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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3)화 (33/144)

33화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이제 다들 마지막 서빙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더 종이 울리고, 드디어 아체리아의 디저트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게 도대체 뭐야?”

에른스트가 어리둥절하게 혼잣말을 했다. 클라우스도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멍하니 그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푸딩……인가요?”

릴리엇이 말했다. 그러나 푸딩이라기에는 크기가 너무 거대했다. 마치 육수를 끓일 때 쓰는 솥을 통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정도의 크기였다. 모양도 솥에서 그대로 쏟아 놓은 것처럼, 커다란 원통형의 크기였다.

아체리아는 그 거대한 푸딩을 직접 조금씩 떼어 내어 시종들에게 건네주었다.

접시를 받아 든 시종들은 주빈들이 있는 테이블부터 순서대로 푸딩을 가져다주었는데, 투명하고 탱글탱글한 안쪽에는 온갖 과일과 싱싱한 허브가 마치 박제된 것처럼 들어 있었다.

“계절 과일과 허브를 듬뿍 넣어 차게 만든 푸딩입니다.”

아체리아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푸딩은 보통 한두 가지 재료로만 만드는 거 아닌가? 위에 캐러멜도 뿌리고 말이야.”

“게다가 이건 투명하잖아요, 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요?”

손님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접시 위에 놓인 푸딩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 말을 얹었다. 차게 식힌 푸딩을 한 입 베어 물자, 신선한 과일이 입 안에서 온갖 새콤달콤한 맛을 뽐내며 어우러졌다.

“맛있군.”

필리파 왕녀가 역시나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왕성의 요리사들만큼이나 수준급이야. 참신하다는 점에서는 그 이상이군. 좋은 요리사를 데리고 있는걸.”

“과찬이십니다, 전하.”

클라우스가 드물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아체리아는 필리파가 푸딩 접시를 다 비우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체리아가 만든 것은 푸딩이라기보다는 젤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푸딩은 원래 우유와 크림이 들어가야 하지만, 이 많은 손님들에게 푸딩을 만들어 내놓을 만큼 우유의 양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때 로널드 락케 쪽에서도 디저트가 나왔다. 바삭하게 튀겨 설탕을 뿌린 얇은 비스킷 사이에 크림을 발라 켜켜이 쌓은 것이었는데, 이미 아체리아의 과일 푸딩으로 입가심을 하고 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결과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네.”

에른스트가 아체리아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 * *

연회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음악과 춤, 그리고 술이 어우러진 자리는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단 한 곳, 비스몽트 공작의 서재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후, 아체리아와 로널드 락케는 나란히 공작의 서재로 불려 왔다. 클라우스는 느긋한 태도로 로널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경연에서 아체리아가 사고가 있었다고 말하던데.”

락케의 입가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 사고가 대체 무슨 사고였는지 설명해 봐.”

“공작님, 저는…….”

“네게 물은 게 아니다, 락케.”

클라우스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체리아, 네가 설명해.”

“그게…….”

아체리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바깥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즈만의 목소리와 더불어 우렁우렁하게 울리는, 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낯익은 목소리였다.

“얀 헨릭?”

아체리아는 공작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몸을 돌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클라우스의 눈썹이 불만스레 까딱였지만, 그녀는 그의 반응을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얀!”

문밖에 서서 호즈만과 입씨름을 하고 있던 자는 정말로 얀 헨릭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덜미를 잡혀 있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요아킴?”

로널드 락케의 머리가 뒤쪽으로 팩 돌아가더니, 곧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새카맣게 변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저 머저리가 설마 얀 헨릭에게 이번 일을 까발린 건가?

“공작님, 강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서재 안으로 툭툭 걸어 들어온 얀 헨릭이 제법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가게는 잘 되어 가나?”

“살펴 주신 덕분에 요즘은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지? 그 녀석은 또 뭐고?”

얀 헨릭은 화난 표정으로 요아킴을 바라보다가 그의 등짝을 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사실대로 말씀드려라.”

요아킴은 얻어맞은 등이 아픈 줄도 몰랐다. 그는 사색이 된 락케의 얼굴을 한 번 원망스레 쳐다보았다가, 클라우스의 앞에서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보며 클라우스가 물었다.

“네 얼굴도 낯이 익군. 이름이 뭐냐.”

“예, 저, 제…… 제 이름은, 요아킴이라고 합니다. 주방의…… 겨, 견습 요리사입니다.”

“그런데?”

