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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8)화 (28/144)

28화

연회 만찬을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요리사들은 아체리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뉘었는데, 아체리아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을 제외한 다른 요리사들은 자연스럽게 락케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그의 편에 붙었다.

그들도 아체리아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기꺼워하지 않는 마음, 혹은 그녀가 연회를 준비해 본 적은 없으니 이번엔 불리할 것이라는 논리, 마지막으로는 로널드 락케의 선동에 넘어간 것 등 이유도 다양하게 아체리아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 뜻밖인 점이 있었다면 요아킴의 등장이었다. 프레드를 포함한 다른 요리사들은 요아킴이 분명 락케의 사주를 받고 왔을 거라 말했지만 아체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얀 헨릭도 말했잖아요. 요아킴이 저쪽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해 내게 왔다면, 전 요아킴에게 요리를 맡길 거예요.”

프레드는 내내 툴툴거렸지만 끝내 요아킴을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못했다.

‘이 일을 잘만 해내면 나도 락케 씨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락케 씨가 이기면…… 나도 승진을 할 수 있을 거고. 이제 견습 딱지를 떼는 거라고. 더 이상 잔심부름이나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요아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요아킴은 아체리아의 목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듯이 일어났다.

“아, 아체리아 씨.”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어, 음. 그게요, 저기…….”

“힘들지?”

아체리아의 느닷없는 말에 요아킴의 눈이 둥그레졌다.

“……예?”

“견습으로 일하는 거 말이야. 나도 어릴 때는 너무 힘들어서 얀 헨릭에게 찡찡거리곤 했거든. 난 요리를 하고 싶은 거지, 잔심부름이나 설거지나 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그러니 너도 힘들 거라 생각해.”

요아킴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한 쇼콜라를 두 잔 만들어 한 잔을 요아킴에게 주고는, 다른 한 잔은 은으로 된 쟁반 위에 올렸다. 아마도 클라우스에게 가져다주려는 것 같았다.

“프레드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마. 네가 날 도우면서 요리를 하고 싶다고 온 이상, 난 너를 믿고 같이 일할 거니까. 알겠지, 요아킴?”

“……읏, 네.”

기운 내. 아체리아는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쇼콜라를 가지고 주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요아킴이 멍하니 쇼콜라를 한 모금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로널드 락케와 바키, 그리고 듀켄이 투덜대면서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뭐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로널드 락케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요아킴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요아킴의 어리둥절한 얼굴에서부터 손에 들려 있는 쇼콜라 잔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방금 전 아체리아가 쇼콜라 한 잔을 든 채 나가는 것을 본 참이다. 락케는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요아킴에게로 건들대며 다가왔다.

“뭐야, 요아킴. 너 설마 저 계집애랑 친해지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네? 아, 아니…….”

“아냐? 아닌데 이따위 것이나 얻어 마시면서 실실대고 있는 거야?”

“실실대지 않았…….”

“어디서 말대꾸야!”

락케가 잔을 든 요아킴의 손을 세차게 후려쳤다. 따뜻하게 데워진 쇼콜라가 요아킴의 손등을 지나 바닥에 와장창 쏟아졌다. 락케는 그것이 고소하다는 듯 비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요아킴의 미간을 쿡쿡, 찍었다.

“이런 들쩍지근한 거나 얻어 마시면서 실실대고 있으니까 네놈이 밑바닥을 못 벗어나는 거야. 이 한심한 놈아.”

그렇잖아도 연회를 앞두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던 로널드 락케에게 요아킴은 만만하고 쉬운 먹잇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실컷 화풀이를 하고 난 락케가 만족했다는 듯이 물러서자, 이번에는 바키와 듀켄이 다가와 요아킴의 머리를 손끝으로 이리저리 밀어 댔다.

“똑바로 좀 해라, 요아킴.”

“그래, 똑바로 좀 해라. 락케 씨 실망시키지 말고 말이야. 어? 앞으로 설거지라도 계속 하고 싶으면 잘 해야지.”

“그렇지, 네 녀석은 아마 수석 설거지장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세 사람은 왁자하게 웃으면서 엎어진 쇼콜라를 척척 밟으며 뒤뜰로 나가 버렸다. 아마도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것이겠지.

얀 헨릭은 요리사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었다. 아체리아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혼자 남은 요아킴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바닥에 쏟아진 쇼콜라를 내려다보았다. 두들겨 맞지 않은 것도 어디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갑자기 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네 녀석은 아마 수석 설거지장 같은 게 되지 않을까?’

