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클라우스는 갈등하는 표정으로 필리파와 찻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야기였다.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다.
“자, 어떡하시겠어요?”
필리파가 말했다.
클라우스의 머릿속에서는 오랜만에, 아주 빠른 속도로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일을 알아 버린 이상 필리파 왕녀는 앞으로 비스몽트 공작가에 대해 ‘다양한 방면으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필리파를 돕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 관심은 곧 공작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당장은 무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클라우스는 필리파가 왕이 된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잠깐 만나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가 다음 대 베르데사 국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한 인물임은 잘 알았다.
‘이걸 위해서 이런 비밀을 말해 준 건 아니겠지.’
클라우스는 무릎 위에 얹은 빈손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필리파를 돕는 것을 거부하고 불안 속에서 사느냐.
아니면 그녀를 왕으로 만들고 비스몽트 공작으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느냐.
“왕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조가비처럼 다물려 있던 클라우스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저, 클라우스는, 왕녀님의 뜻을 받들어 하명하시는 모든 것을 충실하게 이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어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한 필리파는 소매 속에서 체스의 말 하나를 꺼냈다. 룩이었다.
“난 룩을 참 좋아한답니다.”
“…….”
“초반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지만, 나중에 킹을 잡을 때는 반드시 필요한 말이기 때문이죠. 심지어 퀸을 대신할 수도 있고요.”
“제가 왕녀님의 룩이 되는 것이로군요.”
클라우스의 말에 필리파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맞았어요. 이 판의 승기를 내게 가져다주길 바랍니다.”
* * *
아체리아는 궁의 후원 한쪽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따금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체리아의 옷차림과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노골적으로 힐끔거렸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 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체리아는―할 수만 있다면― 클라우스와 에른스트의 초상화라도 꺼내어 저들의 눈앞에 들이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이 얄밉게 생긴 두 남자 때문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에른스트는 후원을 구경하고 있으라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후원의 아름다운 정경이 아체리아의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무슨 수로 경치를 즐긴단 말인가? 누군가 수상쩍게 여겨 성의 경비병이라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때 모퉁이 한쪽에서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아체리아가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체리아?”
익숙한 목소리다. 못 들은 척하기에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너무 컸고, 거리도 가까웠다. 아체리아는 또다시 고장 난 오토마타처럼 삐걱대면서 고개를 돌렸다.
“란츠호프…… 아가씨.”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역시, 릴리엇이었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과 산책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산을 받쳐 든 채 소곤거리는 아가씨들의 무리를 보던 아체리아는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슬그머니 정자 쪽으로 돌아갔다.
“음, 그게요…….”
“혼자 온 건 아니지? 클라우스와 함께 왔어? 클라우스는 어디 있어?”
“아, 네. 어…… 공작님도 오셨고, 대공 전하도 오셨는데…….”
“대공 전하라고?”
비슷비슷하게 예쁘장한 아가씨들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톡 튀어나왔다.
“네가 지금 대공 전하라고 했니?”
“시드레 백작이야.”
릴리엇이 속삭여 주었다. 아체리아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가 어색한 몸짓으로 그녀에게 절을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다니, 지금은 어디에 계신데?”
“지금…… 필리파 왕녀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필리파 왕녀?”
시드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체리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아체리아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릴리엇이 아체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클라우스도 참, 왜 너를 이런 데다 내버려 뒀다니? 자, 우리와 함께 걷자.”
“예? 아뇨, 저기, 저는…….”
“괜찮다니까. 함께 산책해도 괜찮겠죠, 다들? 이 아이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에요.”
릴리엇은 일부러 ‘수석 요리장’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함부로 다룰 하녀 정도가 아니라는 걸 못 박아 두지 않으면, 저들 중 밉살스런 성격을 가진 누군가가 아체리아를 괴롭힐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머, 젊어 보이는데 수석 요리장이라니. 솜씨가 대단한 모양이네요.”
누군가 릴리엇을 거들어 말해 주었다. 그제야 머뭇거리고 있던 다른 아가씨들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츠호프 아가씨, 전 정말 괜찮습니다만…….”
