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9)화 (29/144)

29화

연회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연회 당일에는 주방을 둘로 나누어 사용하기로 했다. 공작저에는 메인 주방 이외에 그보다 규모가 조금 작은 주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지만 식구가 적어진 이후 요리사의 수도 줄이면서 사용하지 않게 된 공간이었다.

로널드 락케는 아체리아와 함께하는 요리사들의 수가 적으니 그들이 작은 주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 락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프레드는 그와 싸울 기세로 대거리를 해 댔지만, 아체리아는 별말 없이 락케의 말을 수긍했다.

“좋아요. 우리가 저쪽 주방을 쓰도록 하죠. 그 대신.”

요리사들이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연회 당일에는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로의 주방을 침범하지 않기로 해요.”

“흥, 그야 당연하지.”

락케는 요아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요아킴은 아체리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체리아는 평소 공작저에 음식을 배달하는 이들에게서 재료를 사는 대신, 직접 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물건을 발주할 업자들을 찾아내었다. 채소와 고기에서부터 생선, 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료의 주문을 마치고 나자 연회는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코스 준비는 이걸로 된 거지?”

재료를 다듬던 프레드가 묻자, 아체리아는 수첩을 넘겨 가며 점검을 마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피타이저부터 순서대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끝냈어요.”

“그런데 어떻게 승부를 낸다는 거야? 설마 두 접시를 한꺼번에 서빙하는 건 아니지?”

“한꺼번에 서빙할 거예요. 그리고 손님들의 반응이 더 좋은 쪽을 우승자로 할 거라고 공작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만찬은 경연 형식이라는 걸 미리 알리고요.”

“저쪽에서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데, 이렇게 대비를 안 해도 괜찮겠어?”

의심이 많은 성격인 도미닉이 요아킴을 힐끔 노려보았다. 아체리아는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며 요아킴을 감싸듯 그의 앞을 가리고 섰다.

“괜찮아요. 저쪽도 자존심이 있는 요리사들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비열한 짓을 하겠어요?”

아체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요아킴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요아킴은 아체리아가 재료를 받을 새 업자들을 구했다는 것을 락케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당초 업자들을 포섭해 아체리아에게 불리한 환경을 만들려던 락케는 계획이 틀어지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담배를 뻑뻑 피웠다.

‘좋아. 그럼 요아킴 네가 재료를 다 망쳐 버려.’

‘……네?’

‘뭐가 ‘네’야?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아예 요리가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란 말이야. 어차피 증거도 없잖아. 누가 그랬는지.’

‘하, 하지만 프레드 씨나 도미닉 씨는 계속 저를 의심하고 있는데…….’

‘이 머저리야. 내가 널 거기에 들여보낸 게 그 계집애랑 희희낙락거리라고 보내 준 건 줄 알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너 하나 정도 발가벗겨 쫓아내는 건 나한테 일도 아냐.’

락케는 험악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공작저의 집사들 몇몇과 친분이 있었다. 집사장인 호즈만은 감히 쏘삭대 볼 수 없겠지만, 견습 요리사인 요아킴 따위야 호즈만의 귀에 들어가기도 전에 집사들의 선에서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락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든 없든, 요아킴에게는 발가벗겨 쫓아낸다는 말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공작저의 요리사 출신이라지만 견습인지라 사실상 경력도 없는 데다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락케가 알고 지내는 요리사들 사이에 무슨 소문을 퍼뜨릴지 몰랐다.

만약 주인의 음식에 손을 댔다거나, 아니면 도둑질을 했다는 소문 같은 것이 돌면 앞으로 일자리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부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사는 어린 요아킴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두렵고 막막했다.

‘하지만…….’

요아킴은 락케나 바키, 듀켄과는 달리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적어도 아체리아가 자신을 믿어 준 것, 그리고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호의를 무참하게 짓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의 가책이 느껴졌다.

“좋아, 끝났다!”

메인 요리 위에 끼얹을 소스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아체리아는 솥의 뚜껑을 닫고는 손을 탁탁, 털며 자신을 도와줄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체리아가 입을 열자, 네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절 도와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내일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러분이 절 도와주신 건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프레드와 다른 사람들은 머쓱하고 계면쩍은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요아킴만은 아체리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 * *

루뷘 왕을 마주한 필리파는 무릎을 굽히며 공손하게 절을 했다.

“아바마마.”

루뷘 왕은 모처럼 침대를 벗어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깔고 앉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달군 약초의 지독한 쓴내가 코를 찔렀다.

