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체리아.”
만찬의 뒷정리가 끝난 후, 요리사 중 한 명인 프레드가 아체리아를 불러 세웠다.
“왜요, 프레드?”
“잠깐 할 얘기가 있어.”
프레드가 고개를 까딱까딱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 뒤통수에 실을 매달아 잡아당기는 것처럼 이상한 몸짓이었다.
그가 아체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뒤뜰의 텃밭을 살짝 벗어난, 마구간 근처였다.
“왜 그래요?”
“너, 락케 씨와 하는 그거…… 말이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 계획은 있어?”
아체리아의 미간이 약간 좁혀졌다. 프레드는 아체리아보다 열 살가량 많은 인물로, 주방에서 일한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 승진은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아체리아를 달가워하지 않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건 왜요?”
“너, 연회에 나갈 요리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나를 도와준다고요?”
아체리아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곧 솔직하게 질문했다.
“왜요?”
“난 락케 씨가 싫으니까.”
프레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아체리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로널드 락케를 더 싫어했다. 주방의 요리사들을 제 종 부리듯 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락케가 만약 아체리아를 제치고 수석 요리장이 된다면? 주방 꼴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난 솔직히 네가 수석 요리장이 된 게 반갑지만은 않아.”
“나도 알아요.”
“하지만 락케 씨가 수석 요리장이 되는 건 더 반갑지 않은 일이지. 나라면 아마 한 달도 못 버티고 일을 때려치우고 싶어질걸. 분명 자기에게 아첨하는 놈들만 싸고돌 테니까. 바키나 듀켄 같은 놈들도 나하고는 안 맞아. 그러니 차라리 너를 돕겠어.”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말이었다. 이러니 오밤중에 이런 곳까지 날 끌고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아체리아가 말했다.
“프레드가 도와준다면 나야 고맙죠.”
“좋아. 나 말고도 도미닉과 루디가 널 돕기로 했어. 네가 실력 있는 요리사라는 건 우리도 인정하는 바야. 바키나 듀켄 같은 녀석들은 아부나 할 줄 알지, 솔직히 실력은 우리만 못해. 너도 알지?”
“그럼요, 알죠.”
“그럼 우린 한 팀이 되는 거야.”
“고마워요.”
아체리아가 한 손을 불쑥 내밀자, 프레드는 어색하게 그 손을 맞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때였다.
“클링!”
별안간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체리아와 프레드는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아체리아를 부른 것은 클라우스였다.
“거기서 뭐 하시는…….”
“올라와.”
“네?”
“못 들었나? 올라오라고.”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쾅,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아 버렸다.
“왜 저러시지?”
“전들 알겠어요?”
“올라가 봐. 그리고, 연회 요리에 뭘 내놓을지 내일 같이 상의해 보자고. 이 시간에, 여기서.”
“알겠어요, 프레드. 잘 자요.”
프레드와 헤어진 아체리아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중앙 계단이 아닌,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곁문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느라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렸다.
클라우스가 창밖으로 아체리아를 내다본 곳은 그의 침실과 마주하고 있는 응접실이었다. 아체리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소파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다가 삐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뭐 하고 있었어?”
아체리아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잖아도 계단을 올라오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건 무슨 뜬금없는 추궁이지?
“뭘 하고 있었냐니요?”
“그 아래에서 말이야. 둘이 뭐 하고 있었냐고.”
“그냥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무슨 이야기?”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심술이 났담.’
“얼마 뒤에 있을 연회 요리에 대한 이야기요. 저를 도와주려는 요리사들이 많이 없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절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클라우스는 그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왜 아체리아의 말을 의심하고 있으며 굳이 이런 일에 끼어들 건 또 뭐냐는 생각에 혼자서 소스라쳤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른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배고파.”
문을 가리키며 나가려는 시늉을 하던 아체리아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네?”
“……배고프다고. 그러니 뭘 좀 만들어.”
지금, ‘배고프다’고 하고 있는 게 맞나?
클라우스 비스몽트 공작이, ‘배가 고프니 먹을 걸 달라’고 하는 게 현실인가?
“배가…… 고프시다고요, 공작님?”
“그렇다니까.”
“그러니 뭔가 드셔야 하신다고요.”
클라우스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니까, 뭐 하자는 거야?”
