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락케 씨, 아체리아를 그냥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맞아요. 이…… 이대로 가만히 놔둘 수는 없잖아요.”
바키와 듀켄이 락케의 눈치를 보며 부추기듯 말하자 락케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지금 클라우스에게 받은 징계도 모자라, 담배 피우는 것을 아체리아에게 들켜 석 달 치 급여가 또 한 번 삭감된 참이었다.
당연히 아체리아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로널드 락케는 바키와 듀켄을 나란히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럼 뭐, 너희들은 뭐 뾰족한 수가 있어?”
“아니, 우린…….”
“락케 씨가 뭔가 하시겠다면 뭐든 돕죠. 그 배신자 요아킴 놈처럼 그러진 않을 겁니다.”
듀켄의 말에 락케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치솟아 올라갔다. 그들은 요아킴보다 더 교활했으면 교활했지, 절대로 불리한 상황에서까지 의리를 지킬 인간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체리아가 주방의 실세가 되는 것보다 락케가 실세가 되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이기 때문이리라.
“빌어먹을, 이제는 공작까지 그 계집애에게 홀려서 실실대고 있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요즘 둘이 아주 죽이 잘 맞아서 붙어 지낸다니까요.”
“뻔하지. 그 계집애가 되지도 않는 얼굴로 공작을 홀렸는지. 아니면 베갯머리에서 속닥거렸든지.”
바키가 심술궂게 이죽거리자 듀켄이 웃음을 터뜨렸다. 락케 역시 입가에 야비한 웃음을 지어 대면서 씹고 있던 담배를 퉤, 뱉었다. 아체리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요즘에는 씹는담배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공작의 관심을 딴 데로 돌려놔야 해. 공작이 그 계집애를 싸고도는 이상,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어떻게 그러죠? 고용인들은 공작님에게 말도 못 붙이잖아요.”
“…….”
락케의 조그맣고 교활한 눈동자가 뭔가를 꾸며 내는 듯 데굴데굴 움직였다.
* * *
“글쎄 이걸 왜 저에게 시키시느냐니까요.”
아체리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봉투의 봉랍을 찍으면서 쉴 새 없이 종알종알 투덜거렸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투덜거림을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면서 역시 산처럼 쌓여 있는 초대장에 일일이 답장을 하고 있었다. 한 번 공작저를 개방해 연회를 연 뒤부터, 그의 앞으로 오는 초대장은 하루에도 수십 통에 이르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귀족의 생일 파티에서부터, 티 파티, 남녀가 함께 어울리는 살롱으로의 초대, 혹은 그 사이에 초대장이 아닌 것도 은밀하게 섞여 들어와 있곤 했다.
“그것도 초대장인가요?”
“뭐?”
아체리아가 도장 끝으로 클라우스의 손에 들린 분홍색 종이를 가리켰다.
“그것도 초대장이냐고요.”
“아니, 이건…… 아냐.”
당황한 표정으로 종이를 구겨 손 안에 숨기는 품이 어째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다. 아체리아는 갑자기 짓궂은 감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저도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뭘 보여 줘?”
“그 편지요. 어떤 내용인지. 여기 앉아서 쉬지도 못하고 봉투만 붙이고 있는데, 그 정도는 허락해 주셔도 괜찮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전혀 안 그래. 하던 거나 마저 해. 헛소리 말고.”
“흐음.”
클라우스가 몸을 돌린 순간, 아체리아의 손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를 쏙 빼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장난을 치는 개구쟁이처럼 방 한복판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내놓지 못해!”
“글쎄, 뭔지 저도 궁금하다니까요. 이건…… 어머나.”
“내놓으라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는 다시 클라우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화로에 종이를 던져 넣는 그를 본 아체리아가 깜짝 놀라 말했다.
“왜 태우세요?”
“그럼 저걸 먹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연애편지 아니었어요?”
“뭐?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누구랑 연애를 해? 내가 그런 걸 왜 해?”
할 수도 있는 거지, 왜 하냐니. 아체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진달래꽃 같은 분홍빛의 그 편지지에는 사랑을 속삭이는 달콤한 말들이 깨알같이 죽 적혀 있었다.
분명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가 밤잠을 설쳐 가며 썼을 그 편지를 단숨에 태워 버리고도, 클라우스는 일말의 미련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여튼 못돼 빠졌다니까. 아체리아는 샐쭉한 얼굴로 봉랍을 마저 찍었다. 그러느라 클라우스의 귀가 화난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작님께서 언젠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시게 된다면 방금 그 말을 잘 기억해 놨다가 그때 웃어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클라우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사랑에 빠진다고? ‘누군가’와?”
