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4)화 (34/144)

34화

새 비스몽트 공작이 첫 연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문은 사교계 소식통들을 통해 순식간에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특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체리아의 요리였다. 그때까지 정식 만찬에서는 나온 적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요리를 도입한 공작저의 요리사를 두고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점점 더 살이 붙어서, 사교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클라우스의 귀로 들어올 즈음에는 아체리아가 다 죽어 가던 비스몽트 공작을 이국의 요리들로 살려 놓았다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였다.

“웃기는 일이라니까.”

에른스트를 마주하고 앉아 차를 마시던 클라우스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국의 요리로 다 죽어 가던 날 살려 냈다고? 무슨 동화 속 요정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요정 같기는 하지. 자네가 꼬박꼬박 하루 세끼를 다 챙겨 먹게 만들었잖아.”

어디 하루 세끼뿐이겠는가. 요즘은 야식도 이따금 챙겨 먹을 때가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 말은 하지 않고 접시에 놓인 작은 크림 쿠키 하나를 집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우물거렸다.

“필리파 왕녀께서는 그날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클라우스가 묻자 에른스트는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재미있어하더군. 필리파가 까다로운 성격이기는 하지만, 늘상 악의에 차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야.”

“은근슬쩍 나더러 만나 보라고 종용하는 것 같은데.”

“어차피 너나 나나 만나 봐야 할 사람이야. 마음을 늦게 먹을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질 뿐이지.”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클라우스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필리파를 만나고 나면 자신은 어떤 방법으로든 정치에 끼어드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비단 약한 몸 때문만이 아니라, 클라우스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그다지 원치 않았다. 매번 왕성의 회의에 참여해 상대를 견제하고, 위협을 하고, 받고…….

그 군상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것을 생각만 해도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클라우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

클라우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에른스트가 다소 진지해진 투로 말했다.

“비스몽트 공작의 이름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런 말이라면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왔다.

비교적 온후하고 낙관적이던 아버지를 제외하고, 집안사람들은 모두 다 클라우스에게 다음 대 공작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아직 열두 살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필리파 왕녀를 만나면 넌 시드레와 혼인해야 할 거야. 그건 알고 있는 건가?”

“폐하께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건 알지.”

“폐하께서 염두에 두셨다는 건, 곧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잖아.”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폐하께서 필리파를 다음 대 국왕으로 세우고 싶어 하시니까, 내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필리파를 뒤에서 밀어 주는 거야. 거기에 꼭 시드레의 힘이 필요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클라우스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에른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일단 필리파 왕녀를 만나도록 해. 그래야 병상에 누워 계신 숙부께서 내 결혼에서 일단 관심을 끄실 테니까.”

“폐하의 관심을 돌릴 용도로 날 이용하시는군. 잘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클라우스가 삐딱한 어조로 농담을 하자 에른스트는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이 씩 웃었다.

* * *

경연이 끝난 후, 락케는 부주방장에서 일반 요리사로 강등되었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바키, 듀켄과 동급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체리아는 굳이 로널드 락케의 신경을 긁지도, 그를 조롱하지도 않았다. 쫓아내지 않고 주방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한 벌이 되었으리라 믿었다.

“요리장님, 이렇게 하면 될까요?”

요아킴은 여전히 견습 요리사였지만, 로널드 락케가 실세일 때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칼질 연습이며 재료 다듬는 일을 거들 수 있게 되었다.

얀 헨릭의 손에 잡혀 온 그는 이후 아체리아에게 뺨 한 대를 호되게 얻어맞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다음부터는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아체리아의 말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샐러리를 너무 크게 썰었어. 마세드완이 아니라 브뤼누아즈야. 그렇게 크게 썰면 스튜에 넣었을 때 보기가 좋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단면을 보았을 때, 줄기의 심이 지저분하게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해. 한 대를 더 줄 테니 다시 썰어. 그리고 다 썰고 나면 이쪽으로 와서 어슷썰기를 연습해.”

“네, 요리장님.”

로널드 락케와 바키, 그리고 듀켄은 아체리아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요아킴을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놓칠 아체리아가 아니었다.

“락케.”

