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0)화 (50/144)

50화

‘게다가.’

게다가, 에른스트의 그 행동……

시드레는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날 밤의 광경을 곱씹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체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에른스트의 모습에서는 누가 보아도 애틋한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입맞춤을 받는 당사자만이 에른스트의 감정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그런 여자에게…….’

다시 생각해도 분한 일이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에른스트의 입맞춤은커녕, 다정한 시선 한 번 받아 본 적 없었는데. 자신이 다가가면 에른스트는 언제나 그만큼 멀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데 고작 요리사 따위에게 그런 눈빛을 하다니? 시드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드레야말로 아체리아가 생각하는 ‘귀족’의 전형이었다. 집에서 부리는 고용인, 집사장이나 하녀장에서부터 아래로는 마구간지기나 정원사에 이르기까지. 직급을 막론하고,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니라고도 생각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사람이라도 엄연히 계층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시드레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귀족이라면, 그것도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절대로 고용인이나 신분 낮은 사람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시드레가 비스몽트 공작저의 응접실을 배회하는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귀족과 하녀 또는 하인의 사생아가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시드레는 결코 그럴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에른스트 님도 진심은 아니실 것이다……. 뭐, 건강한 남자가 정부를 원할 수도 있는 거지. 속설에 빨간 머리들은 정열적이라는 말도 있고.

그 여자, 클링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 요리사는 여자치고 제법 키도 큰 데다가 얼굴도 그만하면 반반하니 흥미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그 정도가 시드레가 타협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에른스트가 아체리아를 노리개로 생각한다고 여겨야만 그녀의 자존심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하오.”

문이 열리고, 클라우스가 들어왔다. 시드레는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반 바퀴 돌려 그를 향해 나붓이 드레스를 펼쳤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당황스럽다는 걸 알아주니 고맙군. 어쩐 일이오?”

“자리부터 권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시드레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들었지만, 일단은 손님인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내어져 오고, 잠시 그것을 마시느라 침묵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 오갔다.

클라우스는 시드레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집을 방문했는지 탐색하기에 바빴지만, 그런 것치고 시드레는 너무나도 목적이 없어 보였다. 정말로, ‘그냥 지나가다가 들러 본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저쪽에 걸린 초상화는…….”

시드레가 응접실 한켠에 걸려 있는 선대 공작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내 아버님이시오.”

“아, 그렇다면 18대 비스몽트 공작님이시로군요. 어쩌면, 얼굴이…….”

미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나오는 대로 말부터 내뱉으며 초상화를 다시 본 시드레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자지간이니 당연히 ‘얼굴이 참 많이 닮으셨네요’라는 말을 해야 맞는 건데, 초상화 속의 18대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19대 비스몽트 공작의 얼굴은 정말이지 전혀, 단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무척, 품위가 있어 보이시고…….”

“굳이 말을 꾸며 낼 것 없소. 난 아버지를 닮지 않았지, 맞아. 어머니를 조금 더 닮긴 했지만, 내가 가장 닮은 건 17대 공작이었던 내 외조부님이오.”

“아아, 그러시군요. 어쩌면. 외조부님께서도 공작님처럼 빼어난 미남이셨던 모양입니다.”

“글쎄.”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번득거리는 독수리 같은 영감이었다. 클라우스는 이미 죽고 없는 외조부를 향해 신나게 이죽거리면서 차를 훌쩍 들이켰다.

“저어, 공작님께서는…… 비스몽트 공작저를 물려받으신 지 이제 5년이 되셨지요?”

“그렇소만.”

“그 시간 동안…… 그간 제가 알기로는 연회나 사교 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아니시기에 궁금증이 일더군요. 과거엔, 왜 그러셨나요?”

“별 이유는 없소. 그냥 사람들이 싫고, 시끌벅적하게 뭘 먹는 것도 싫어해서 그런 거지.”

“그럼 지금은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니, 여전히 싫소.”

도통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남자다. 그날, 필리파의 내실 앞에서 만났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옆에 요리사가 있어 체면을 차리느라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드레를 향한 클라우스의 응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여기에는 요리사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시드레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애당초 자신에게 무뚝뚝하고, 그리고 불친절하게 구는 남자를 겪어 보지 못한 시드레에게 있어 클라우스의 태도는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그냥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 정도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남자가 자신에게 불친절하게 굴겠는가?