듀켄의 빈정거림이 마음속을 쿡, 찌르는 것 같다. 요아킴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지저분해진 주방 바닥을 치웠다.

* * *

아체리아는 쇼콜라에 담백한 크림을 넣으면서 클라우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왕성에 다녀온 뒤로, 그는 지금처럼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늘상 그러는 것처럼 책을 펴 놓고 읽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골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체리아는 곧 어깨를 으쓱거리며 생각을 떨쳐 냈다.

‘뭐, 나하고 상관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녀는 완성된 쇼콜라를 클라우스의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단내가 피어오르자,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들렸다.

“이게 뭐야?”

“쇼콜라입니다, 공작님.”

“난 단 거 안 먹어.”

“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민이 있으실 때는 쇼콜라를 드시는 게 좋아요. 머리가 좀 개운해지거든요.”

“고민이라고?”

클라우스가 몸을 돌려 아체리아를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내가 고민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그야 보면 알죠.”

아체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왕성에 다녀오신 뒤로 계속 고민이 있으신 거 아니셨나요?”

“보기만 해서 그걸 알아?”

“그럼요. 상대방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당연히 알 수 있지요.”

그러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찡그려졌다.

“……관심을 기울여?”

짚고 넘어가자면, 아체리아가 말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식사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입맛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어딘가 아파 보이지는 않는지…… 그런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해서 메뉴를 준비해야 하는 상대가 바로 클라우스였다.

하지만 이 순간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말을 약간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 아체리아가 들었더라면 ‘약간 오해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있다고?’

“그러니 쇼콜라를 드세요. 위통이 생기지 않도록 연하게 끓인 것이니 드셔도 괜찮습니다.”

클라우스는 달착지근한 냄새가 나는 잔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받아 들었다. 그가 순순히 음식을 받아먹는 것처럼 아체리아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아체리아가 붉은 입꼬리를 당겨 활짝 웃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왜 웃어?”

“그야 기분이 좋으니까요.”

“기분이 왜 좋은데?”

“공작님께서 제가 만든 것을 드셔 주시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지요.”

이것 역시 아체리아의 입장에서는 ‘내 목표는 널 먹여서 포동포동 살찌우는 것이니까’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그 말은 클라우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약간 붉어진 귓불을 한 채 쇼콜라를 내려다보던 클라우스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몸을 슬쩍 돌렸다.

“시건방진 소리나 하고.”

“어머, 요리사로서 당연한 말이지요.”

막 쇼콜라 한 모금을 입에 대려던 클라우스가 고개를 휙 들었다.

“‘요리사로서’라고?”

아체리아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클라우스의 신경을 더욱 긁는다는 것도 당연히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저는 이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으로 공작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공작님께서 제가 만든 것을 맛있게 드셔 주시는 일은 기분 좋은 것이죠.”

“그것뿐인가?”

“네?”

아체리아의 눈이 어리둥절하게 깜빡였다.

“네 기분이 좋은 이유가, 내가 이걸.”

클라우스가 쇼콜라 잔을 슥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주는 대로 마시니까, 요리사로서 기분이 좋은 것뿐이냐고.”

“그럼 다른 이유가 있나요?”

탕!

별안간 클라우스가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쇼콜라가 찻잔 밖으로 몇 방울 튀었다.

“가지고 나가.”

“네? 아니, 공작님. 방금 전에는…….”

“됐으니까 가지고 나가라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체리아는 한 번 더 권해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얌전히 잔을 끌어다 다시 쟁반 위에 얹었다.

“다른 차를 가져다 드릴…….”

“됐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그만 나가.”

돌아오는 목소리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아체리아는 샐쭉한 얼굴로 입술을 한 번 실룩이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 채 방을 나갔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그 미련 없는 태도에 또 한 번 신경질이 났지만 뭐라고 화풀이를 할 상대도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이런 일로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자기 자신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직면하면 사람은 두 배, 세 배로 화가 나는 법이다. 그가 책상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치자, 바깥에 있던 호즈만 집사가 놀라서 달려 들어왔다.

“공작님, 무슨 일…….”

“나가.”

호즈만은 어깨를 움찔하고는 눈치를 살피며 곧 물러났다.

클라우스는 자꾸만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아체리아의 붉은 머리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지금도 눈앞에서 살랑대며 흔들리는 듯한 붉은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마치 타오르는 노을처럼 자꾸만 클라우스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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