“여기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괜찮아.”
릴리엇은 기어이 아체리아를 끌고 아가씨들의 무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드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람?’
아체리아는 에른스트와 시드레가 어떤 관계이고, 또 그들을 둘러싸고 어떤 소문이 퍼져 있는지 전혀 몰랐다.
시드레 역시 아체리아가 누군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에른스트의 행방을 아체리아가 알고 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수석 요리장이라면…… 꽤 오랫동안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일을 했을 텐데요.”
“아, 네. 어렸을 때부터 일했습니다.”
“어머,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없습니다.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저런.”
아가씨들 사이에서 낮게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아체리아는 새삼스럽게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그리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가족이 없다’고 말한 것이 처음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연한 갈색 머리를 가진, 발랄해 보이는 아가씨가 아체리아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 그 비스몽트 공작님은 아주 까다로우시다던데, 어떠니?”
‘다짜고짜 반말이네.’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공손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척 까다로우신 분입니다.”
옆에 있던 릴리엇이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체리아는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어찌나 까다로우신지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죠.”
“어쩌면! 하지만 그 까다로우신 점이 매력이지. 그렇지 않니?”
이 아가씨도 얼이 빠졌구나. 공작과 한집에서 딱 하루만 살아 보면 그런 말이 쑥 들어갈 텐데.
“글……쎄요, 저는 잘…….”
“요리사 주제에 주인의 성격에 대해 함부로 논할 수는 없죠, 올레이나. 곤란하게 하지 말아요.”
모두의 시선이 시드레에게로 모였다. 아체리아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나, 시드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 말이 틀렸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드레 백작, 그런 말은 아체리아에게 좀 실례인 것 같네요.”
릴리엇이 말했다. 그러나 시드레는 릴리엇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낮은 관목 위를 손끝으로 쓰다듬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아체리아!”
그때 분주한 발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조용한 후원을 흔들었다.
“대공 전하!”
에른스트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아체리아도, 릴리엇도 아닌 시드레였다.
“시드레.”
“대공 전하, 필리파 왕녀님을 만나 뵙고 오셨다면서요?”
“그렇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잠깐 실례하겠소.”
에른스트는 시드레를 휙 지나쳐 아체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클라우스였다.
“세상에, 비스몽트 공작님이셔!”
“가까이에서 보니 더 잘생기신 것 같아요.”
“너무 마르시지 않았나요? 저보다 더 마르신 것 같은데…….”
클라우스를 향한 아가씨들의 평가는 다양했다. 아체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른스트를 보고 있다가, 먼발치에 서 있는 클라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 있나 한참 찾았잖아.”
“저기, 에른스트 님.”
“어, 왜?”
“공작님께서 뭔가…… 이상하신 것 같은데요.”
“이상하다니 뭐가?”
에른스트가 고개를 돌린 순간, 가만히 서 있던 클라우스의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클라우스 님!”
소리를 지른 아체리아는 에른스트를 밀치며 클라우스에게로 달려갔다. 쓰러진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에른스트, 뭐 해! 클라우스를 업어!”
릴리엇이 재촉하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에른스트가 뒤늦게 클라우스에게로 달려갔다. 아체리아는 한 품에 클라우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 에른스트의 등에 기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저택으로 데려가야 해요!”
“진정해, 아체리아. 저택까지는 시간이 너무 걸려. 왕성에도 방은 많으니까 따라와.”
에른스트가 아체리아를 달래며 침작하게 말했다.
클라우스를 업은 에른스트, 그리고 아체리아와 릴리엇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당혹스런 웅성거림만이 남았다.
아니다. 한 사람만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드레의 시선은 클라우스가 쓰러지는 순간에도 내내 에른스트에게만 꽂혀 있었다.
에른스트가 아체리아에게 말을 거는 모습, 손을 잡으려는 모습, 그리고 당황한 아체리아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 주는 모습을 시드레는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하잘것없는 고용인을…….’
시드레의 손이 관목을 와삭 움켜쥐었다. 작은 잎들이 소리도 없이 나풀나풀 떨어져 그녀의 발치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