“저, 공작님.”

“슬슬 왜 왔는지 이유를 이야기해 주지 않겠소?”

시드레의 뺨이 붉어졌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본론만 말하고 빨리 꺼져라’는 티가 클라우스의 온몸에서 풍기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호되게 축객령을 받아 보는 것도 그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 저어, 네. 그렇지요.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이걸 드리기 위해서였답니다.”

구겨지려는 표정을 한순간 미소로 감춘 시드레는 능숙한 태도로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초대장 하나를 꺼냈다.

겉봉에 시드레 백작가의 문양이 근사하게 찍혔고, 테두리에는 진짜 금으로 만든 박 장식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초대장이었다.

“실은, 제가 정기적으로 여는 살롱 파티가 있답니다. 숙녀 분들뿐만이 아니라 신사 분들께서도 많이 오시지요. 부디 이번 살롱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미안하군. 난 관심 없으니 에른스트에게 주지 그러오?”

클라우스는 두 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시드레에게 초대장을 도로 넘겨주었다.

굳이 에른스트에게 주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좋았겠지만 구태여 그 말을 덧붙인 것은 그날, 왕궁에서의 그 밤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복수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대공 전하께도 여러 번 드려 보았지만, 늘 거절만 하셔서…….”

시드레는 풀이 죽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모로 떨어트렸다. 그런 행동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지만 클라우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난 사교 모임에는 여전히 별 관심이 없소.”

“하지만, 공작님! 그러시다면 대공 전하와 함께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두 분이 함께 와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일 텐데…….”

“에른스트는 늘 거절만 했다면서? 이제 와 내가 가자고 한들 가겠소?”

“두 분은 아주 친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더 들을 필요가 없겠군.”

클라우스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이것은 아까보다도 더욱 명확한 축객령이다. 시드레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벌리자, 그는 친절하게도 집사를 응접실로 불러와 이렇게 말했다.

“손님을 배웅해라.”

호즈만은 충직하게 고개를 숙이고, 얼떨떨해하는 시드레를 자연스럽게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저택 밖으로 나온 시드레는 때마침 텃밭 쪽에서 정원으로 돌아 나오던 아체리아와 마주쳤다. 바람에 흩날리는 빨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한순간 잊고 있던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시드레를 본 아체리아는 허둥거리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단지 예의상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고용인이라면 응당 자신을 볼 때 ‘백작님’이라며 허리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드레로서는 마음에 찰 리 없는 인사였다.

주방 쪽으로 가는 아체리아를 불러 세우려던 시드레는 순간 패를던이 당했던 봉변이 떠올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만.’

귀족이 요리사쯤 희롱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백작의 머리 위에 음식물 찌꺼기를 퍼부은 것도 모자라 고개까지 숙이게 했던 클라우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저 계집애의 어디가…….’

틀림없다. 시드레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아체리아의 뒷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를 뽀드득, 갈았다. 그녀로서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사실 한 가지가 이미 선명한 형태를 띤 채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즉, 클라우스 역시 에른스트와 같은 눈길로 아체리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두 남자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그 이유까지 똑같다니!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시드레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뭐 제 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데 어떡하겠는가. 머릿속을 뜯어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닌걸.

하지만 이런 일은, 이런 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대가 귀족이면 말도 안 해…….’

설령 상대가 릴리엇이었다고 해도 결코 말을 안 할 시드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패배감을 덜 느꼈을지 몰랐다.

자신이 클라우스와 에른스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은 이제 뒷전이었다. 줄타기를 시도하려 하면 뭣하겠는가, 애초에 줄을 걸어야 하는 가지 자체가 다른 곳을 향해 뻗어 있었는데.

‘그럼 가지를 되돌려 놔야지. 안 된다면 잘라 내서라도 내 줄을 걸 수 있도록 해야지.’

흔들리는 마차에 실린 채 공작저를 벗어나며 시드레는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면 그 문제를 치워 버리면 되는 것이다. 시드레의 계산은 항상 단순했고, 그만큼 명료한 결론이 나왔다.

‘치워 버리면.’

그러면 되는 게 아닌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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