“……예, 왜 그러십니까?”

“뭐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럼 눈 굴릴 시간에 일이나 제대로 해.”

조롱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친절해진 것도 아니다. 아체리아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수프 육수의 맛을 점검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계절 채소를 소테한 것과 가재 버터를 넣어 만든 소스를 끼얹은 금어 구이.

아체리아는 해물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소스에 들어가는 기본적인 재료를 조금씩 변형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칠맛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팬 지나갑니다!”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아체리아는 슬쩍 몸을 피한 뒤 수프 솥의 뚜껑을 닫았다. 바쁜 주방에서는 정중히 ‘비켜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크게 외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좋아요, 준비가 마무리되었으면 이제 다들 숨 좀 돌리죠.”

아체리아의 말에 요리사들은 자신이 하던 일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삼삼오오 모여 주방을 떠났다. 락케의 눈치를 보던 바키와 듀켄도 그들과 어울려 사라지고 난 주방에는 아체리아와 요아킴, 두 사람만이 남았다.

“요아킴, 너도 이제 그만 가서 쉬어.”

“아, 아니에요. 이걸 좀 더…… 연습하려고요.”

요아킴은 요리를 하고 남은 채소 줄기로 써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칼을 다루는 것은 요리사가 첫 번째로 익혀야 하는 자질인데, 그는 여태까지 설거지나 뒷정리만 하느라 제대로 칼을 쥐어 본 적도 없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하려고 하면 도리어 손이 고장 날 수 있어. 그러니까 하루에 정해진 양만큼을 충실히 하고, 쉴 땐 쉬어 주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저기…… 요리장님.”

앞치마를 벗고 주방을 나서려던 아체리아가 요아킴을 돌아보았다.

“왜?”

“저기……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거 같아서요.”

요아킴은 모자를 벗은 뒤 아체리아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체리아는 요아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고개 들어.”

요아킴은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아체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제 순한 양 같았다. 소년의 주근깨 가득한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던 아체리아가 요아킴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내가 널 용서하는 건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에 또 한 번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가차 없이 널 내쫓을 테니까 명심해.”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요아킴, 네가 센스 있는 요리사가 될지, 아니면 둔한 요리사가 될지는 너 하기에 따라 달렸어. 이 주방에서는 견습 요리사라도 충실하게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어. 그걸 찾아서 할 수 있게 된다면 넌 분명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내 말 알아듣겠어?”

“……네, 요리장님.”

“로널드 락케나 바키 같은 자들의 말에 휘둘리지 마. 무슨 일이 있거든 나에게 바로 말하고. 이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요아킴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체리아는 그의 작은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체리아!”

아체리아가 방으로 올라가려던 때, 마침 클라우스와 함께 나오던 에른스트가 그녀를 불렀다.

“네, 대공 전하.”

“지금 한가해?”

에른스트의 질문에, 아체리아는 물론이거니와 클라우스까지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가하느냐고 물으시면…… 지금은 한가합니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나와.”

“예?”

“우리와 함께 갈 곳이 있어.”

아체리아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클라우스가 에른스트의 소매를 확 잡아끌었다.

“뭐 하는 거야?”

“왜?”

“우린 지금 왕성에 가는 거야. 시장에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시장에 가는 거면 굳이 너를 데리고 가진 않겠지. 아체리아와 단둘이 놀러 갔을 거라고.”

클라우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에른스트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검지 끝을 빙글 돌렸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왕성에 도착했을 때 아체리아가 무슨 표정을 짓나 보자고.”

“데리고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왕녀에게 선이라도 보이겠다는 거야? 안 돼. 절대로…….”

“빡빡하게 굴지 마. 왕성 구경을 한번 시켜 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지금 후원에 꽃이 잔뜩 피어서 아주 보기 좋단 말이야.”

“자네 정말…….”

“나도 있고, 그리고 자네도 있는데 대체 무슨 상관이야? 아무 문제없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 클라우스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에른스트의 이 짓궂은 계획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외출복이기는 했지만, 왕성에 입고 가기에는 터무니없이 초라한 옷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계단을 내려오는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던 클라우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짚었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아체리아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아름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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