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 계집애가 말을 타러 갔다고?”
로널드 락케가 삐딱한 목소리로 되묻자, 듀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대공까지 오셔서는 아주 극진하게도 모셔 가는데, 하 참, 기가 막혀서.”
“그렇게들 오냐오냐하니까 무서운 것도 모르고 날뛰지. 안 그래요, 락케 씨?”
요즘 이 세 사람은 모이기만 하면 아체리아에 대한 험담을 해 대느라 바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아체리아가 필리파 왕녀가 만찬을 열 수 있도록 요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더욱더 정도가 심해졌다.
마치 아체리아가 부모의 원수나 되는 양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었다. 다른 요리사들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세 사람을 피하는 판이었지만, 로널드 락케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바키나 듀켄은 여전히 락케의 눈치나 보며 그가 하는 대로 장단이나 맞추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계시기만 할 건 아니죠?”
바키는 듀켄보다는 간사한 놈이었다. 그는 락케가 기회를 잡을지 못 잡을지, 그것을 슬슬 가늠하고 있었다. 락케가 이대로 무너져 회생 불가능하게 된다면 언제 그를 따랐냐는 듯이 내버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락케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바키가 괘씸하대도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아체리아를 쳐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들이 필요했다.
“당연하지. 두고 보라고. 조만간 그 계집애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고야 말 거니까.”
락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서쪽 언덕에는 그 텅 빈 저택이 있잖아요. 거기 확 갇혀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 버리면 좋겠네요.”
듀켄이 머저리처럼 낄낄거리며 말했다. 락케는 입가를 삐뚤게 끌어올리면서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래 주면 더 바랄 게 없지. 확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 * *
타다 보면 익숙해진다는 에른스트의 말은 분하게도―아체리아에게는― 진짜였다. 머리 꼭대기에 걸렸던 해가 서쪽으로 약간 기울었을 무렵, 아체리아는 고삐만 붙잡고 덜덜 떨던 오전에 비해 꽤 능숙하게 말을 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여전히 에른스트나 클라우스처럼 빨리 달리는 건 무서웠지만,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말은 순했고, 아체리아가 갈기를 쓰다듬어 주면 기분 좋다는 듯이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아체리아는 말 위에 앉아 언덕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면서 멀리 달려간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두 남자가 하루 종일 자신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던 덕분에 평소보다 두세 배는 피곤했다. 서로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달려드는데, 둘이 하는 말이 각각 달라서 한 번은 거의 싸울 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대체 둘 다 뭐 하자는 걸까?’
자신은 단지 요리사일 뿐이다. 누구나 탐내며 달려들 만한 미모의 귀족 아가씨도, 어느 나라의 왕녀도 아니었다.
빨간 머리 하나가 눈에 띈다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지금껏 주방을 거쳐 간 요리사들 중 아체리아 또래의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체리아에게 달콤한 말을 건네거나 다정한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은 없었다.
즉, 아체리아는 연애에 있어서는 완전히 숙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아체리아에게도 클라우스와 에른스트의 행동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자신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둘 다…….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언덕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돌아오는 클라우스와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클라우스 쪽이 미세하게 앞서 있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말을 잘 타시는 줄은 몰랐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타는 클라우스의 모습을 보며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젬병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은 에른스트보다도 더 잘 타는 것 같았다. 말을 다루는 것도 능숙했고, 말 위에 앉은 모습은 왕이라도 되는 양 위풍당당하고 근사해 보였다.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깨끗한 흑발이 바람에 흩날릴 때면 우습게도 ‘잘생겼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찬사를 보낼 법한 에른스트보다도 훨씬 더.
날카롭게 뻗은 콧대와 섬세한 턱, 꽃잎을 문 듯한 붉은 입술이 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은 평소 클라우스의 얼굴에 한 번도 설렌 적 없던 아체리아의 가슴마저도 술렁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요즘 잘해 주시는 건 좋지만, 어째 이상하단 말이야…….’
도대체 클라우스는 왜 그러는 걸까? 에른스트야 자신에게 ‘좋아한다’, ‘대공비가 되지 않겠냐’는 장난을 워낙 자주 치니까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클라우스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리라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는 멀찌감치 떨어진 언덕 위의 아체리아를 올려다보며 말을 몰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별로 없었다.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아체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물결처럼 보였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고삐를 세게 내리쳐 말을 달렸다. 그러면 뒤에서 에른스트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말발굽 소리가 뒷덜미를 붙잡을 듯 바투 가까워지면 다시 속도를 줄이는 식이었다.
