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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48)화 (48/144)

48화

“비, 비스몽트 공작……!”

천지 분간도 못 할 만큼 취한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

패를던은 자신의 몸에 끼얹어진 음식물 찌꺼기에 경악했다가, 그것을 퍼부은 ‘자식’이 클라우스 비스몽트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내게 물을 시간에 자신의 행동이나 돌아보지 그래.”

패를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클라우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아체리아를 그의 앞으로 데리고 나오더니,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한 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과하시게.”

“뭐, 뭐라고요……?”

“내 요리장에게 사과하라고. 듣지 못했나? 오늘은 왕녀님의 만찬을 위해 잠시 왕성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본디 그녀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사람이지. 공작저의 고용인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은 곧 나를 모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야. 심지어 내가 이 자리에 있음에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고.”

패를던은 그제야 술이 다 깬 얼굴로 클라우스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술기운에 저지른 일이 큰 문제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마침내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작 요리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다니, 이런 치욕을 고분고분 겪을 수는 없다.

비스몽트 공작에게 비한다면야 한참 모자라지만, 어쨌거나 그도 백작의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은 그보다 훨씬 드높고 도도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작님.”

“누가 나한테 사과하랬어?”

클라우스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패를던의 말을 잘랐다.

“클링 양에게 사과하라고 했지, 나에게 사과하라고는 하지 않았네. 아니면, 내게도 사과할 일을 저지르겠다는 예고인가?”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오해입니다!”

“그럼 똑바로 사과하게.”

패를던의 튀튀한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물을 뒤집어쓴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여러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아체리아의 앞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좀 더 공손하게 해.”

“……죄송합니다, 클링 양. 술에 취해 무례를 저질렀으니 부디…….”

뒷말이 웅얼웅얼 끊어진다. 그때 누군가 짝, 하는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필리파였다.

“술을 마시더라도 자리는 분간해야지, 패를던.”

“와, 왕녀님. 그게…….”

“지저분한 몰골 들이밀지 말고 썩 나가게.”

패를던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입을 다문 채 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필리파가 한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치욕을 겪다니, 그는 앞으로 적어도 1년은 수도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필리파가 눈짓을 하자,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색하게 멈추었던 악곡이 다시 연주되고,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는 사이 아체리아는 자신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클라우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커프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은 가늘다 못해 뼈대가 도드라져 보일 지경이다. 흰 살갗과 메마른 선…….

그러나 손만은 아체리아보다 클라우스의 것이 훨씬 더 컸다. 아체리아는 그 손이 방금 전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디까지 가시는 겁니까?”

클라우스는 아무도 없는 후원의 구석까지 와서야 아체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왜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어? 너답지 않게.”

클라우스가 말했다. 화가 난 것을 억지로 참는 기색이었다.

“왕녀님의 연회인데 함부로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한마디 해 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왕녀님의 연회건 뭐건, 널 이유도 없이 그렇게 모욕하는데 왜……!”

아니다, 이런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클라우스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셔츠의 단추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풀어 버렸다.

자신도 이 자리가 필리파 왕녀가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면, 왕궁이 아니라 비스몽트 공작저였다면 음식물 찌꺼기를 쏟아붓는 정도로는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접시로 머리를 후려쳤으면 쳤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가 아체리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 버린 순간부터, 클라우스는 이미 머릿속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화가 끓어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저기, 공작님.”

“……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체리아가 말했다. 순순한 그 태도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아체리아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별안간 낯설어서, 클라우스는 또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 저런 머저리들이 들러붙으면 참지 말고 소리라도 질러. 알겠어?”

“왕녀님 앞이라도요?”

“국왕 폐하 앞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러다 제 목이 잘리면요?”

“네 목을 누가 잘라.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클라우스가 인상을 확 찡그리자 아체리아는 그제야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뭐가 우스워?”

