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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46)화 (46/144)

46화

“자, 그럼 이제 준비를 시작하지요.”

요리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 넓지 않은 주방이었지만, 마치 구역을 나누는 선 같은 것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한 치의 불편함도 없는 동작들이었다.

작은 멧새들을 하나씩 손질해야 하는 아체리아를 요리사들은 내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에 전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멧새구이는 보통 통째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체리아의 말에 요리사 한 명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늘의 멧새 요리는 구이가 아니에요. 곡물을 이용해서 포리지 형태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멧새를 넣은 포리지요?”

“아니, 포리지는 아침 식사 때나 대충 먹는 걸로…… 그것도 귀족들은 먹지도 않는 건데요.”

“그야 그렇지만 오늘은 그걸 메뉴로 정했어요.”

아체리아는 심지어 장난스럽게 한쪽 눈까지 찡긋하는 여유를 보였지만, 다른 요리사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라는 표정이었다.

멧새를 넣은 포리지라니. 애당초 포리지에 가금류를 넣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포리지란 대개 귀리 같은 것을 걸쭉하게 끓여서, 광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이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것을 과연 귀족들이 먹으려 할까? 요리사들은 궁금해하는 한편,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아체리아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늘 만들 멧새 포리지는 좀 독특한 거라고.’

귀족들이 먹을 포리지라면 시럽이나 비싼 설탕을 잔뜩 퍼부어 달콤하게라도 맛을 낸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체리아가 지금부터 만들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체리아는 일단 한 번 데쳐 껍질을 싹 벗긴 멧새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했다.

멧새구이는 보통 뼈와 내장을 전부 다 먹는 것이 상식으로, 오히려 구이로 만들었을 때는 멧새의 내장이 술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더 맛있다고 여겨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요리장님, 이…… ‘플라센타’라고 적힌 음식 말입니다만, 재료는 무엇으로 할까요?”

“아, 그건 어떤 재료든 상관없어요. 여러분들이 얹고 싶은 재료를 얹어서 만들어 볼 거니까요.”

“예? 얹고 싶은 재료라고요?”

“네. 올리브나 버섯, 토마토 같은 것들은 전체적으로 다 올라갈 수 있도록 하고 허브와 소고기도 올려 주세요. 그리고 나머지 채소나 고기는 자유롭게 얹어서 치즈를 갈아 뿌려 오븐에 구울 거예요.”

“하…… 재밌는 요리입니다만, 이것도 귀족 나리들이 마음에 들어 할지, 아닐지 모르겠네요.”

솔직한 평가였다. 아체리아는 멧새를 계속 다듬어 솥 안에 넣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왕녀님께서 그 메뉴를 특별히 원하셨거든요.”

“그러시다면야…….”

왕궁의 요리사들은 공작저의 요리사들보다 훨씬 더 까다로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왕녀의 뒷배라는 게 이렇게 좋구나. ‘왕녀가 그러라고 했다’고만 하면 아무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라도 그냥 ‘그렇구나’ 한마디로 끝나 버리는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기이한 행동이나, 음식에 대한 이상한 집착 같은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아체리아에게는 좋은 형편이었다.

아체리아는 자신의 요리를 준비하는 한편 다른 요리들이 준비되어 가는 과정에도 틈틈이 신경을 썼다. 특히 ‘속을 꽉 채운 거위 구이’는 오늘의 여러 가지 요리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장식이 될 예정인지라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털을 뽑고 다듬은 거위의 뱃속에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 견과류를 차례대로 채워 나가다가 그 가운데에는 짭조름한 맛이 나는 치즈 덩어리를 통째로 하나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다시 재료들을 하나씩 틈 없이 채워 거위가 빵빵해지면, 굵은 실로 벌어진 곳을 다시 꿰매는 것이다.

“치즈를 넣으면 확실히 재료의 풍미가 살아나겠네요.”

아체리아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한 요리사가 말했다.

보통 이런 류의 거위 요리를 할 때는 바깥쪽에 소스를 바르거나, 안쪽에 채워 넣을 재료에 밑간을 하는 정도가 맛을 더하는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안쪽에서 치즈가 녹아서 꺼질 수 있으니까 재료를 좀 더 많이 넣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치즈 한 가지로만 만들 것도 아니고요. 이쪽에 있는 한 마리는 뱃속에 소스를 바른 다음 속을 채울 거예요. 허브는 듬뿍 넣고요.”

“아, 각각 맛이 다른 요리를 내놓으실 생각이시로군요?”

“그렇죠. 그래야 먹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요? 모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걸 먹을 수 있는 파티인데, 한 가지 맛의 요리만 있으면 너무 심심하잖아요.”

아체리아는 다른 거위 한 마리도 손질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굵은 솔을 이용해 살 안쪽에 허브 소스를 듬뿍 발랐다. 걸쭉한 소스가 거위의 뱃속에 어느 정도 고일 정도가 되자, 앞에 채웠던 것과는 다른 순서로 재료를 차곡차곡 쌓고는 능숙하게 배를 꿰매었다.