“클라우스.”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클라우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클라우스!”
에른스트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클라우스는 그제야 속도를 늦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왜?”
“자네에게 할 얘기가 있어.”
클라우스는 어금니를 꾹 깨물면서 고삐를 살짝 당겨 말을 멈추었다. 에른스트 역시 그의 옆에서 말을 세우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수통을 꺼내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마시겠나?”
“됐어. 할 얘기가 뭐야?”
아무래도 오늘 하루 종일 있었던 일―아체리아에게 서로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려 옥신각신했던― 때문인지, 되묻는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다.
“클라우스, 너 말이야.”
클라우스와 에른스트 사이의 호칭은 ‘자네’에서부터 ‘너’까지 자유로이 오락가락했다. 어렸을 때의 버릇이 고쳐지지 않고 굳어진 때문이었는데, 에른스트가 클라우스를 대놓고 ‘너’라고 부를 때는 대개 두 가지 경우였다.
화가 났거나, 기분이 아주 좋거나.
“정말로 아체리아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고삐를 쥐고 있던 클라우스의 손이 천천히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에른스트의 멱살이라도 잡아챌 기세로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에른스트?”
“그래. 대답해야 해.”
“왜지?”
“난 아체리아에게 진심이니까.”
에른스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클라우스는 순간 헛웃음을 쳤다가, 이윽고 표정을 굳힌 채 에른스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먼 시간이었다. 땅거미는 한 시간쯤 더 있어야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에른스트의 표정은 밤이 찾아온 것처럼 그늘이 져 있었다.
“그래서, 자네가 그녀에게 진심이니까 내가 아체리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알아서 떨어지란 말이 하고 싶나?”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군. 하지만, 그래. 네 말이 맞아.”
클라우스의 말이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그는 말의 갈기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면서 언덕 위에 있는 아체리아의 모습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아체리아를 좋아해서 이러는 것이냐고?
“그러니까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군.”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라우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면서 아체리아로부터 시선을 돌려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좋은 남자였다. 친구여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랬다.
대공이라는 지위, 공들여 깎은 조각처럼 근사한 얼굴과 다부지고 건강한 몸, 부드럽고 상냥한 성격, 아름답고 재치 있는 말솜씨. 자신과 비교한다면, 에른스트 쪽이 수십 배는 더 낫다고 클라우스 스스로도 생각했다.
만약 에른스트가 진심으로 아체리아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공비로까지 맞을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보내 주는 것이 아체리아를 위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아래로 내리깔렸던 클라우스의 시선이 다시 에른스트를 향했다. 지금 이 순간, 언덕 위에 있는 아체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둘 중 누구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자신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 클라우스는 유치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에른스트가 아체리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라고 해도,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환상적인 짝이라고 해도 그녀를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했다.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종이가 물에 젖듯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어떤 시간에 서서히 단풍이 들듯이.
아체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은 후였다.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눈을 뜨면, 눈을 감으면,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아체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목소리가 듣고 싶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건강한 웃음소리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방진 구석도, 솔직하게 걱정해 주는 것도 전부 다 가지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클라우스의 입에서 마침내 대답이 떨어지자, 에른스트의 표정에 좀 더 그늘이 졌다.
“아체리아를 좋아한다고?”
“그래. 좋아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 자네의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에른스트.”
“왜? 자네는 아체리아를 싫어하지 않았나. 사사건건 아체리아에게 까탈스럽게 굴었잖아. 그런데 어쩌다?”
“그걸 설명할 수 있었다면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에른스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넌 늘 아체리아에게 진심이라고 말했었지, 에른스트. 자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네로 인해 아체리아가 겪게 될 어려움도 생각을 좀 해 보길 바라.”
“너는 뭐 다를 것 같아? 그녀가 대공비가 되는 걸 반대할 사람이 있다면, 공작 부인이 되는 걸 반대할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그래. 하지만 난 더 이상 걸리적거릴 게 없거든.”
그가 말하는 ‘걸리적거리는 것’이 바로 부모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챈 에른스트는 한 번 더 허탈한 소리를 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스와 달리, 에른스트는 부모가 둘 다 생존해 있었다. 대공령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걸리적거리는 문제들이 있다 하더라도 난 양보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고삐를 휙 잡아당겨 말을 돌렸다. 언덕 위로 달려가는 클라우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에른스트는 이마를 싸쥐며 작게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