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8)화 (38/144)

38화

“아니, 도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거야?”

“샌드위치를 만들까 해요. 아, 이건 수프인가요?”

아체리아는 식은 솥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새콤한 냄새가 확 끼쳤다.

라티니가 말했다.

“아까 주방에서 저녁 식사로 먹고 남은 건데……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밖에 안 들어간 거라 귀족 나리 입맛에는 안 맞을걸.”

“아니에요. 이거면 됐어요.”

아체리아는 마치 제집인 양 주방을 뒤져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다. 한쪽에 쌓여 있던 오이와 양상추, 감자, 옥수수, 그리고 향신료 한 줌과 마늘 약간.

감자는 껍질을 까지 않은 채 물에 삶고, 옥수수는 버터를 발라 바깥쪽이 약간 노릇노릇해지도록 구웠다. 오이는 어슷하게 썰어 소금을 살짝 뿌리고, 양상추는 손으로 한 장씩 잎을 떼어 내어 준비했다.

“빵은 뭣 하러 그렇게 잘게 잘라?”

“수프에 넣으려고요.”

라티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썰고 있는 빵 역시 주방의 요리사들이 먹고 남은 것으로, 귀족들이 늘상 먹는 부드러운 밀빵이 아니라 약간 푸석푸석한 종류였다.

그것을 아체리아는 작은 정육면체 모양으로 썰더니, 역시 버터를 살짝 두른 팬에 바싹 구웠다.

“저기, 할 일 없으시면 수프 좀 데워 주실래요?”

“아니, 할 일이…….”

없긴 하지.

라티니는 여전히 뭐에 홀렸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리송하게 입매를 당기며 수프 솥의 불을 올렸다. 아래쪽에 있는 것이 눋지 않도록 부지런히 휘젓자 토마토 수프 특유의 새콤짭짤한 냄새가 곧 주방 안에 가득 찼다.

“여기에 마늘을 조금 넣을 거예요.”

“이제 와서 마늘을?”

“볶은 마늘이니까 괜찮아요. 풍미만 살짝 돋우는 거라고 할까요?”

이내 수프에 마늘과 향신료를 살짝 넣고 맛을 본 그녀는 입맛을 몇 번 다시다가 소금을 살짝 더 첨가했다. 기력이 떨어져 쓰러진 사람이니, 약간의 소금기가 있는 것을 먹이는 게 나을 성싶었다.

“이 샌드위치는 정말 이렇게 내갈 거야?”

“네. 그렇게 내갈 거예요. 왜요?”

“아니, 들어간 게 너무 없지 않나 해서……. 이건 티타임에서나 먹을 만한 샌드위치잖아.”

“괜찮아요. 그렇게 많이 드시는 분은 아니거든요. 귀족들은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귀족 나름이지. 이 궁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식가라서 말이야. 요리사들이 허리가 휠 지경이거든.”

라티니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차라리 클라우스가 많이 먹어서 고민이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샌드위치 속을 켜켜이 쌓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놓았다.

순식간에 간단한 야식이 준비되었다. 바삭바삭해진 빵을 마지막으로 수프 위에 톡톡 떨어트린 아체리아는 묵직한 쟁반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번쩍 들어 올렸다.

“고맙습니다, 라티니 씨.”

“자네, 이름이 뭐지?”

“아체리아요. 아체리아 클링.”

“비스몽트 공작저라면 얀 헨릭의 후임이겠군? 아깐 생각이 안 났는데 갑자기 떠올랐어. 맞지?”

“얀 헨릭을 아세요?”

“알기만 할까? 그 녀석과 난 어릴 적 한동네에 살던 친구였어. 그 녀석은 왕궁 요리사로도 손색없는 실력이었지만 결국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일하는 걸 택했지. 지금 여기 있었다면 내가 실컷 부려 먹어 줬을 텐데!”

“그 말, 나중에 얀에게 그대로 전해 줄게요.”

“그럼, 당연하지. 꼭 전해 주라고!”

“얀은 ‘향기 광장’에서 가게를 하고 있어요. 원하시면 한 번쯤 가 보셔도 좋을 거예요. 아주 맛있는 걸 팔고 있을걸요? 마렌이라든가.”

아체리아는 생긋이 웃은 뒤 종종걸음을 쳐 클라우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갔다.

기력이 좀 회복된 것인지, 클라우스는 그나마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체리아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로 주방에 가서 요리를 해 왔어?”

“그럼요. 얼른 오셔서 식기 전에 드세요. 샌드위치와 토마토 수프, 그리고 따뜻한 크림을 가지고 왔어요. 수프가 너무 새콤하면 크림을 조금 넣어서 드세요.”

“난 토마토가 싫어.”

“뭔들 좋으신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클라우스는 몹시 허기가 진 상태였다. 새콤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부쩍 배가 고팠다.

그는 의자를 당겨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샌드위치 속을 보고 또 한 번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오이도 싫어.”

“빼지 말고 다 드세요. 상큼해서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체리아의 모습이 마치 잔소리를 하는 사감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던 클라우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도 앉아.”

공작저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아체리아는 자연스럽게 클라우스의 옆에 서 있었다. 클라우스의 말을 듣자 오히려 아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앉으라고요?”

“그래. 공작저도 아닌데 거기 서 있을 필요 없잖아. 앉아, 앉아서 같이 먹어.”

