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니, 잠깐만.
아체리아는 드문드문 이어지던 생각을 잠시 끊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클라우스가 변한 이유가, 설마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체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은 분명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아체리아는 말이 술술 나오지 않는 현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착각도 정도가 있지.
에른스트가 하도 좋아한다, 좋아한다 장난을 쳐 대니 자신도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런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클라우스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한참 머뭇거리던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얼굴에는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안심한 것 같기도 한 씁쓸한 미소가 묘한 빛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고도 결국 나온 답이 ‘모르겠다’야?”
“대공 전하, 저는 수수께끼에 취미가 없어요.”
“이건 수수께끼가 아냐, 아체리아.”
에른스트는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아체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곧 떨어졌다.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시다 하지 않으셨나요?”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음에도 아체리아의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어 에른스트를 조금 실망하게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라 클라우스였어도 어쩌면 비슷한 반응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또 한 번 안심하게 만들었다.
“방금 그걸로 된 것 같아.”
“방금요?”
‘설마 이거?’라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체리아가 제 이마를 가리켰다. 에른스트는 어깨를 흔들며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클라우스가 왜 그러는지를 아직 전혀 모르겠다면, 내게도 희망이 있는 거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게 있어. 자, 난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어. 넌 머리라도 좀 더 식히고 들어오도록 해.”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고는 먼저 만찬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 남은 아체리아는 창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관절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에른스트가 장난을 쳐 대는 것도 떨쳐 버리기 버거운데, 클라우스에 대한 이상한 소리까지 들어 버리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클라우스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내가 왜 이러는지도 너는 전혀 알지 못하겠군.’
그러니까, 클라우스랑 에른스트의 행동에 똑같은 이유가 있다…… 뭐, 그런 말인데.
에른스트가 아체리아에게 좋아한다고 구애를 해 온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체리아는 시종일관 에른스트의 구애를 장난 취급해 왔다.
어떻게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상대는 대공이었다. 그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말을 믿는다면 그건 바보나 할 짓이다. 그 대상이 자신과 같은 평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 만약 에른스트가 진심이었다면?
‘거기에 더해서 공작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아체리아는 혼잣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만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아체리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클라우스가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부터 몰래 그들의 뒤를 밟아 따라 나왔던 사람, 에른스트가 아체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해 입술을 깨문 사람.
시드레 백작이었다.
* * *
패를던 때문에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필리파 왕녀가 주최한 만찬은 성황리에 마무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방식의 요리와 접대를 신기하게 여겼고, 또 젊은 축이 대다수였던지라 대체로 편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만찬으로 인해 필리파가 얻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많았다. 그녀는 능숙한 언변으로 진보파의 귀족 여럿을 비밀리에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별로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필리파의 말솜씨와 재능, 깊이 있는 안목에 찬탄했으며 국정을 걱정하는 마음씨를 칭송했다.
비스몽트 공작인 클라우스 역시도 그 만찬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필리파 왕녀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호의적으로 바뀌어 갔으니 말이다.
필리파가 비스몽트 공작과 깊은 친분을 갖게 되었다는 소문은 사교계의 소식통들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만, 클라우스 자신은 왕궁에서 돌아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예전처럼 식사를 자주 걸렀고, 겨우 입을 대는 것이 있어도 반 그릇도 먹어 치우지 못한 채 접시를 물려 버리곤 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초조해진 것은 아체리아였다. 이제 좀 사람다운 몰골이 되도록 살을 찌워 놨나 싶었는데!
“입맛이 없다고 하잖아.”
“그래서 입맛을 돋울 수 있도록 계절 과일을 이용해 시원한 디저트를 만들었습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드신 게 없잖아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
“그날 왕궁에서.”
갑자기 이건 또 뭐야. 거의 애원하다시피 디저트를 들이밀던 아체리아는 뜬금없이 튀어나온 왕궁 소리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에른스트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예? 대공 전하랑요?”
“그래. 내가 들어가고 난 뒤에 한참 있다가 들어왔잖아.”
“별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별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가 뭐였느냐고.”
왜 이렇게 집요하게 캐묻는 건지. 아체리아는 한숨을 쉬면서 들고 있던 디저트 접시를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그렇게 한숨을 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에른스트와의 일을 끝끝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보여서…….
