나! 이러다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셋 다 진창에 처박힐 걸 몰라서 이러는 거야?”
바키와 듀켄은 바보처럼 실실 웃어 대면서 몸을 일으켰다. 락케는 그들을 힐끔 바라보고는 주머니를 다시 제 품에 집어넣으면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저 계집애 하나만 치워 버리면 우리 앞으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올 거라, 이 말이야. 꼭 백작저에 가지 않더라도, 저 눈엣가시만 사라지면 이 주방에서 누가 날 무시하겠어?”
“그럼요, 당연하지요.”
“지금이야 다들 아체리아 눈치만 보고 있지만, 아체리아가 없어지면 락케 씨의 눈치를 살펴야 하겠죠.”
듀켄이 손을 비비며 아부를 해 대자 락케의 조그만 콧대가 더욱 높아졌다.
“자…… 그러면 이제 저 계집애를 어떻게 치워 버릴지, 그거나 생각해 보자고.”
락케가 간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뒤뜰로 나 있던 주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체리아였다.
“셋 다 잘리고 싶은 거야?”
화들짝 놀란 세 사람의 표정이 부루퉁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로널드 락케가 갑자기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띠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요리장님.”
“다들 일하고 있는데 여기 모여서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들어와서 자기 할 일을 해.”
아체리아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하고 쌀쌀맞았다. 그리고 결코 세 사람에게 경어를 쓰는 법도 없었다. 락케 패거리는 아체리아가 돌아서자마자 이를 갈면서 그녀의 등을 노려보았다.
‘기분 나쁜 인간들.’
아체리아는 불쾌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의 점심 식사 메뉴는 기러기 고기를 이용한 스테이크와 그 알을 쓴 오믈렛, 그리고 유자를 넣어 상큼하게 끓인 수프다.
“뼈를 잘 떼어 내도록 해. 공작님께서는 스테이크에 뼈가 있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네, 요리장님.”
기러기 고기를 손질하는 것은 요아킴의 몫이었다. 요즘 그는 아체리아가 하는 말을 곧잘 듣고 따라 해, 요리 솜씨가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담백하게 끓인 육수에 크림과 유자, 그리고 맛을 돋울 허브를 넣어 걸쭉해질 때까지 휘저었다. 오믈렛에는 클라우스가 딱히 즐기지 않는 채소를 잘게 썰어 다져 넣고, 버터를 써서 부드럽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기러기는 날것으로 먹어도 맛이 좋답디다.”
식기를 준비하고 있던 프레드의 말에 다른 요리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것으로 먹는다고?”
“조금도 익히지 않고?”
“그렇다니까. 그리고 알도 날것으로 먹는대.”
몇몇이 으, 하는 신음을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비릴 것 같은데.”
“요리사라면 도전 정신을 좀 가져야죠.”
아체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공작님께 그 날것으로 된 요리를 가져가면 아마 기겁을 하실걸요.”
“우릴 다 해고하시고 말겠지.”
프레드의 농담에 주방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화기애애한 와중에, 락케 패거리들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술을 실룩이고 있었다.
* * *
식당에 앉아 있는 클라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먹는 것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아체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시종들의 그의 앞에 순서대로 접시를 내려놓자, 아체리아는 여느 때처럼 클라우스의 옆에 서서 메뉴를 읊기 시작했다.
“오늘의 수프는 유자와 크림을 넣어 끓인 유자 수프입니다. 허브를 넣고 함께 끓여 상큼하고 산뜻하니 입맛을 돋우시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메인은 기러기를 이용한 스테이크와 기러기 알 오믈렛입니다.”
“기러기? 갑자기 웬 기러기야.”
“육류를 대는 상인이 오늘 아침 사냥꾼에게서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다듬으면서 보니 육질이 부드럽고 신선했습니다. 맛있을 테니 드셔 보세요.”
클라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좀처럼 커트러리를 들지 않자, 아체리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냄새가 나지 않게 허브를 이용해 제대로 조리했습니다. 소스 역시 후추와 토마토를 이용해 걸쭉하게 만들어 고기와 잘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니…….”
“앉아.”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례지만, 공작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앉으라고. 그리고 네 몫의 요리도…… 호즈만.”
“예, 주인님.”
“가서 아체리아 몫의 요리도 가지고 오라고 주방에 일러.”
늙은 집사 호즈만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체리아와 시선을 교환했지만, 감히 주인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호즈만이 허둥지둥 주방 쪽으로 달려가고 나자 아체리아는 뒷짐을 진 채 몸을 살짝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몰라? 같이 식사하려고 하잖아.”
“아니, 왜 갑자기 저랑…… 고용인과 주인이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껏 나랑 식사한 건 그럼 뭐였어?”
그거야 왕궁 안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았나. 그리고 굳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우겨 댄 것도 자신이면서…….
아체리아가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 동안 시종들은 재빠르게도 아체리아 몫의 요리를 식당으로 가져왔다. 클라우스의 앞에 놓인 것과 완전히 똑같은 메뉴가 하나 더 차려지자, 아체리아는 왠지 허둥거리면서 테이블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이러시면 고용인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집니다, 공작님.”
“앉아. 내가 앉으라는 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대체 이러는 저의가 뭐지. 아체리아는 갑갑함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모자는 벗고.”
“아참.”
아체리아가 허둥지둥 모자를 벗자, 클라우스는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유자 수프를 한 입 떠먹는 그의 표정을 살피던 아체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에 맞으신가요?”
“별 걸 다 묻는군. 평소에는 그런 질문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그거야…… 공작님께서 갑자기 이런…….”
“앞으로는 나랑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해.”
“예?!”
아체리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호즈만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다행히, 클라우스나 아체리아나 둘 다 그것을 보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