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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5)화 (35/144)

35화

에른스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른 아체리아는 유난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와, 또 유난히 뚱한 클라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대체 절 어디로 데려가시는 건가요?”

“어디일 것 같아? 추측해 봐.”

“대공저로 데려가시는 건가요?”

“틀렸어.”

“그럼 역시 절 팔아넘기시려는…….”

“누가 팔아!”

클라우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체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전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야!”

“행선지도 알려 주지 않고 다짜고짜 마차로 사람을 납치하듯 데려가시니 그러는 거잖아요!”

“소리 지르지 마! 안 그래도 골이 울린다고!”

“공작님께서 소리를 지르시니 골이 울리지요!”

아체리아와 클라우스가 바보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동안, 에른스트는 옆에서 웃겨 죽어 가고 있었다.

“너희 둘이 광장에서 자리 펴고 만담하면 인기 많겠다.”

“누가 이런 거랑!”

“누가 이런 거랑!”

둘이 동시에 똑같은 말을 외쳤지만, 서로의 표정은 달랐다. 아체리아는 아차 싶은 얼굴로 입가를 손으로 턱 짚었고, 클라우스는 잘 걸렸다는 듯한 비웃음을 띤 채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것 봐라. 공작에게 ‘이런 거’라고? 배짱도 좋네.”

“아니, 공작님께서도 절 ‘이런 거’라고 부르셨잖습니까.”

“내가 부르는 거랑 네가 부르는 게 같아?”

다를 건 뭔데. 아체리아가 불만스레 입술을 실룩거렸다.

마차는 포석이 깔린 길을 달려 왕성으로 가는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가 기우뚱 기울어지자, 아체리아는 놀란 눈을 껌뻑거리며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아니,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베르데사 왕성.”

아체리아의 고개가 끼기긱, 고장 난 오토마타처럼 에른스트를 향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왕성으로 가는 중이야. 우린 필리파 왕녀를 만나러 갈 거고, 아체리아는…….”

“내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체리아는 당장이라도 문을 밀어 열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정말 뛰어내리려는 줄 알고―정말 뛰어내리려고 하긴 했다― 놀란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아니, 저를 왕성에 왜 데려가세요! 아! 내려 주세요! 내려 주시라니까요! 저기요, 마부 아저씨!”

“누가 왕성에 너 팔아먹는대? 조용히 좀 있어!”

‘너 같으면 조용히 있게 생겼냐!’

“자, 침착하고, 질문을 드릴게요.”

아체리아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무슨 카드 점이라도 봐?”

“거기! 조용히 하세요.”

졸지에 ‘거기’가 되어 버린 클라우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왕성에 왜 가시나요, 두 분은?”

“필리파 왕녀를 만나러 갑니다.”

에른스트가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체리아는 후, 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두 분이 왕녀님을 알현하는 동안, 저는 어디서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아무 데나 돌아다녀도 돼. 누가 물으면 날 따라온 거라고 말하면 되니까.”

이번에도 에른스트가 대답을 했다. 클라우스는 이제 이 대화에서 진심으로 빠지고 싶다는 표정을 한 채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데나 돌아다니라고요? 이런 차림을 하고서요? 절 데려다가 새 하녀로 쓰는 게 아닐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왕성에서 일하는 궁인들은 다들 추천장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왕성 구경을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납치를 했습니다.”

에른스트가 넙죽 너스레를 떨자 아체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퍼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마차는 경사진 오르막을 올라 이윽고 왕성의 정원 앞에 멈추었다. 그냥 마차에 있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아체리아도 결국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맙소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정원에 아체리아가 질린 표정을 짓자,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클라우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뭐 하시는 건가요?”

“에스코트하잖아.”

“아니, 누가 봐도 이상하잖습니까. 그냥 뒤에서 걸을게요.”

“네가 내 시종도 아닌데 뭣 하러?”

“차림새는 시종이잖아요.”

“이렇게 입은 시종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이 자식이 지금 한번 해 보자는 거야?

“놔주십시오, 공작님.”

“싫어.”

두 사람이 에스코트를 받네 마네 실랑이를 하는 동안, 뒤에서 반 발짝 떨어진 곳에 선 에른스트는 그 모습을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로 인해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게 된 것은 친구로서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른스트가 원한 것은 거기까지일 뿐, 그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거니와 원했던 바도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정말로 아체리아를 대공비로 만들고 싶은 건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녀와 즐겁게 연애를 하고 싶은 건가?

