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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42)화 (42/144)

42화

가게 안으로 들어간 아체리아의 눈은 휘둥그렇게 커진 채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옷들이 다 어떻게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거야?’

의상실 안은 그야말로 드레스들의 천국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쾌적하게 유지되는 공기며, 끊이지 않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 향유를 바른 듯이 매끄러운 점원의 말솜씨와 그에게 응대하는 아가씨들의 높고도 즐거운 목소리.

모든 것들이 아체리아에게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녀가 옷감을 사곤 하는 작은 의상실에서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 언제, 어디에서든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머나, 비스몽트 공작님이 아니세요!”

주인이 호들갑을 떨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어쩐 일로 제 의상실을 다 찾아 주셨습니까. 영광입니다.”

“이쪽의…… 아가씨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두세 벌 추천해 주게.”

“어머, 이 아가씨요? 세상에나, 키가 아주 훤칠하네요. 피부 빛도 곱고 희고, 머리칼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빨간 머리라면 당연히 장밋빛 드레스가 제격이지요.”

“아, 저, 아니요. 빨간색 드레스는 좀…….”

아체리아가 엉거주춤 말을 꺼내자, 주인은 길게 이어붙인 속눈썹이 팔락거리도록 눈을 깜빡였다.

“어머, 빨간색은 싫어요? 흐음, 그렇군요. 그럼 이쪽으로 들어와요. 공작님께서도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마도 그녀는 아체리아가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옷을 입은 매무새로 보나, 이런 가게에 들어와서 엉거주춤하는 모습을 보나 알 만도 한 일이었지만, 아체리아는 너무 정신이 없는 나머지 주인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실례지만, 아가씨의 드레스는 어떤 일로……?”

“고귀한 분을 만나 뵈러 가야 하니 그에 걸맞은 것으로 자네가 골라 주게.”

“어머, 알겠습니다.”

주인은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점원을 시켜 클라우스에게는 차를 대접하게 한 후 아체리아만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키가 커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네. 흠…… 어디 좀 봐요. 눈매가 날씬하고 입술은…… 흠, 이 색깔은 조금 별로겠고…… 자, 아가씨. 이걸 한번 입어 봐요.”

주인이 처음 골라 준 드레스는 차가운 회색 바탕에 공작 같은 자수가 화려하게 놓여 있는 것이었다. 아체리아는 태어나 세 번째로 입어 보는 빡빡한 드레스에 질겁을 했지만, 주인의 반응은 명확했다.

마치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가문의 아가씨 같네요’라는 표정이었다.

“공작님, 어떠신가요?”

아체리아는 마치 새로 선보이는 인형이 된 것 같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멀거니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위아래로 천천히 그녀를 훑어보던 클라우스가 손을 내저었다.

“너무 화려하군.”

“그런가요? 그럼 다른 것으로 준비해 보죠. 아가씨, 이쪽으로.”

‘이 짓을 대체 몇 번 하라는 거야!’

아체리아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드레스를 벗긴 뒤 다음 것을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푸른 수국 색깔의 바탕에, 소매를 펑퍼짐하게 부풀린 드레스였다. 우아하다기보다는 귀염성 있는 프릴과 주름 장식이 많았는데, 클라우스는 보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어른스러운 걸로.”

“확실히, 좀 더 어른스러운 멋이 있는 편이 어울리겠네요. 자, 아가씨. 이리 와요.”

이쯤 되니 자신의 의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체리아도 슬슬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녀를 만나는 자리라지 않나.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다섯 번째 드레스를 벗다가 지친 아체리아가 커튼 너머로 머리만 내민 채 소리쳤다. 느긋하게 앉아 팸플릿이나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다리를 꼬았다.

“슬슬 지칠 때가 됐다 싶긴 했지.”

“도대체 몇 번째예요!”

“아직 다섯 벌밖에 갈아입지 않았어. 귀부인들은 열 번도, 스무 번도 넘게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있다고.”

“난 귀부인이 아니잖아요!”

“오늘만큼은 귀부인이어야 하지. 군소리 말고 다음 걸로 입고 나와.”

저걸 그냥.

아체리아는 이를 득득, 갈면서 커튼을 휙 닫았다. 주인이 여섯 번째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이것마저 퇴짜를 놓으면 확 속옷만 입고 가겠다고 협박을 해야지. 아체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커튼 밖으로 나섰다.

커튼 밖으로 나온 아체리아의 모습을 본 클라우스의 눈동자가 순간 세게 흔들렸다.

“이것도 퇴짜 놓으면 속옷만 입고 갈 거예요.”

아체리아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옅은 크림색 바탕에 진주를 촘촘하게 엮어 백합 자수를 놓았고, 둥글게 파인 네크라인을 따라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한 줄로 엮여 아래로 폭포처럼 떨어지는 디자인이었다.

