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오네.”
릴리엇이 짓궂게 웃었다.
만찬에 걸맞은 복장을 한 그는 키가 크고 늘씬한 탓인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클라우스는 재빨리 눈인사만 건네고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아는 얼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싫은 티를 낼 것까지야 있어?”
에른스트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자, 클라우스는 모른 척하며 필리파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초대 감사합니다.”
“뭘요. 내 궁에 머무르는 손님인데 당연히 초대해야죠.”
필리파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테이블에 하나씩 세팅되기 시작하는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손님들 역시 이 이색적인 만찬에 도대체 무슨 요리가 나올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요리를 나르는 궁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층층이 쌓인 아름다운 접시와 은제 식기들이 먼저 진열되었고, 그 뒤로 조금씩 나누어 담은 아기자기한 애피타이저와 수프 같은 것들이 순서대로 놓였다.
오븐 안에서 어린 나무의 껍질처럼 노릇노릇한 색으로 구워진 거위 요리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갓 구워 나온 거위에서 풍기는 허브와 소스의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저건 뭐죠?”
누군가 물었다. 때마침 첫 번째 그릴이 막 등장하는 중이었다.
“저건…… 고기를 구울 때 쓰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저런 것을 이곳에?”
사람들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필리파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모이기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던 필리파는 절반 이상의 인원이 궁금증을 표시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사람들을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잔을 들어 보였다.
“오늘의 만찬을 준비한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 여러분들을 위해 재미있는 것을 준비했답니다. 오늘의 만찬에 나올 메인 요리는, 드시고 싶은 것을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즉석에서 조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하네요. 아마도 이 자리의 많은 분들에게는, 제게도 물론 그렇지만 꽤 귀한 구경거리가 되겠지요?”
당연한 일이다. 일평생 요리는커녕 주방으로는 발길도 하지 않는 귀족들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스테이크를 굽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건가요?”
“신기하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길거리 음식을 먹는 평민들도 아니고 이건 좀…….”
필리파는 분분하게 나뉘는 의견들을 들으며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이만하면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셈이었다.
반면 클라우스는 필리파나 에른스트처럼 그렇게 평온하지 못했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간간이 그와 필리파가 어떤 관계냐고 소곤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필리파의 진면목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필리파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만찬을 열었는지, 또 무슨 의도로 이런 면면들을 불러 모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재미있고 신기한 만찬 뒤에 어떤 음모나 의도가 숨겨져 있을 리가 없지.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생각했다. 연회나 티 파티, 살롱 개방 같은 것을 피하던 왕녀도 이제는 한계가 왔겠거니…… 화려한 새들 같은 다른 왕녀들 사이에 가려 언제까지고 칙칙하게만 살 수는 없어서 그런 것이겠거니…….
아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필리파를 제외한 두 사람만은 그녀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다.
“아무래도 인선을 채택하려는 자리 같지?”
에른스트가 소곤거리자, 클라우스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미간을 살짝 좁히며 헛기침을 하는 척 입가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필리파는 란츠호프 후작가도 손에 넣고 싶은 거야. 릴리엇을 계속 달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에른스트가 또 말했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돌려 애피타이저와 수프를 맛보고 있는 필리파를 바라보았다. 릴리엇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옆에서 친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정작 릴리엇은 아무것도 모르는 분위기지만 말이야.”
클라우스가 말했다.
술이 몇 잔씩 돌아가고, 따뜻한 요리를 먹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좀 더 누그러진 분위기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갓 조리한 음식을 바로 받아서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사람들도, 배고픔을 못 이겨서인지 호기심을 못 이겨서인지 어쨌든 접시를 비워 나갔다.
“음! 이 요리, 아주 맛있네.”
누군가 아체리아의 멧새 요리를 먹고 감탄을 했다.
“허브 향이 살짝 나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냄새 하며…….”
“맛은 보기와 완전히 다르네요. 보기에는 그냥…….”
누군가 그릇에 담긴 포리지를 스푼으로 휘저었다. 연한 멧새 고기가 들어간 포리지는 사실 모양 면에 있어서는 다른 요리에 비해 그리 눈에 띄지 못했다.
“하지만 맛있군요. 간도 적절하고, 특히 멧새 고기가 아주 연하면서도 쫄깃쫄깃해요.”
“멧새 말고 다른 고기로 이런 걸 만들어도 맛있을 거 같네요.”
“우리 집 요리사에게도 한번 해 보라 말해야겠어요.”
