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2)화 (32/144)

32화

서빙되어 온 음식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클라우스마저도 깜짝 놀라서 멍하니 테이블을 내려다볼 지경이었다.

주방 안에서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널드 락케는 테이블에 서빙된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바깥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분명히 요아킴이 재료를 다 망쳐 놨는데!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아체리아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어야 했다. 어찌저찌 뭘 만든다 하더라도, 소스며 육수가 다 엉망이 된 판에 그 조각난 재료들로 조잡한 샐러드 이외에 대체 뭘 만들 수 있겠는가?

“이게…… 뭐죠?”

“처음 보는 건데…….”

“이건 스튜 같은데, 이 둥그런 건 대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락케의 요리는 겨우 애피타이저 하나가 서빙되어 나왔지만, 아체리아의 요리는 아니었다.

보통 연회용 만찬이 순서대로 나오는 것에 비해, 아체리아는 스튜와 샐러드, 그라탕과 파이 등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하며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시종들은 손님들 앞에 빈 접시들을 하나씩 놓아두었다.

“원하시는 음식을 덜어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클라우스는 헛웃음을 치며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아체리아가 만든 것들은 모두 어마어마하게 양이 많았다. 말 그대로 ‘마음껏 원하는 것을 덜어 먹을 수 있는’ 요리들뿐이었다.

“재미있네.”

필리파 왕녀가 말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음식이지? 처음 보는데.”

필리파가 가리킨 것은 납작하고 둥그런 원판처럼 생긴 요리였다. 필리파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 요리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요리사를 불러오도록 하죠.”

클라우스가 말하자, 호즈만은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아체리아!”

아체리아는 다른 요리사들과 함께 바쁘게 디저트를 만드는 중이었다.

“왜요?”

“나와 봐, 손님들이 네 요리를 궁금해하신다.”

“지금 바쁜데!”

“어허, 당장 나오지 못하겠냐!”

호즈만이 재촉했다. 아체리아는 뚱하니 볼을 부풀린 채 토그 브란슈를 고쳐 쓰고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겼다.

아체리아가 식당에 등장하자 손님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무척 다양한 시선들이었다. 왜 요리사가 이런 자리에 나오느냐는 것 같은 까다로운 눈빛에서부터, 대체 이게 무슨 요리인지 빨리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에 찬 눈빛까지.

‘헉, 대공 전하 옆에 누가 또 앉아 있네?’

대공의 옆에 앉을 만한 사람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 높은 사람이겠지. 아체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주빈들이 앉은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체리아 클링입니다.”

“네가 이 요리를 만든 요리사로군?”

“그렇습니다. 저…….”

이름표를 보고 은근슬쩍 아는 체를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앞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아체리아가 당황하자, 필리파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내 이름은 필리파다.”

“왕녀님이셔.”

에른스트가 부러 짓궂은 투로 속삭여 주었다. 긴장을 풀어 주려 한 것이었는데, 아체리아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맙소사, 왕녀라고?’

다른 귀족들이야 별반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그야 클라우스가 훨씬 신분이 높은 귀족이니까― 또한 에른스트까지도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다지만 왕녀라니!

‘왕족에게 이런 걸 대접했다고 내일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니겠지?’

차마 준비했던 재료가 엉망이 되어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것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체리아가 드물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고소했는지, 클라우스가 평소보다 더 능글맞은 태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뭐 하고 있어, 평소에 네가 잘하던 거 있잖아?”

‘이 얄미운 인간.’

아체리아의 입술이 실룩였다.

“평소에 잘하던 것이라니?”

필리파 왕녀가 아체리아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무기질해서, 아체리아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왕족들은 다 이런가?’

“전하, 아체리아는 항상 음식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답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고, 어떻게 요리한 음식인지 알려 주지요. 무척 재미있습니다.”

릴리엇이 말했다. 아체리아를 도와주려고 그러는 것인지, 한껏 꾸며 낸 듯 과장된 목소리였다.

“해 보아라.”

필리파가 말했다.

그 순간, 아체리아는 더 이상 이 연회의 주인이 클라우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수하면 경연이고 뭐고 없다는 것을, 이 무심하고 수수해 보이는 왕녀의 심기를 거슬려 봐야 전혀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 주빈들의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오늘 이 요리들은 사실…….”

아체리아가 드디어 입을 열자, 식당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제가 처음에 계획했던 요리들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던지라, 급히 조리 방법을 바꾼 메뉴들입니다.”

“사고?”

“…….”

클라우스가 되물었지만, 아체리아는 그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주방에서 벌어진 그 일을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요리가 뭔지 궁금하구나.”

필리파가 다시 말했다.

“요리의 이름이 뭐지?”

“이 요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전하.”

술렁이는 듯한 소곤거림이 한차례 식당을 휘돌고 지나갔다. 필리파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빛을 빛냈다.