“그럼요. 언제까지 혼자서만 사실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뭘 몰라서 하는 소리인 것 같은데, 귀족의 결혼에는 본래 사랑이란 게 없어.”
“어머, 그거야말로 뭘 모르는 소리죠. 아직 해 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단언하시는 게 아니에요.”
클라우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뿐만 아니라 답장을 쓰던 손도 조금 느려졌다. 마른 뺨 위에 신열 같은 홍조가 떠오르자, 그의 얼굴은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너는 그럼 해 봤다는 말인가?”
아체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요.”
“꼭 해 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야.”
“아니, 꼭 연애를 해 봐야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해 봤다는 거야, 안 해 봤다는 거야?”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래?
“그렇게 집요하게 물으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고용인들의 연애사에 주인이 관여할 수 있는 시대는 벌써 몇백 년도 더 전에 지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묻는 줄 알아?”
“그럼 무슨 이유로 물으시는 건데요?”
둘의 기 싸움은 말을 한 번 주고받을 때마다 더욱 팽팽해졌다. 말문이 막혔는지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던 클라우스가 갑자기 하얀 목덜미에 핏대가 서도록 꽥, 소리를 쳤다.
“싫으니까!”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바깥에 있던 호즈만 집사장이 무슨 일인가 문을 열어 볼 정도였다.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가끔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올 때가 많았던 공작인데―몸이 허약하니까― 요즘은 부쩍 말이 많아지다 못해 이제는 언성까지 높이는 것이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됐으니 나가 봐.”
가엾은 호즈만은 들어오자마자 축객령을 당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그저 어깨를 들썩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문이 다시 닫혔다. 아체리아가 팔짱을 척 낀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뭐가 싫으시다는 거예요?”
“……말이 헛 나왔으니까 캐묻지 마.”
“말이 헛 나오셨다고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뭔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시는 거잖아요.”
“네가 나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알아?”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안다고 할 수 있지요. 아니, 사실 아는 것보다도 더 많은 걸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오늘 제가 저녁 식사로 내놓을 순무와 건자두를 곁들인 삼겹살을 아주 맛있게 드실 것 같다는 걸 벌써 알고 있는 것처럼요.”
“궤변이 따로 없군.”
“먹기 싫다고는 안 하시네요.”
“먹고 싶다고도 안 했어.”
“하지만 건자두는 좋아하시잖아요. 그쵸? 순무는 싫다고 하셨지만 요즘 내놓은 것들은 잘 잡수셨고요. 그리고 삼겹살은 분명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러니까 공작님께서는 순무와 건자두를 곁들인 삼겹살을 아주 맛있게 드실 거다, 이거예요.”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
순무와 건자두를 곁들인 삼겹살이라는 말을 한 번만 더 들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클라우스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자, 아체리아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 봉투의 봉랍을 꾹, 찍고 일어섰다.
“그러니까 전 이만 순무와 건자두를 곁들인…….”
“그만 말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으니까.”
“……삼겹살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체리아의 말투는 얄미울 정도로 산뜻했다. 클라우스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노려보든 말든, 거의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으로 방문을 향해 나가던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말이에요.”
“또 뭐.”
“제 연애가 싫다는 건, 대체 뭐가 싫으시다는 건가요? 제가 연애해 본 적이 있는 게 싫으시다는 건가요, 아니면 연애를 할 수도 있다는 게 싫으시다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다 포함해서 제가 연애 자체를 하는 게 싫으시다는 건가요?!”
“……그만 나가. 머리 아프니까.”
나가라면 누가 못 나갈 줄 알고? 아체리아는 이 순간만 기다려 온 사람처럼 팔랑거리면서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클라우스는 진짜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 늘어지고 말았다. 아직 답장을 해야 하는 초대장은 한참 남았는데, 한결같이 똑같은 거절 문구를 쓰는 것도 고역이었다.
애초에 연회 같은 걸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이 없었으면 지금 이렇게 귀찮은 일도 없었고, 그리고 필리파도…….
‘그렇지, 필리파 왕녀.’
에른스트와 함께 필리파를 만난 이후, 필리파로부터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당장 움직이기에는 힘들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판을 짜고 있는지도 모르고.
필리파의 상대가 될 왕의 다른 서자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3왕자와 5왕자를 제외하더라도, 다른 왕자나 왕녀들 역시 급변하는 정세에 발맞춰 어떻게든 자리를 차지해 보고자 엉덩이를 들이밀 테니까.
그 모든 사람들을 다 밀어내고 제왕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자, 클라우스는 별안간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대체 무슨 일에 발을 들이게 된 거지? 어쩌다가.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전부 아체리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던 클라우스는 그녀가 나간 문만 가만히 쏘아보고 있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