허리에서부터 풍성하게 벌어진 치맛단은 튤립처럼 봉긋하면서도 밑단이 하늘하늘해 우아한 매력이 있었다. 그 위로 아체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진 장미처럼 내려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떠신가요?”

“……괜찮군. 이걸로 하지.”

“마침 여기에 어울리는 티아라와 구두도 있답니다.”

“티아라는 빼고 구두만.”

“잘 알겠습니다.”

주인은 신바람이 나 보였다. 여태 입혔던 드레스들 중 가장 값이 비싼 것을 팔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클라우스를 보다가 슬그머니 웃음을 띠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는 뚱한 표정으로 ‘안 돼’, ‘다른 거’라고만 하시더니, 이번엔 조용하시네요?”

“…….”

“어때요, 좀 귀부인 같나요?”

“……어느 귀부인이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해?”

“전 귀부인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이런 말을 해도 되죠.”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클라우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가까이 다가온 아체리아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아체리아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마침 구두를 가지고 온 주인이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는 직접 구두를 신겨 주었다.

‘이런 호사도 가끔은 괜찮네.’

늘 신던 가죽신이 아니어서인지 발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좀 어색하기는 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왠지 어깨가 쭉 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상실을 나온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는 다시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향했다. 경사면을 올라가느라 마차가 기울어지자, 아체리아는 불편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보는 클라우스를 유심히 보았다.

“혹시 멀미를 하세요?”

“이런 델 올라가니 당연히 어지럽지.”

“멀미에는 감초나 소나무 잎을 씹으면 좋다던데. 음, 잠시만요.”

아체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걷으며 좁은 마차 안에서 자리를 옮겨 클라우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클라우스가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쳐다본 순간, 아체리아의 손이 클라우스의 목 뒤로 쑥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가만히 계셔 보세요. 목을 좀 움직여 보세요. 왼쪽, 오른쪽.”

클라우스는 시키는 대로 고개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그가 머리를 움직이는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아체리아는 오른쪽 목덜미 아래를 손끝으로 꾹꾹, 눌러 지압해 주었다.

“멀미할 때 잘 움직여지지 않는 쪽을 눌러 주면 어지럼증이 좀 덜하대요.”

“……누가 그래?”

“글쎄요, 기억은 안 납니다. 하지만 옛날에 들은 기억이 나요.”

아마도 그것을 가르쳐 준 건 얀 헨릭이나 예시카였을 것이다. 공작저에 오기 전, 자신의 유년기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므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어쩐지 무릎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이전에 갑자기 뺨을 잡혔을 때와 같다.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손길에 자꾸만 뱃속 어딘가가 술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좀 괜찮으신가요?”

“……그래. 좀 낫군.”

“다행이네요. 아, 이제 오르막도 끝났어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정말이었다. 마차는 이제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여전히 머릿속이 어지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옆에 앉아 있는 아체리아의 몸이,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자신 쪽으로 휘청휘청 흔들리며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필리파 왕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잠시 후 왕궁의 복도를 걸으며 아체리아가 물었다.

“직접 한번 만나 보면 알게 될 거야.”

“공작님 같은 분은 아니시겠죠, 설마.”

“‘나 같은 분’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왜…… 아시잖아요.”

“알긴 뭘 알아? 말해 보라니까. ‘나 같은 분’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잘 안 잡수시고, 가리시는 것 많고, 까다롭고…….”

“뭐?”

“……취향이 고상하시다고 해 두죠.”

클라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라는 건 아체리아도 알고 있었다.

“어디, 왕녀님 앞에서도 그렇게 잘 떠들 수 있나 봐야겠군.”

“저도 말을 가려야 할 때는 안답니다.”

“아하, 내 앞에서는 말을 안 가리셔도 된다?”

“공작님 앞에서는 솔직히 할 말, 못 할 말 다 했으니까요.”

기어이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가슴속을 간질간질하게 건드리던 그 감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울화통 터진다는 기분만 남은 클라우스는 화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꽃 장식으로 꾸며진 복도를 지나는데, 필리파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문 하나가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걸음을 멈춘 클라우스와 아체리아 앞에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시드레 백작이었다.

“어머, 비스몽트 공작님.”

시드레는 옆에 서 있는 아체리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클라우스만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어쩐 일이신지요?”

“필리파 왕녀 전하를 만나 뵈러 가는 길이오, 백작.”

“어머, 저를 아시는군요.”

시드레가 애교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클라우스는 시드레와 독대한 적은 없지만, 에른스트가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들어 그녀의 간단한 인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 걸려 있는 시드레 백작가의 은제 로켓, 가문의 문양이 찍힌 그 로켓을 그녀는 언제나 자랑삼아 걸고 다녔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시드레는 먼발치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섬세한 클라우스의 이목구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에른스트도 잘생기기는 했지만, 클라우스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둘 다 탐나는걸.’

시드레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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