에른스트라면 자신보다 더 다정한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에른스트 앞에서는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르지…….
클라우스는 요 며칠 내내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자신이 무슨 의처증 환자처럼 아체리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요즘 공작님께서 많이 변하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변해?”
“네. 사실, 많이 변하긴 하셨죠. 요 며칠 동안은 또 원래대로 돌아오신 것 같지만요.”
“변했다는 게 설마 먹는 것 이야기야?”
“그것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면이…….”
“그걸 왜 에른스트랑 이야기하는데?”
“예? 아니, 그거야 대공 전하께서 그 말씀을 먼저 꺼내셨으니까…… 이야기한 거지요.”
“정말 그게 단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다는 아니지만, 거의 전부이긴 했다.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우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디저트 접시를 자기 앞으로 슥 끌어당겼다.
그것을 본 아체리아의 표정이 반짝 밝아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드실 건가요?”
“하도 시끄럽게 구니까 그렇지.”
“시끄럽게 굴면 식사를 하신단 말씀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어디 가서 앵무새라도 빌려 와야 하겠네요.”
“또 헛소리.”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만.”
클라우스는 투덜투덜하는 소리를 내면서 차가운 디저트를 조금씩 떠먹었다. 제철이라 싱싱한 과일을 차게 만들었다가, 한꺼번에 얼려서 통째로 셔벗으로 만든 뒤 시럽을 뿌린 것이었다.
원래 몸이 약했을 때는 이런 찬 음식도 함부로 먹지 못했지만, 요즘은 하루 한 번쯤 디저트를 먹는 정도로는 탈도 잘 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클라우스 자신도 몸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 아체리아 덕분이라는 것도.
“주인님, 시드레 백작이 오셨습니다.”
“시드레 백작?”
디저트를 먹던 클라우스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호즈만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그녀가 왜 공작저에?
“어디 있지?”
“응접실로 모셨습니다만…….”
“기별도 없이 갑자기 왔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다음에 오시라 말씀을 드릴까요?”
시드레 백작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에른스트를 찾아간다면 또 모를까.
아니, 혹시 에른스트와의 결혼을 추진해 달라고 조르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국왕이 시드레 백작에게도 ‘비스몽트에게 가서 말해 보라’고 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국왕의 말을 듣는 시늉은 해야 하니 만나야만 했다. 아무리 오늘내일하는 왕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관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곧 가지.”
“잘 알겠습니다.”
호즈만이 물러가고 나자, 아체리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드레 백작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난들 알아. 제대로 인사도 한 번 안 나눈 사이인데 이런 방문이라니, 예절이 엉망이야.”
클라우스가 솔직하게 투덜거렸지만 아체리아는 그것을 못 들은 척했다. 손님이건 어쨌건, 시드레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이니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았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겠다면, 백작님을 위해 또 다른 요리를…….”
“아니, 그전에 내보낼 거야. 같이 저녁을 먹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를 위해 요리를 준비할 생각은 하지 마.”
“정말이세요? 하지만 꽤 오래 머무실 수도 있고…….”
“그전에 쫓아낼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딱히 염려를 한 건 아니지만 아체리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간, 시드레는 클라우스가 오기 전까지 공작저의 응접실을 찬찬히 돌아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가구며 집기들, 장식과 태피스트리…… 아마도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이라기보다는 선대, 혹은 그 이전 공작이나 공작 부인의 취미였을 법한 꾸밈새였다.
‘좀 고리타분하지만, 물건들은 하나같이 괜찮은 것들이야. 과연 이름값이 어디 가진 않는군.’
조가비 껍질을 수백, 수천 개 두드려 무늬를 새긴 작은 서랍을 매만지면서 시드레는 노골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대공 전하든 비스몽트 공작이든…… 어차피 엇비슷한 환경이라면 둘 중에 먼저 넘어오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는 거야. 에른스트 전하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으시고 여행도 자주 하시는 분이니 꼬드기기 어렵지만…… 비스몽트 공작처럼 차디찬 사람이 한 번 녹아내리면 끝을 모르는 법이지.’
어차피 에른스트와 정식으로 약혼을 한 것도 아니다.
그 약혼을 하고 싶어서, 대공비의 지위를 약속받고 싶어서 여태까지 몸이 달아 있었지만 에른스트가 영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자신도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