“이거 다 공작님 드시라고 만들어 온 건데요.”

“내가 이걸 어떻게 다 먹어?”

클라우스가 툴툴댔다.

그래 봐야 샌드위치 네 쪽과 수프 한 그릇인데, 이걸 다 못 먹을 일은 또 뭐람.

아체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일단은 시키는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쩍 먹는 양이 많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동년배의 보통 남자들에 비하면 클라우스는 터무니없이 적게 먹었다.

‘이러다가는 영영 이 가냘픈 신세를 못 면할 텐데. 조금씩 양을 늘려 가야 하겠어.’

아체리아는 못 이기는 척 샌드위치 한쪽을 집어 들었다. 버터를 살짝 발라, 삶은 감자 샐러드와 채소, 그리고 치즈를 끼운 샌드위치는 산뜻하고 맛이 좋았다.

클라우스도 오이가 싫니 어쩌니 하면서 툴툴댔지만 별말 없이 먹고 있는 걸 보면 썩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감히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려고 하느냐며 절 혼내셨잖아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그때 분명 그러셨는데요. ‘건방지게 내 식사에 먼저 손을 대려는 거냐’면서요.”

“안 그랬어.”

“제가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그때 분명 그러셨다니까요.”

계속 기억나지 않는다고 버텼다가는 날이 새도록 과거 그가 했던 말들을 줄줄이 읊어 댈 기세였다. 클라우스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지만 아체리아는 샌드위치를 먹느라 바빠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말했잖아. 여긴 공작저가 아니니까 괜찮다고.”

“공작저랑 왕궁이 다를 게 뭔가요? 방이 더 많고, 좀 더 넓다는 걸 제외하면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요. 왕궁에 온다고 제가 백작 부인이 되는 것도 아닌데요.”

“말하는 것 하고는. 백작 부인 자리가 꿈이야?”

아체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왜 그런 귀찮은 자리를 탐내겠어요?”

이번에는 클라우스의 눈이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커졌다.

“……귀찮은 자리라고?”

“당연하지요! 귀족 부인만큼 신경 써야 할 게 많고, 귀찮은 일이 또 어디 있어요? 하루 종일 먹는 거라곤 새 모이보다도 적게 먹어야 하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거나, 그것도 아니면 차나 마시는 게 전부인데요! 그리고 자기와는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걸 들으면서 격식 있게 웃기나 해야 하잖아요.”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귀족 부인으로 살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살아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까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아체리아가 샐쭉하게 대꾸했다.

클라우스는 잠시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면서 그녀를 떠보듯 다시 말했다.

“귀족 부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텐데. 보석도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을 테고,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테고. 물론 그랬다가는 살은 좀 찌겠지만.”

“살이 찌는 건 아무래도 좋아요. 맛있게 먹고 살이 오르는 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다고요? 하지만, 귀족 부인이 되면 주방에는 출입도 못 하게 될 거잖아요. 전 그건 싫습니다. 돈을 준다고 해도 싫어요.”

“……대체 왜 그렇게 요리를 좋아하는 거야?”

“그야 이게 제 운명이니까요.”

운명이라고? 고작 요리사라는 직업 따위에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운운할 만큼 요리를 좋아한단 말인가?

클라우스는 이 시점에서 에른스트 따위가 자신의 라이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라이벌은 어쩌면 아체리아의 인생 그 자체였다. 자신이 만약 아체리아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면, 그래서 아체리아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면…….

잠깐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나?’

“공작님?”

아체리아의 부름에, 클라우스는 그만 먹고 있던 수프가 목에 걸릴 뻔했다. 작게 콜록거리는 그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던 아체리아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혀라도 씹으셨어요?”

“……누가 혀를 씹어. 정말 건방진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으시나 해서요.”

“내가 언제 이상한 표정을 지었어?”

“지금도 이상한 표정 짓고 계세요. 어라, 얼굴도 벌겋게 되셨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열이 오르시는 건 아니고요?”

순간, 아체리아의 손이 클라우스의 얼굴을 향해 불쑥 뻗쳤다. 어떻게 몸을 빼 볼 도리도 없이 아체리아의 양손에 두 볼을 완전히 붙잡힌 클라우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얼굴이 뜨거우신데요.”

“네…… 손이 찬 거겠지.”

“그럴 리가요. 지금 이 방이 별로 춥지 않단 말이에요. 어디 보자…….”

아체리아의 손이 클라우스의 얼굴 이곳저곳을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클라우스는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손은 말마따나 귀족 부인들의 손처럼 부드럽지도 매끈하지도, 작고 가냘프지도 않았다. 손마디는 뼈가 도드라져 단단했으며 손끝이나 손바닥에는 칼을 쥘 때 생긴 굳은살이 박인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거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것이 왜 이렇게 가슴을 술렁이게 만드는 걸까?

“……그만 놔. 됐으니까.”

“정말 안 아프신 거 맞아요? 차라리 치료사를…….”

“안 아파. 안 아프니까 그만 놓고 식사나 해.”

본인 먹으라고 만들어 줬더니 한 개밖에 안 먹고서는. 아체리아는 입술을 실룩이면서도 순순히 클라우스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의 손이 멀어진 순간, 클라우스는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다정하게 반짝이는 스산한 물결, 그것은 아쉬움이라는 감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