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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6)화 (26/144)

26화

베르데사의 왕궁은 다른 나라의 왕궁에 비해 다소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보통의 왕궁이 드넓은 뜰 위에 탁 트인 채 지어지는 데에 반해, 베르데사의 왕궁은 절반이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지어져 있는 형태였다.

왕이 머무는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궁으로, 옛날에는 신과 가까운 곳이라 하여 ‘빛의 궁’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국교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그런 이름으로 호칭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경사면을 오르느라 기울어진 마차가 덜걱거리며 달리는 동안, 클라우스는 내내 멀미를 했다. 어지럽고 띵한 머리를 몇 번이나 꾹꾹, 누르고서야 비로소 마차가 멈추었다.

‘이걸 내려갈 때 또 겪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피곤해.’

클라우스가 왕궁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이유는 사교계 활동을 하는 것이 이래저래 그의 건강 상태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의 이 괴상한 구조 역시, 그가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왕궁을 멀리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눈부셔.”

클라우스는 불평하듯이 중얼거리면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전쟁이 난무하던 시절을 수놓은 태피스트리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회랑에 이르자 비로소 어질어질하던 느낌이 가셨다.

“19대 비스몽트 공작, 클라우스 브라운슈바이첸 폰 비스몽트 공작!”

왕의 침실 앞에 다다르자 의전장관이 안쪽을 향해 방문자의 신분을 고했다.

문이 열린 순간, 클라우스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그만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왕의 방 안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수상쩍게 생긴 자들이 베일을 쓴 채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고 있었다.

“어서 와라.”

왕은 욕조처럼 생긴 도자 안에 몸을 반만 잠근 채 탁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맞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클라우스가 절을 하자, 왕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시중을 드는 시종 한 사람만을 남기고 나머지가 모조리 옆방으로 물러났다.

“가까이 와라. 냄새가 지독하겠지만.”

클라우스는 다시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왕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보니, 도자 안에 가득 찬 것은 김이 풀풀 피어오르는 마른 풀이었다. 가득한 악취는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폐하, 대관절…….”

이 빌어먹을 것들이 도대체 뭐냐. 자신의 저택이었다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왕의 앞인지라 클라우스는 자연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약초를 뜨겁게 해서 몸을 잠그고 있으면 병이 낫는다기에 한번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이다만, 코가 떨어질 것 같은 냄새가 나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루뷘 왕 역시 표정이 밝지는 못했다. 하기야, 코가 달려 있는 인간이라면 누군들 이 냄새 속에서 온전할 수 있을까 싶었다. 클라우스는 최대한 입으로만 숨을 쉬려 애쓰면서 열기를 내뿜는 풀 밖으로 드러난 왕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살갗은 팽팽하게 부풀어 도통 부기가 가시지 않는 것 같았고, 어깻죽지며 상완에 이르기까지 수포가 돋아 있었다. 시종은 수포 위에 풀을 으깬 듯한 축축한 것을 발라 주고 있는 중이었는데, 건드릴 때마다 루뷘의 입에서는 낮은 침음성이 흘렀다.

“이렇게 맞아 미안하게 되었다.”

왕의 말에 클라우스는 느릿한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황공한 말씀입니다, 폐하. 레이넌의 대공께서 말하기를, 폐하께서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래. 내가 에른스트에게 말을 전하라 했지. 그렇지 않으면 너 스스로는 내 살아생전 궁을 찾을 일이 결코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루뷘은 그 와중에도 가래 끓는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농담을 했다.

“성체가 편찮으신데 귀찮은 일을 더해 드리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는 걸 안다만 듣기는 좋구나. 오늘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그저 얼굴을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의 백성으로서 따르겠습니다.”

클라우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뷘 왕은 잠시 말을 멈춘 채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체격이 좋은 남자들에 비하면 야위다시피 한 모습이지만, 파리하고 날카로운 생김새는 성격이 강하던 그의 외조부를 많이 닮았다.

클라우스의 외조부인 17대 비스몽트 공작은 완고한 보수파로, 그간 베르데사 왕국의 보수 세력의 강력한 중심 세력이 되어 주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비스몽트 공작가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클라우스의 부친인 18대 비스몽트 공작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구심점을 잃은 베르데사의 보수 세력은 빠르게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며 혼란한 시기를 겪었고, 그 결과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루뷘 왕은 통치 기간 내내 진보파의 세력을 꺾고 균형을 맞추느라 고생깨나 해야 했다.