“제 목이야 언제든 잘릴 수 있는 건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전 고용인일 뿐이니까요. 귀족 나리들에게 저런 말을 들어도 사실은 눈 한 번 똑바로 뜰 수 없는 형편이죠. 다행히 공작님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저의 건방진 면을 용서해 주시지만 다른 곳,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아체리아의 입으로 고용인이니, 자비니 운운하는 것을 듣기는 싫었다.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아체리아의 팔목을 확 잡아채면서 그녀를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그게 싫어?”

“네?”

“누가 고용인이라고 널 무시하는 게 싫으냐고.”

“아니, 그걸 누가 좋아해요?”

바보 아니냐? 아체리아의 눈빛은 분명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그 눈빛을 보며 시건방지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싫으면 내가…….”

“여기 있었네?”

말이 끊긴 클라우스가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른스트.”

“패를던이 가는 길에 샤워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와인으로 시원하게 목욕을 시켜 주고 오는 길이야. 어, 근데 둘이 뭐 하는 거야?”

에른스트는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게 클라우스와 아체리아 사이로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두 남자 사이에 낀 처지가 된 아체리아는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왠지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은데…… 클라우스가 에른스트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처음 보았다. 게다가 에른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웃고는 있지만 입꼬리가 약간 굳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체리아, 괜찮아?”

에른스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결같이 다정한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다가 아체리아까지도 에른스트에게는 좀 더 다소곳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

“포리지를 확 끼얹어 버리지 그랬어, 그깟 놈.”

“그러면 큰일이 날 텐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그도 그런가.”

에른스트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면서 자연스럽게 아체리아의 어깨를 안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클라우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 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클라우스는 득득 끓기 시작한 속을 건사하지 못하고 휙 돌아서고 말았다.

“공작님!”

“괜찮아. 들어가게 둬.”

“예? 아니, 대공 전하. 이것 좀 놓고…….”

“할 말이 있어, 아체리아.”

클라우스는 분명 에른스트의 말을 들었을 것임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큼성큼 멀어지던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에른스트는 그제야 품에 안다시피 했던 아체리아를 놓아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화내지 말고. 괜찮아? 패를던 자식이 다른 헛소리는 안 했어?”

“……안 했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었어요. 공작님이 음식을 퍼부으셨으니까…….”

“클라우스가 요즘 너에게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 안 그래?”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은 것처럼 처져 들렸다. 아체리아는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클라우스가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예전에는 근처에 얼굴만 보여도 싫어하는 것 같더니, 한 번 대판 싸운 뒤로는 빈정거리기는 해도 두 번 다시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요즘은 식사도 곧잘 하고, 맛있다는 말도 할 줄 알게 되지 않았나. 거기에 더해서 오늘의 일은…….

‘솔직히 정말 의외야.’

평소 아체리아가 알고 있던 클라우스의 성격이었다면 보고도 모른 척했거나, 아니면 아체리아가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지른 다음에야 수습을 하러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것도 아체리아를 위한다기보다는, 필리파 왕녀의 면전에서 구겨질 비스몽트 공작저의 체면을 위해서.

그런 반응을 클라우스의 인간성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귀족들이란 처음부터 생겨 먹길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자신들과 고용인들이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나 할까?

아체리아의 말대로 클라우스는 그녀에게 관대한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은 그게 ‘재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아체리아는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오물을 퍼붓고, ‘클링 양’에게 사과를 하라고 윽박지르는 모습 같은 것은 솔직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클라우스가 왜 그러는 것 같아?”

에른스트의 질문에, 아체리아는 감초를 닮은 갈색빛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왜…… 그러다뇨?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럼 넌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알려 주세요.”

“클라우스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내가 왜 이러는지도 너는 전혀 알지 못하겠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체리아는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정답일 리는 없었다.

“……대공 전하, 설마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말해 봐.”

“……전하의 말씀은, 그러니까…… 공작님께서 저를, 그…….”

“그, 뭐?”

“그…….”

미치겠네,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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