“에른스트, 거기서 뭐 해?”

클라우스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에른스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냐. 가지.”

“저기…… 저도 왕녀님을 뵈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후원으로 먼저 안내해 줄 테니, 거길 구경하고 있어. 필리파와 용건을 마치고 나면 우리가 그쪽으로 갈게.”

“알……겠습니다. 제발 너무 늦지 말아 주세요.”

긴장돼서 죽겠으니까. 아체리아는 벌써부터 뻐근해지려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눈을 깜빡였다.

* * *

동쪽 왕궁, ‘새들의 궁’은 주로 왕비와 왕녀들이 머무는 곳인 만큼 화사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는 길게 뻗은 크림색 복도를 따라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필리파의 방으로 향했다. 문의 바깥쪽은 금과 도자기를 이용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마치 딴 세상처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무미건조한 장식들, 수도원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필리파의 방은 꼭 필요한 것들 이외에 장식을 위한 가구들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필리파 왕녀님을 뵙습니다.”

클라우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필리파는 우아한 동작으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타티아나, 차를 내어 와.”

타티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활발한 성격의 왕녀들은 으레 시녀들도 비슷한 사람으로 뽑기 마련인데, 타티아나의 경우는 고요하고 정적인 필리파에게 정확하게 걸맞은 인물이었다.

연한 노을빛의 차가 세 잔, 세 사람의 앞에 각각 놓였다. 필리파가 가장 먼저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무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왜 저를 찾아왔는지, 그 이유는 굳이 묻지 않겠어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일일 테니까.”

필리파가 말했다.

“황공하옵게도, 지고하신 폐하께서 부족한 저를 베르데사의 차기 국왕으로 낙점하셨지요.”

그렇게 말하는 필리파의 목소리는 마치 ‘내일도 해가 뜨겠군요’라는 듯이 당연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또 적극적으로 막고자 하는 세력도 있겠지요.”

“…….”

“그래서 폐하께서 두 분을 내게 보내신 것일 테고.”

클라우스는 필리파의 시선이 마치 도사린 짐승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구한 것 같으면서도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도저히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알 수 없는 생명체 같은 사람이었다.

“두 분은 날 도울 의향이 있나요?”

필리파의 말에 에른스트와 클라우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향이 없다면, 혹은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지금 돌아가도 좋아요.”

“필리파, 우리는 그대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하지만 비스몽트 공작의 경우는…….”

필리파가 에른스트의 말을 잘랐다.

“비스몽트 공작의 경우는 사교계와 정치를 꺼려 이런 일에 나서기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사촌 오라버니?”

“그래요. 그대를 돕는 거라면 내 힘만으로도 어쩌면…….”

“아뇨, 오라버니의 힘만으로는 어렵지요.”

어세를 낮춘 필리파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클라우스는 그녀가 보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왕녀, 부모라는 보호막도 없이, 든든한 뒷배나 약혼자도 없이 오로지 궁 안에 홀로 틀어박혀 노래하는 법을 잊어버린 새처럼 살아가는 필리파.

누가 그런 평가를 내렸던가? 그녀는 날갯죽지를 잘린 새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 따위가 아니었다. 때를 기다리며 발톱을 숨기고,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순하고 무해한 척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대공 에른스트의 비호를 받는 것을 이토록 무가치하게 여길 수 있는 이가 왕성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필리파의 최대 적이라고 할 수 있는 3왕자 벨란과 5왕자 이볼드조차도 에른스트의 세력을 등에 업을 수 있다면 맨발로 뛰어나오는 시늉을 할 것이다.

“아니면 오라버니께서 시드레와 혼인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건…….”

“그러실 생각이 있다면 벌써 하셨겠지요. 그러나, 오라버니가 시드레 백작과 혼인하신다 해도 제게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어째서죠?”

“시드레 백작은 보수파죠.”

필리파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의 표정이 동시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루뷘 왕이 필리파를 밀어 주고자 하는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보수파의 일원이었고, 필리파 역시도 루뷘 왕과 보수파들의 행보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여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반대라니?

“반대라니……. 필리파, 그러면 그대는 진보파를 지지한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비스몽트 공작의 세력이 저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죠.”

필리파의 시선이 물끄러미 클라우스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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