그러는 와중에 멧새 솥이 끓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한 번 끓은 물을 반쯤 버린 다음, 거기에 다시 물을 더해 육수가 뽀얗게 될 때까지 멧새를 푹 삶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분리되는 뼈들은 땀을 뻘뻘 흘려 가며 꼼꼼히 건져 냈다.

“멧새 뼈는 연해서 그냥 먹어도 될 텐데요.”

보다 못한 요리사 한 명이 말참견을 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왕녀님께서 담음새나 모양까지도 신경 쓰라 하셔서요. 물론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 안에 살도 붙어 있지 않은 뼈가 우르르 떠 있는 건 좀 그렇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느냐. 요리사는 그런 눈으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기 할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주방 안은 순식간에 요리를 하면서 생기는 증기로 가득 찼다. 오늘 만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가짓수를 맞춘 다른 요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왕녀가 연 만찬이 단지 볼거리에만 집중했을 뿐 실속은 없었다더라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벌을 면키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먹는 일’이란 곧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일이지만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즐거움이기도 하는 만큼, 왕궁의 주방은 치밀하고 빡빡하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했다.

덕분에 아체리아는 공작저에서 말 안 듣는 요리사들을 진두지휘해 나갈 때보다 훨씬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포리지에 쓸 곡물을 불리고, 다른 요리사들이 재료를 다듬는 것을 확인하고, 디저트의 밑 준비를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 * *

필리파 왕녀의 만찬은 동쪽 궁의 작은 홀에서 열렸다. 대체로 왕비나 왕녀가 귀부인들을 모아 놓고 연극을 즐기거나 와인 파티를 여는 장소로, 일반적인 만찬을 열기에는 조금 좁은 감이 있었지만 오늘은 초대객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딱 적당했다.

이른 시간부터 테이블을 옮기고, 악사들이 자리할 곳을 만들고, 실내 장식을 조금씩 바꾸느라 궁인들도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관리하고 감독한 필리파 역시 앉을 시간조차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저녁 무렵이 되자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인사로 무장을 하고 필리파의 만찬 자리에 당도했다.

‘고귀하옵신 왕녀님을 뵈옵게 되어 영광이며……’, ‘물처럼 흐르는 이러한 은혜를 어찌 감당할지……’, ‘아름다우신 왕녀님의 손등에 키스할 수 있는 영광을……’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들이었다.

필리파는 그들의 인사치레를 적당한 미소로써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비록 지금껏 왕궁에 틀어박혀 있기나 하는, 재미없고 이상한 왕녀라는 평가를 내린 입들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런 사사로운 것을 탓할 자리가 아니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란츠호프 후작가의 딸인 릴리엇과 에른스트, 그리고 페터 드라인이 동시에 도착하여 필리파를 알현했다. 필리파는 그들을 향해서도 예의 꾸밈없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세 분이 사이가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것 같군요.”

“우연히 만났습니다.”

에른스트가 대표로 말했다. 그는 이미 홀 이곳저곳에 서서 샴페인이나 와인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물끄러미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젊은 축에 드는 진보파 귀족이었지만, 때때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예컨대 시드레 백작이라든지.

‘만약 오늘 만찬이 그냥 한 번 부려 보는 변덕이 아니라면, 필리파에게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터.’

굳이 자신만이 아니라 릴리엇을 초대한 것만 보아도 그랬다.

릴리엇의 집안인 란츠호프 후작가는 진보파에서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곳 중 하나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위를 물려받을 릴리엇 역시 그러한 성향을 이어받게 될 것이었다.

릴리엇 이외에도 이런 곳에서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진보파 귀족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필리파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녀가 국왕이 되면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상하리라는 국왕의 믿음은 벌써부터 보기 좋게 배신당한 셈이었다.

‘그럼 시드레 백작 같은 인물들은 연막이로군.’

왕성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가 좀 밝은 귀족들이라면 분명히 오늘의 만찬이 어떠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필리파가 연회에 단독으로 참석하지 않는 진보파 귀족들만을 우르르 초대했다면? 당장에 소문이 퍼지게 되겠지.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히 유명한 보수파 귀족들도 섞어서 초대한 것이다.

에른스트는 필리파의 준비성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여태까지 만찬은커녕 티 파티도 한 번 변변히 열어 보지 못한 사람치고는 너무나 담이 큰 행동이지 않는가.

“오늘은 편하게 즐겨 주기 바라요. 클링 양이 재미있는 걸 준비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아체리아의 요리는 늘 재밌고 맛있죠. 왕녀님께서도 드셔 보셨나요?”

“간단한 것만요. 오늘은 내내 바빴으니까…… 하지만 지난번 비스몽트 공작저에서의 연회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실력 있는 요리사라는 것만은 틀림없죠. 또 독특한 면도 있고요. 비스몽트 공작이 허락해 주기만 한다면 그녀를 내 전속 요리사로 임명하고 싶을 정도랍니다.”

필리파가 농담을 하며 웃자 릴리엇은 에른스트를 힐끔 쳐다보면서 장난스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클라우스는 어디 있습니까?”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에른스트가 물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클라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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