“고, 공작님께, 드, 드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널드 락케는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문간에 호즈만과 얀 헨릭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심정 같아서는 지금 당장 요아킴이 심장마비라도 일으켜 쓰러지면 좋았을 것이리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아킴은 마치 왕 앞에 선 죄인처럼 벌벌 떨면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오늘…… 오, 오늘 요리장님이…… 요리를 제대로 하, 하지 못한 것은 전부 제…… 제 탓입니다.”

“뭐가, 어떻게 네 탓이라는 거냐?”

“제가…… 여, 여기 락케 씨의 사주를 받아서, 저기, 요리장님의 재료를 전부…… 망쳐 놓았습니다.”

클라우스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네가 재료를 망쳤다?”

“예, 예.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 요리장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기회를 주시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클라우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아체리아의 얼굴을 힐끔 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체리아는 오늘 훌륭하게 제 소임을 다했다. 당연히 경연에서 우승한 것도 아체리아다.”

“……네?”

“락케, 이자의 말이 사실인가? 바른대로 말하라.”

로널드 락케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쫓겨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대로 클라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수, 수석 요리장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 그러니까. 클링 씨의 요, 요리가 너무 뛰어날 것이 여, 염려되어서 제가…… 한순간 실수를.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그, 그렇다고는 하지만 재료를 망친 건 요아킴입니다! 저는 그저 그,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

“아닙니다! 락케 씨는 저를 쫓아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요리장님의 재료를 망쳐 놓지 못하면 어디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줄 거라고 협박했어요!”

“목소리를 낮춰라.”

클라우스의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칼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락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돌연 아체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은 어떻지?”

“……예?”

“내가 이자를 쫓아내면 되겠나?”

아체리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락케를 바라보았다.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는 수석 요리장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할 것이니, 저의 말을 잘 따른다고 약속한다면 굳이 쫓아낼 것까지야 없겠지요.”

락케가 한 짓은 확실히 비열한 짓이기는 했다. 그러나 여기서 쫓겨나면 그들뿐만 아니라, 당장 요아킴이 갈 곳이 막막해질 것이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녀석이 절망해서 길거리를 전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체리아는 마지막 남은 자비심을 바닥까지 닥닥 긁어모아 딱 한 번, 이번 한 번만 베풀어 주기로 했다.

로널드 락케는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물론 꾸며 낸 표정이라는 것을 아체리아도 모르지 않았지만, 눈에 거슬린다고 해서 공작의 뒷배를 이용해 다 쫓아낸다고 해서야 말이 안 된다.

‘아마 얀 헨릭도 그랬을 거야.’

아체리아는 곁에 서 있는 얀 헨릭의 존재감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이렇게 대처했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 아체리아…… 아니, 클링 씨.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그녀에게서 손을 떼라.”

아체리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던 로널드 락케는 클라우스의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화들짝 손을 놓았다.

“두 번 다시는 함부로 아체리아 클링의 몸에 손을 대지 마라. 그리고,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아듣겠나?”

“예, 예.”

“너도 마찬가지다, 요아킴. 너는 앞으로 아체리아 밑에서 그녀의 일을 돌보도록. 이 일에 관여한 자들은 반년 동안 급여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보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와 얀 헨릭만 남기고 모두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대체 그를 어떻게 데리고 온 거지?”

클라우스의 질문에 얀 헨릭이 산처럼 거대한 어깨를 들썩였다.

“요아킴 녀석이 얼이 빠진 채로 광장을 배회하고 있기에 잡아다 추궁했더니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소심한 녀석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모양이군. 반년간 급여를 삭감하는 정도로는 안 되겠는데.”

“공작님, 락케가 저지른 일은 괘씸하지만 요아킴은 너무 추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너는 이런 일을 겪고도 그 녀석 편을 들어줄 마음이 나는 모양인데, 나는 아니거든.”

아체리아의 부탁에 클라우스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어쨌든 손님들께서 즐겁게 식사를 마치셨으니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체리아가 산뜻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홀가분해 보여서, 클라우스는 기가 찬다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재료들을 죄다 섞어 놓은 요리만 만들었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였군.”

“네.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어서요. 하지만 제 주방에서 버리는 음식이란 나올 수 없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 아체리아는 얀 헨릭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재료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어떻게든 쓸모를 생각해 보라는 것 역시 얀 헨릭의 오랜 가르침이었다.

“앞으로 네 말을 거역하는 요리사가 있거든 즉각 나에게 보고해. 고용인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중요한 법이야. 모두들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면 공작저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다. 명심해.”

여전히 밉살스러운 말이었지만 아체리아는 순순히 치맛자락을 펼쳐 절을 했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수고했어.”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이윽고 기쁜 표정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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