실상, 그가 부리는 짜증이란 속을 들킨 것 같은 뜨끔함을 숨기려는 용도 이상은 되지 못했다. 아체리아가 그의 속내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당장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뭔가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체리아가 반기며 물었다. 클라우스의 속은 알 길도 없이, 아체리아는 오로지 그를 먹이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렇잖은가. 클라우스가 ‘배고프다’고 하는 소리를 듣는 건 전설의 생물이라는 인어가 노래하는 걸 듣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경험이니까!
“적당히 따뜻한 걸로 만들어 와.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걸로.”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기다려.”
막 나가려는 아체리아를 불러 세운 클라우스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 * *
딱, 딱.
불을 밝혀 두어 환하고 고요한 방 안에, 이따금 무기질한 마찰음이 은은하게 울렸다.
베르데사 왕궁의 동쪽, 왕비와 왕녀들이 거처하는 이곳은 ‘새들의 궁’이라는 별명답게 어디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예로부터 왕비나 왕녀들의 고상한 기품이 날아다니는 새도 길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방, 동쪽 궁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 이곳만큼은 새소리는커녕 인기척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거처하는 사람이 바로, 베르데사의 7왕녀인 필리파 하르모네 레이넌이다.
“타냐.”
여성스러움보다는 엄숙함이 먼저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에, 창가에 서 있던 시녀가 필리파의 곁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왕녀님.”
“아바마마의 병세는 어떠시지?”
필리파는 그렇게 물으며 다른 하나의 체스 말을 딱,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필리파는 혼자서 흰색 폰을 집어내고는, 이어서 다시 말을 움직여 이번에는 흑색의 나이트를 집어냈다.
“약초를 잘 안다는 치료사들이 지방에서 올라와 치료를 했다고는 합니다만, 차도가 있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작 풀줄기 정도로 치유되실 병이었다면 그토록 앓지도 않으셨겠지……. 여봐라.”
필리파가 고개를 돌리자, 앳된 얼굴의 궁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서북쪽에서 왔다는 상인이 진상한 약초 말린 것이 남아 있느냐?”
“예, 왕녀님. 아직 서너 뭇이 남았습니다.”
“모두 아바마마께 보내라. 아낌없이 쓰시고, 효험이 있거든 내가 또 구해 드리겠노라는 말도 잊지 말고 전하고.”
“잘 알겠습니다.”
궁인이 이내 물러가자, 필리파는 지루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다시 혼자서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녀인 타냐, 본명이 타티아나인 여자는 한미한 백작가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왕녀의 시녀가 되기를 원해 백방으로 돌아다녔지만, 결국 그녀는 많은 왕녀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적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필리파의 시녀로 낙점되었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실망했지만, 타티아나는 필리파의 시녀가 된 것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필리파가 뭇 사람들이 일컫는 것처럼 조용하고 얌전하기만 한 왕녀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지.’
심드렁한 얼굴로 체스 말을 움직이고 있는 필리파를 내려다보며 타티아나가 생각했다.
필리파는 다른 왕녀들처럼 화려한 치장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교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얼굴을 비치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도 보라. 이렇다 할 자수도 없이 흰 비단으로만 만든 나이트 로브에, 장식도 달지 않은 검은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리파는 외모 역시 그리 아름다운 편이 못 되었다. 둥글고 높은 이마며 살짝 솟아오른 콧대가 이지적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새카만 눈동자나 여위다시피 가느다란 턱선 같은 것은 왕녀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을 모시는 사제처럼 정적이고 엄격한 인상을 주었다.
“아바마마의 병환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로구나.”
그렇게 말하는 필리파의 표정은 지나가던 개가 죽은 것을 보는 것보다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왕녀님, 조만간 폐하를 배알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바마마를?”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녀님께서 폐하의 병환을 얼마나 마음 깊이 걱정하시는지, 폐하께서 아실 수 있도록요.”
“아바마마께서는 내 마음을 아실 것이다. 내가 비록 적자인 왕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가 아니시냐.”
딱,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필리파는 무심한 얼굴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흑색 킹을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가느다란 손끝이 킹의 왕관 위에 무게도 없이 톡, 얹혔다.
“아바마마의 건강만을 이토록 바라 마지않는 자식이 하나쯤 있다는 걸 알려 드리는 것도 자식 된 도리겠지.”
필리파의 손끝이 킹을 소리 없이 밀어냈다. 묵직한 말이 기울어지다가 옆으로 툭 쓰러졌다.
그것을 보는 필리파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