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승마?”
클라우스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에른스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공작저를 방문한 에른스트는 어디로 보나 말을 타고 한바탕 달릴 각오를 하고 온 차림이었다.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에 착 달라붙는 퀼로트와 레이스 부츠, 가죽조끼까지 갖추고 한 손에는 마편을 건들건들하게 든 모습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양 잘 어울렸다.
“그래, 승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너하고 말 타 본 게 전생의 일 같아서 말이야.”
클라우스는 무슨 미심쩍은 일을 꾸미느냐는 표정으로 한 번 더 에른스트를 훑어보다가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왜?”
승마를 가자며 아침 댓바람부터 쫓아온 에른스트는 클라우스뿐만 아니라 아체리아도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니 클라우스가 뾰족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체리아도 말을 타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그것 이외에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겠냐는 듯이 말했지만, 클라우스는 에른스트의 의도가 그 이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책을 밀어 놓은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승마복이 없을 텐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해 왔으니 염려하지 마.”
“승마복을?”
“그래. 오늘은 정말 말만 같이 타러 온 거니까 그렇게…….”
“…….”
“날 세우지 않아도 괜찮네, 친구.”
클라우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속을 들킨 것 같은 뜨끔함에, 그는 호즈만을 불러 아체리아를 데려오도록 했다.
“말을 타 본 적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럼 가르쳐 주면 될 거 아닌가. 나도, 그리고 자네도 말을 탈 줄 아니까 둘 중 한 사람이 가르쳐 주면 되겠지.”
에른스트의 말에 클라우스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시장에 나가려다 대뜸 불려 온 아체리아는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말에 예상대로 기겁을 했다. 자신은 한 번도 말을 타 본 적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부터 시작해, 승마복 같은 건 입어 본 적도 없다는 말까지 변명이 다양하게도 튀어나왔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결국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의 눈빛―그리고 설득―에 못 이겨 옷을 갈아입고 올 수밖에 없었다.
승마복을 입고, 치렁치렁한 머리를 단단히 묶은 아체리아는 마치 당장이라도 기마대에 입단할 젊은 기수처럼 보였다. 키가 크고 골격이 단단해, 겉모습만큼은 그럴싸했다.
“아니, 말을 타러 가고 싶으시면 두 분이 함께 가시면 될 일이지! 왜 저까지 데리고 가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두 사람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온 아체리아가 항의했다.
“저는 정말 말을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니까요!”
“이제부터 탈 줄 알게 될 거야.”
에른스트가 여유롭게 말했다. 아체리아는 속이 터진다는 듯이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고는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공작님, 공작님께서 대공 전하께 말씀 좀 해 주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
“저랑 승마를 하셔도 하나도 재미있지 않을 거라고요. 말고삐도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사람이랑 말을 타 봐야 귀찮기밖에 더하겠어요? 공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니, 재밌을 것 같은데.”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기대를 말 한마디로 보기 좋게 배신해 버리고 말았다.
‘이 남자들 때문에 내 인생이 피곤하다고!’
자신은 그냥 좋아하는 요리나 하면서 살면 그만인데. 왕궁이니, 승마니 하는 귀족적인 것들과는 솔직히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도 오래간만에 시장에 놀러 가 신기한 향신료 구경이나 잔뜩 하고, 요리사들의 야식으로 만들 소소한 재료 같은 것들을 사 볼 계획에 들떠 있었는데…….
“자, 이게 네가 탈 말이야.”
아체리아는 에른스트가 끌고 온 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매끄러운 밤색 털과 검은 갈기를 가진 말은 에른스트에게 고삐를 잡힌 채 이따금 투레질을 해 댔다.
“순하고 말 잘 듣는 녀석이니까 널 떨어트리지 않을 거야. 여기서 타긴 좀 그렇고…… 가까운 언덕으로 갈까.”
“‘소름 끼치는 저택’이 있는 언덕 말이지?”
클라우스가 말하자 에른스트가 바로 그렇다는 듯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소름 끼치는 저택’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아체리아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나? 여기서 서쪽으로 좀 가면 제법 넓고 평평한 언덕이 하나 나오는데, 그 언덕 너머에 아주 오래전에 주인들이 다 죽고 텅 빈 저택이 하나 있거든.”
“그런데 왜 ‘소름 끼치는 저택’이에요?”
“왜냐면, 옛날에 그 저택의 이웃에 살던 사람들이 밤마다 저택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야.”
클라우스는 무척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아체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유령이 나오는 저택이라는 거예요?”
“그냥 헛소문이겠지. 유령이 어딨어.”
클라우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이웃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전부 다 이사를 가고 말았지. 덕분에 그 언덕 너머는 지금 아예 텅 빈 마을이 돼 버렸어.”
에른스트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를 거들었다.
아체리아는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적거리며 몸을 빼려 했다. 막 걸음을 돌려 뒤로 달아나려는 순간, 클라우스의 팔이 아체리아의 어깨를 확 안았다.
