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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7)화 (37/144)

37화

클라우스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일곱 살이 된 클라우스의 옆에는 그의 외조부인 17대 비스몽트 공작이 있었다. 클라우스는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를 집어 들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만 먹어라. 배부르게 먹는 것은 귀족의 미덕이 아니다.”

외조부가 말했다.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클라우스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지만, 감히 외조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음식에는 뭐가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음식에 들어간 독에 당하면 아주 끔찍하지.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온몸에 수포가 돋아 고통스럽고, 또는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는 채 죽을 수도 있는 법이야. 네가 공작이 되면 널 죽이려 노리는 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가 있겠느냐?”

“…….”

“네 아비 같은 작자들은 그저 스푼만 들었다 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바쁘지. 그러나 내 손자인 너는 다르다. 너는 비스몽트 집안의 피를 반은 이어받았음이라. 너는 진실로 공작가의 이름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

클라우스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 애쓰면서 별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밋밋한 수프를 떠먹었다. 분명 호박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끓인 것인지 호박의 달큰한 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

클라우스가 수프를 한 스푼 더 뜨려는 순간, 외조부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다.

놀란 클라우스는 그만 스푼을 떨어트리고 말았고, 그와 동시에 외조부의 뒤에 서 있던 요리사가 클라우스의 앞에서 접시를 치워 버렸다.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지 못했느냐?”

“……하, 할아버님. 하지만…… 다 먹지 못했습니다.”

“그릇을 싹싹 핥는 것은 천박한 무리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 아비 같은 작자들처럼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살이 뒤룩뒤룩 찌는 게다. 천하고 더러운 돼지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살덩어리들을 달고…… 네 아비 같은 작자가…… 공작저의 이름을 망치고…….”

그만.

제발 그만해.

어린 클라우스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팔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러는 동안 외조부의 입은 점점 흉하게 일그러지고 거대해져서 클라우스를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그만두세요, 할아버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비명이 클라우스의 입 안에서 뱅뱅 맴돈다. 클라우스는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동굴처럼 벌어진 노인의 입속을 경악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 * *

반듯하게 누워 있던 클라우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팔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꿈.’

온몸의 기운이 빠져 버린 것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클라우스는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공작저의 익숙한 침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불편함을 느꼈다.

‘대체 어디야?’

필리파를 만나고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왠지 머릿속이 흐릿했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겹겹이 쌓여 주변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클라우스 님!”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클라우스의 귀를 쨍, 울렸다. 아체리아의 목소리였다.

“……아체리아?”

“맙소사, 이제야 깨어나셨네요. 사람을 이렇게 놀래키다니!”

“……소리 지르지 마. 골 울린다니까.”

클라우스는 탁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문득 등을 받쳐 주는 단단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체리아는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클라우스가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 좀 드릴까요?”

“……됐어.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야?”

됐다고 말했음에도 아체리아는 기어이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가져와 클라우스의 입가에 내밀었다.

“여긴 왕궁이에요.”

물을 마시던 클라우스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왕궁의 방에 자신이 누워 있었던 거라고?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데?”

“말도 안 돼. 기억이 안 나신단 말이에요?”

“무슨 기억?”

“쓰러지셨잖아요! 후원에서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다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내가 쓰러져……?”

그제야 조금씩 기억이 났다. 필리파 왕녀를 만나고 나온 다음, 에른스트가 얼른 아체리아를 데리러 가자고 말해서 후원으로 나갔었지.

그러다 귀족 아가씨들 틈에 둘러싸인 아체리아를 보았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는 생각을 하고…….

그리고 끝이었다. 그다음부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그즈음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서 쉬라고 에른스트 님께서 말씀하시던데요.”

아체리아가 이어 말했다.

“이미 해도 다 졌고요.”

“에른스트는?”

“시드레 백작이라는 분이 불러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에른스트가 시드레와 이 시간까지 데이트를 할 리도 없고, 아마 시드레를 피하기 위해 대공저로 돌아갔거나 그랬을 것이다. 클라우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해쓱한 뺨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여기 머물면, 너는 어쩌고?”

“에른스트 님께서 방 두 개가 붙어 있는 곳을 찾아 주셨어요. 제 방은 바로 옆이에요.”