필리파는 장식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갈맷빛의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긴 회색의 천을 걸치고 있었다.

“가까이 오너라.”

왕이 말했다. 필리파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한 약의 냄새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무심하고도 덤덤한 태도로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보내 준 것은 잘 받았다.”

왕은 말을 하는 사이사이에 마른기침을 쿨룩거렸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살집이 두툼하게 오른 몸집이 괴롭게 들썩였다.

필리파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수포가 돋은 왕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시종을 시켜 미지근한 물을 가지고 오게 하고, 손수 그의 입에 물잔을 대어 주었다.

“아바마마, 기침병이 또 도지신 것 같습니다.”

“늘상 그렇지.”

왕이 물을 다 마시고 나자, 필리파는 타티아나에게 손수건을 가져오게 하여 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병으로 인해 얼룩덜룩하게 반점이 생긴 입가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필리파가 손수건을 움직일 때마다 흉하게 일그러지고 움찔거렸다.

“필리파.”

“네, 아바마마.”

“네…… 어미의 일은 내가 미안하게 생각한다.”

필리파의 감정 없는 눈이 조용히 깜빡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께서는 단지 운이 나쁘셨을 뿐입니다. 수명이 짧은 사람도, 긴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아바마마를 감히 원망한 적 없습니다.”

필리파의 어머니는 왕의 첩 중 한 명이었지만 그리 많은 사랑은 받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왕은 그녀의 피부가 너무 가무잡잡하고 다리에는 흉터가 있다며 질색을 했다.

그때만 해도 누구나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첩과 정부들이 왕궁을 꽉 채우고 있을 때라, 미모가 남다르지 못했던 필리파의 어머니는 왕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라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빼어난 미모는 가지지 못했을지언정 머리만큼은 비상했다. 다른 첩이나 정부들이 아름다움으로 왕을 홀릴 때, 필리파의 어머니는 왕을 솔깃하게 할 만한 지략으로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왕이 그녀를 총애하기 시작하자, 왕의 다른 첩들은 질투의 화살을 모조리 그녀에게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 암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첫딸 필리파를 지켜 냈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째 아이는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즈음에는 설상가상으로 왕의 관심이 그녀로부터 멀어진 때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은 사고였습니다.”

필리파가 말했다. 그러나 루뷘 왕은 그것이 필리파의 진심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필리파의 어머니는 암살을 당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주도면밀했던 그녀가 그때는 왜 그렇게 방심을 했는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아이가 사산된 후 상심한 탓이리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왕은 필리파의 어머니가 몇 번이고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왔다. 자신이 그 무렵 총애하고 있던 정부가 필리파의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그녀에 대한 험담을 속살거리는 정부의 목소리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필리파.”

“예, 아바마마.”

“나는 분명 너를 총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의 속내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네가 항상 나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또한 기특하게 여기는 바이다.”

필리파는 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만 숙였다.

“에른스트…… 에른스트와 클라우스 비스몽트 공작을 네 편으로 만들어라.”

“에른스트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네 사촌 말이다. 그리고 비스몽트 공작…… 지금의 그가 몸은 유약할지언정, 공작가의 이름마저 유약해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 그를 만나라. 만나서…….”

왕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기침이 안에서 걸린 것이다. 시종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는 동안, 필리파는 시뻘겋게 열이 오른 왕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쿨룩! 쿨룩…….”

“오늘은 말씀을 이만하시고 쉬시지요. 옥체를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아바마마께서 하신 말씀은 새겨듣겠습니다.”

“꼭 만나야 한다. 그러면 너에게…… 쿨룩! 콜록!”

“아바마마를 모셔라.”

필리파가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뼛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에, 시종들은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움직였다.

절을 올리고 왕의 침실을 벗어난 필리파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으며 한마디 말이 없었다.

“왕녀님,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비스몽트 공작을 만나실 건가요? 그러실 거라면 제가 궁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아니, 초대는 나중으로 미룬다. 그가 대관절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 다음에 말이야.”

타티아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필리파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초청을 받아 궁에 온 귀족들은 하나같이 쓸모 있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러 오지. 그런 준비는 필요 없다.”

자신의 방에 다다른 필리파는 궁인을 시켜 깨끗한 물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그 물에 손을 씻기 시작했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거칠게 문지르는 필리파의 몸짓을 바라보던 타티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왕녀님께서 공작저를 찾아가실 예정이신가요?”

“듣자 하니 오늘 거기서 연회가 있다더구나. 초대장을 한 장 구해 오너라. 적당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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