“어딜 가려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에른스트는 얼른 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건 위험하다. 에른스트는 고삐를 잡으러 갔던 척 금세 능청을 떨면서 아체리아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아가씨의 선택만 남았군.”
“네? 선택요? 무슨 선택요?”
“언덕까지 누구와 함께 말을 타고 갈지 정해야지.”
“정하긴 뭘. 내가 태우고 갈 거야.”
클라우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말 하나만큼은 잘 탔다. 다방면으로 못 하는 게 없는 에른스트도 승마에서만큼은 클라우스를 이기기 힘들었다.
“아체리아에게 정하게 해.”
에른스트가 고삐를 놓지 않은 채 말했지만, 클라우스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의 말고삐를 휙 낚아챘다.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아체리아는 어떻게 하면 이 무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허리를 받쳐 올리는 클라우스의 손을 의식하자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고 말았다.
“자, 자, 잠깐만요! 이렇게 빨리요? 지금 당장요?”
“그럼 해 질 때까지 기다리려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고삐를 잡아. 등자를 딛고…… 그렇지. 이제 올라가.”
아체리아가 어찌저찌 말 등에 올라타자, 클라우스도 그 뒤를 이어 몸을 휙 날리듯 말 위에 탔다. 에른스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치기당했네.”
“네? 대공 전하, 새치기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체리아가 묻자, 에른스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먼저 말고삐를 휙 내리쳤다.
그들은 공작저 주변의 숲을 통해 서쪽 언덕으로 갔다. 평평한 곳이었지만 지대가 꽤 높아서, 언덕 위로 올라오니 저만치 향기 광장까지가 다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곳이었다.
“와…….”
아체리아는 말 위에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곳이 있는데 왜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넌 어렸을 때부터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만사가 즐거웠으니까 그렇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아니, 잠시만요! 공작님! 저만 두고 내리시면 어떻게 해요!”
“호들갑 떨지 말고, 고삐를 잘 잡아.”
고삐를 잘 잡으라니, 말이 쉽지……! 아체리아는 안장 위에서 뻣뻣하게 앉은 채 말의 고삐를 꽉 틀어쥐었다. 말이 불만스럽게 투레질을 하자 긴장이 되어 목부터 허리까지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체리아, 너무 긴장하면 말을 탈 수 없어. 편안하게 앉아.”
에른스트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남자들이, 자기들은 할 줄 안다고…….
“정 무서우면 요리하는 생각이라도 하든가.”
“말을요?!”
“뭐? 무슨 헛소리야! 말을 타고 있으면서 말 요리를 생각하다니, 사람이 할 짓이야?”
“아니, 이런 상황에 갑자기 요리 이야기를 꺼내시니까 그렇…… 아, 잠깐! 잠깐만요! 공작님! 움직이지 마세요! 으악!”
아체리아가 소리를 쳤지만 클라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그녀가 탄 말의 고삐를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말은 생각보다 몸집이 거대했다. 뒤에서 클라우스가 고삐를 쥐고 있을 때는 그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혼자 타고 있으려니 아체리아는 온몸이 휘청거리는 기분에 어쩔 수 없이 뻣뻣한 자세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체리아, 그렇게 말을 타면 내일은 몸져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될 거야.”
나머지 말들을 나무에 매어 두고 온 에른스트가 옆에서 걸으며 도움 안 되는 소리를 해 댔다.
“아니, 하지만……! 힘을 빼면 떨어질 것 같단 말이에요……!”
“안 떨어진다니까.”
클라우스가 시큰둥하게 말하며 고삐를 살짝 당겼다. 타박, 타박, 하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가 싶더니, 말의 속도가 약간 빨라졌다.
“달리면 안 돼요! 으악! 달리게 하지 마세요!”
“힘을 빼라니까.”
“클라우스, 넌 너무 못 가르쳐.”
에른스트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클라우스의 미간이 희미하게 찡그려진 순간, 에른스트는 등자를 딛고 단숨에 말 위로 휙 뛰어올랐다.
“으악!”
“자, 아체리아. 고삐를 잡을 때는 이렇게…… 손을 조금 간격을 두고. 그렇지. 그리고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허리에서도 힘을 조금 빼도 괜찮아. 그래, 이렇게…….”
다정하고 단단한 손길이 아체리아의 어깨와 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래에 서 있는 클라우스를 쳐다보는 에른스트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클라우스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겁내지 않아도 돼. 앞을 똑바로 보고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는 거야. 말은 똑똑한 동물이니까, 네가 긴장하면 말도 같이 긴장한다고.”
“그……거야, 대공 전하께서는 말을 탈 줄 아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아니라니까. 자, 봐. 자세가 훨씬 좋아졌네.”
에른스트는 클라우스를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아체리아와 함께 말을 타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의 눈빛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는 네가 먼저 새치기를 하지 않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