아체리아가 닫힌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클라우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궁 안에는 다른 귀족들도 많이 머물고 있으니 하룻밤을 자고 간다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단지 그의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배가 고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클라우스의 중얼거림에 아체리아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배가 고프시다고요?”

“그래. 점심때 이후로 아무것도…… 너는 뭘 좀 먹었어?”

“저는 아까 요기를 했어요. 란츠호프 아가씨와……. 제 방에 샌드위치가 좀 남았는데, 그거라도…….”

“아니, 됐어.”

클라우스는 줄을 당겨 시종을 부를까 고민하다가 그만 도로 자리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속이 비어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지만, 먹어 봐야 맛있지도 않을 것을 굳이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체리아도 클라우스의 그런 생각을 짐작했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체리아가 말했다.

“제가 요리를 해서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드실래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긴 공작저가 아니야.”

“하지만 주방은 있을 거잖아요. 아까 란츠호프 아가씨가 말씀해 주셨는데, 궁마다 주방이 몇 개씩은 있다고 하던데요? 여기도 분명 주방이 딸려 있겠죠.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그러나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벌써 방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덜렁 혼자 남은 클라우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체리아가 나간 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비스듬히 누웠다.

* * *

아체리아는 지나가던 시종을 붙잡고 주방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시종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지만, 대공과 비스몽트 공작과 아는 사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별말 없이 주방으로 아체리아를 안내해 주었다.

“세상에.”

주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온갖 재료와 조리 도구들이 놓인 선반이 줄지어 있었다. 그럼에도 위쪽으로 천장이 탁 트여 있어 답답하지 않았고, 벽에는 말린 향신료나 허브를 걸어 두어 기묘하면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여기만 구경하고 있어도 시간이 다 가겠는데?”

아체리아는 선반 곳곳을 기웃거리며 잠시 구경을 했다. 손이 무척 많이 가는 소스를 저장한 들통들을 보고 있는데, 안쪽에서 갑자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깜짝 놀란 아체리아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주방의 입구에 덩치 큰 남자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얀 헨릭이랑 비슷한 사람이네.’

그리 생각한 아체리아가 공손하게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잠시 주방을 빌릴 수 있을까요?”

“뭐? 뭐라고 했소? 주방을 빌려? 대체 누구요?”

“저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인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합니다. 공작께서 사정이 생겨 오늘 왕궁에 머무실 텐데, 식사를 하지 못하셔서 뭔가 요깃거리가 필요해요.”

“그런 거라면 왕궁의 요리사들이 할 일이지, 당신이 할 일이 아니오. 비스몽트 공작이라고 했나? 뭘 드실 건지 이야기하면 내가 만들어다 드리지.”

“아뇨, 제가 해야 합니다. 부탁이니 주방을 좀 빌려주세요.”

요리사는 아체리아의 말에 기분이 약간 상한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그녀만 해도 누군가 갑자기 공작저의 주방으로 뛰쳐 들어와 요리를 하겠다고 설쳐 대면 대번에 쫓아낼지도 몰랐다.

“원하신다면 제가 뭘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셔도 됩니다. 다만 요리만은 제가 하게 해 주세요. 공작께서는 입맛이 아주 까다로우셔서요.”

“입맛이 까다로우시건 어쨌건, 아가씨가 왕성의 요리사들보다 더 낫다는 거요, 지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이럴 땐 뭐라고 설득해야 잘 설득했다고 소문이 날까?

“……누가 더 실력이 뛰어난지, 그런 이야기를 드리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라티니요. 이 궁의 부주방장이지.”

“좋아요, 라티니 부주방장님. 부주방장님께서도 가장 좋아하시는 요리가 있겠지요? 누가 만든 요리인가요?”

라티니라는 남자는 아체리아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털이 부숭부숭하게 돋은 검지를 들어 보였다.

“내 할머님이 만드신 감자 파이.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지.”

“흠, 그럼 부주방장님의 할머님께서는 왕궁의 수석 요리장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요리를 한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것 보세요. 사람마다 입맛에 맞는 요리가 있는 법이에요. 정 뭣하면 절 비스몽트 공작님의 죽은 할머니라고 생각해 주세요. 손자가 무척 좋아하는 것을 다시 한번 만들어 주러 온 할머니라고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밀어붙이면서, 아체리아는 기어이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티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자 얼떨떨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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