사람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구운 거위의 배를 갈라 그 안에 든 푸짐한 속과 흘러내린 치즈가 드러났을 때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또 하나 인기를 끈 것은 마렌이었는데, 창문을 열어 놓고 마렌을 굽는 냄새에 후원을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까지 코를 킁킁거리며 홀을 기웃거렸을 정도다.
물론 왕실 만찬이니만큼, 길거리에서 파는 마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재료를 쓰기는 했지만…….
“이 요리는 대체 정체가 뭐야?”
클라우스였다. 멧새 요리가 식지 않도록 은근한 불 위에서 계속해서 휘젓고 있던 아체리아는 킥킥 웃으면서 빈 그릇에 육수와 포리지를 따로 담아 그에게 건넸다.
“궁금하면 한번 드셔 보세요.”
“멧새는 보통 구워서 먹지 않나?”
“멧새 구이를 먹으려면 서서는 무리일 거 같아서요. 좀 더 편하게 드실 수 있는 걸로 해 봤습니다.”
하긴 그렇지. 다 같이 서서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멧새를 통째로 씹어 먹고 있는 것만큼 기괴한 일도 없을 테니.
클라우스는 미심쩍은 얼굴로 포리지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어 보았다. 따뜻하면서도 약간 까끄름한 곡물 특유의 식감과, 기름진 탓인지 쫀쫀하게 혀에 감기는 짭조름한 육수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드라운 고기와 함께 포리지를 삼키면 뱃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치고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양이 괴상한 것치고는 꽤 마음에 드는 음식이었다. 먹고 나서 속이 부대낄 일도 없을 듯했다.
“……그럭저럭이군.”
“그 말씀은 ‘맛있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걸 이제 알죠.”
“너무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공작님께서 한 그릇을 다 비우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아체리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클라우스는 어느새 다 비어 버린 자신의 포리지 그릇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낭패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고는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쑥스러워하기는. 아체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바쁘게 요리를 서빙하는 요리사들을 둘러보았다.
사실 조금 걱정도 되었는데, 이만하면 오늘의 만찬은 성공적으로 끝날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어이, 빨간 머리.”
육수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던 아체리아는 난데없이 들린 취기 가득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딱 보기에도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오른 불콰한 중년 사내가 있었다.
그는 시드레 백작과 육촌 관계에 있는 패를던이라는 남자였다. 연회 같은 곳에만 참석했다 하면 늘상 꼭지까지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런 주제에 주사도 좋지 않은 편이었다.
필리파가 그를 초대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말이 많고 수다스러우니, 오늘 만찬에 참석만 한다면 시키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줄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딱 그 정도 용도였건만, 아체리아에게 시비를 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네가 왜 빨간 머리인지 가르쳐 줄까?”
남자의 말에 아체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빨간 머리로 태어났으니 빨간 머리지, 무슨 이유가 있나?
“경, 죄송합니다만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잠시 쉬시는 게…….”
“야, 네가 뭔데 나한테 술에 취했다 말았다 하는 거야? 내가 술에 취하는 거 본 적이나 있어? 엉?”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귀족이고, 이곳은 비스몽트 공작저가 아니다. 즉, 클라우스에게 하듯이 따박따박 맞받아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네,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왜 빨간 머리인가요?”
“그건 말이야, 으흡, 끄…… 빨간 머리들은 말이지, 엉? 부모가 부정한 기간에 만든 자식이라서 그래.”
패를던은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혼자 낄낄거렸다.
“그래서 빨간 머리가 되는 거지. 할 짓, 못 할 짓을 가려야 하는 때를 구분 못 하고, 천하게……. 말해 봐. 요리사니까 아마 평민 출신이겠지? 네 부모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네가 언제 생겨났는지…… 대답 못 할걸? 왜냐면 딸자식 머리카락이 빨간색이니까!”
아체리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국자를 거꾸로 치켜들 뻔했다.
자신을 놀리고 모욕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미 죽고 없는 부모를 모욕하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설령 애정을 받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부모라고는 해도 말이다.
부르르 떨리던 아체리아의 입술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제 그 입술에서 ‘이 천하의 무례 막심한 빌어먹을 놈!’이라는 외침이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철퍽, 하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질척거리는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패를던은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확인하려는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살집이 접힌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벗겨지기 시작한 그의 머리에서 음식 찌꺼기들이 줄줄 흘러 떨어졌다.
“이…… 이게 뭐야! 어떤 자식이……!”
“‘어떤 자식?’”
싸늘한 목소리가 아체리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패를던의 머리 위에 음식물 찌꺼기를 퍼부은 것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