“이름이 없다? 그럼 네가 개발한 요리란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리 문헌에 보면, 고대 사람들이 이 요리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은 기록이 있습니다. ‘플라센타’라고 하는 요리로, 고대의 사람들은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 위에 꿀이나 올리브, 허브 등을 얹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요리는 거기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재료에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절반은 해물, 절반은 연한 쇠고기를 중심으로 갖가지 채소를 얹고, 소스를 각각 다르게 발라 치즈를 얹어 화덕에서 구워 내었습니다.”

“먹는 방법은?”

“딱히 없습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셔도 좋고, 아니면 손을 쓰셔도 됩니다.”

몇몇 귀족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평민들도 하지 않는 짓이다.

“손을 사용하는 건 좀 야만적인 것 같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아체리아.”

클라우스가 주의를 주듯 아체리아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필리파는 여전히 흥미로운 기색인 채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아라.”

아체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클라우스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말했다.

“나라마다 음식을 대하는 습관이나 문화가 각각 다릅니다. 동쪽의 어떤 나라에서는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하나의 예절이기도 하지요.”

“그렇지.”

“또한 북부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가짓수의 식기만을 사용해 식사를 합니다. 근방의 다른 나라들만 하더라도, 테이블 예절이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니 손으로 먹어도 상관이 없다?”

“네. 그렇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요리입니다.”

“재미있구나.”

필리파 왕녀의 말에 아체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왕족 앞에서 손으로 음식을 먹으라 운운한다며 노발대발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분주히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아체리아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 요리, 맛있네!”

릴리엇이 말했다. 아체리아가 플라센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바로 그 요리를 먹고 튀어나온 감탄사였다.

달콤한가 하면 알싸한 향신료의 맛이 치고 들어오는 소스와 연한 쇠고기, 그리고 화덕 안에서 너무 무르지 않게 익은 채소의 아삭아삭함이 신기하게도 잘 어울렸다.

“치즈가 들어가서 부드럽군. 게다가 치즈도 각각 다른 것을 사용했고.”

페터가 아는 척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해물이 들어간 쪽에는 보다 향미가 강한 치즈를, 그리고 고기가 들어간 쪽에는 향은 부드럽되 짭조름한 치즈를 넣어 균형을 맞추었다.

주방으로 돌아가던 아체리아는 로널드 락케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아체리아의 목을 조를 것만큼이나 흉흉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그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불쌍한 요아킴을 괴롭혀서, 요리 재료를 망치는 비열한 짓을 잘도 했더군요.”

락케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아체리아가 말했다.

“뭐, 뭐가 어째?”

“내가 입 다물고 있다고 모를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그리고 미안하지만, 오늘 승리는 내 것이 될 거예요.”

“그걸 네가 무슨 수로 장담해!”

“두고 보면 알겠죠.”

쐐기를 박듯 말한 아체리아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락케를 남긴 채 쌩하니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걸 만든 다른 요리사의 설명도 들어 볼까. 공정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겠지.”

혼이 나간 얼굴로 주방에 서 있던 락케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녀가 찾는다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 오늘, 오늘의 메뉴는, 그러니까…… 포도주와 토마토, 그리고 소의 지방을 배합해 만든 소스를 끼얹은 송아지 요리입니다. 그리고, 저…… 아, 그렇지. 수프는…….”

락케는 사람들이 수군거릴 정도로 시뻘게진 얼굴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신이 만든 요리를 설명했다. 그러나 아체리아의 것만큼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지는 못하는 듯했다.

락케의 요리는 계속 순서대로 서빙되었지만, 손님들은 천천히 기다려야 하는 요리보다 아체리아가 내놓은 것을 자유로이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

개중 깐깐한 이들은 아체리아의 요리에 손도 대지 않고 충실하게 순서대로 나오는 요리를 먹기도 했으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건 치워 주게. 이젠 배가 부르거든.”

급기야 락케의 메인 요리가 서빙이 될 때쯤에는 이미 식사를 마친 사람들까지 속출하기 시작했다.

손도 대지 않은 채 주방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요리를 보는 락케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와 함께 요리를 만들었던 요리사들은 뭐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락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저, 락케 씨…….”

“뭐야!”

“아니, 저기. 디저트를…….”

“빌어먹을! 저 교활한 계집애가 저런 수를 쓰는 동안 네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졸지에 그의 화풀이를 뒤집어쓴 바키와 듀켄이 불만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이라고 아체리아가 그런 임기응변을 떠올릴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로널드 락케는 마지막으로 서빙되어야 할 디저트를 만들 생각도 못 한 채 씨근덕거리며 주방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다른 요리사들 역시 락케의 불같은 성질을 감당하고 싶진 않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도무지 요리사라고 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체리아와 프레드, 도미닉과 루디가 모인 주방은 한순간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디저트를 만들 재료 역시 엉망이 되었기에, 처음 계획했던 대로 차갑고 산뜻한 허브 수프에 아이스크림을 띄운 것은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아체리아는 새로운 디저트를 생각해 내었다. 장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면서, 입 안을 개운하게 가시게 해 줄 만한…….

“아체리아, 정말 이런 디저트로 괜찮을까?”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잖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