다른 왕족들에게는 어느 한 세력에 치우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도, 왕인 자신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루뷘 왕이 말년에 저지른 최대의 실수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

“네가 에른스트와 시드레의 혼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역시.

왕이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클라우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 짐작했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대공 전하의 혼사에 제가 관여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공작이다. 그것도 비스몽트 공작이지. 이 나라에서 비스몽트라는 이름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시드레와 에른스트의 혼인을 그토록 고집하는가, 그것이 궁금한 거냐?”

이 혼사에 어째서 자신이 나서야 하는가, 그것이 더 궁금했지만 클라우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루뷘 왕은 말을 끊은 채 시종의 도움을 받아 바깥으로 나왔다. 퉁퉁 부어올라 건강할 적보다 훨씬 비대해진 몸집이지만, 활기차게 걷기는커녕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시종은 그에게 로브를 걸쳐 준 뒤 욕조를 치워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방 안에는 루뷘과 클라우스, 둘만이 남았다.

“답은 간단하면서도, 또 그리 간단치가 않다.”

“…….”

“모두가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클라우스, 너도 잘 알 것이다.”

“당치 않습니다, 폐하.”

“아니, 그런 분위기만큼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항상 나를 향해 칼을 겨눈 자들이 빼곡히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네 생각에는 누가 가장 그 칼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을 것 같으냐?”

클라우스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루뷘 왕이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말해 봐라, 괜찮으니.”

“폐하, 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세력의 저울이 기울어지는 데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으니, 제게 무슨 하명을 하시든지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빠진 녀석. 루뷘 왕은 클라우스를 향해 딱하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국의 공작이라는 짐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도 유약한 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기탄없이 이야기하마.”

“듣겠습니다.”

“다음 대 왕위를 놓고 내 자식 놈들이 서로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는 너라도 잘 알 것이다. 그중, 가장 위험한 녀석들이 바로 3왕자와 5왕자다. 나머지 녀석들도 각자 마음에 품은 뜻은 있겠지만 그래 봐야 어중이떠중이, 나의 적자인 엘로리스는 일찍이 외국의 대공비가 되었으니 이제 와서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엘로리스는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녀였다. 루뷘 왕에게 앞날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기질이 조금만 있었던들, 하나밖에 없는 적녀를 그렇게 일찍 결혼시키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의 통치가 이토록 빨리 끝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3왕자 벨란과 5왕자 이볼드는 포악한 녀석들이다. 얼마든지 제 형제들을 잡아먹을 수 있지. 그러나…… 군주가 될 만한 그릇은 못 된다. 그건 아비인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렇다면…… 폐하의 의중은 다른 왕자님께로 향해 있으시다는 겁니까?”

“내가 다음 대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이는 필리파 왕녀다.”

필리파 왕녀?

어전이건만, 너무도 뜻밖인 말에 클라우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왕자들을 제쳐 두고 왕녀를 다음 대 군주의 재목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외였지만, 필리파 왕녀라면 너무 고지식하고 조용하여 사교계에도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인물이 아닌가?

“어째서 필리파 왕녀를…….”

“너마저도 알다시피 필리파는 현재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아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속을 몰라서 그런 것이지. 필리파는 누구보다 군주의 자리에 어울린다. 아마 직접 만나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대공 전하와 시드레 백작의 혼인을 추진하시려는 것도…….”

“나는 에른스트가 시드레 백작가와 결합하여 앞으로 필리파의 단단한 반석이 되어 주기를 원하느니라.”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필리파 왕녀라…… 필리파 왕녀를 다음 대 왕으로? 그러기 위해 에른스트뿐만이 아니라 보수파인 시드레 백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필리파 왕녀도 지금의 폐하와 같이 보수파를 지지한다는 것일 텐데.’

“이해하였을 텐데 왜 대답이 없느냐.”

“……폐하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너는 좀 더 공작으로서의 네 위치를 깨달을 필요가 있겠구나.”

루뷘 왕은 자리에 누운 채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옆방으로 물러갔던 시종들이 들어와 그의 침대를 보살피고, 비대한 몸을 천천히 누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클라우스는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축객령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클라우스, 네가 에른스트로 하여금 시드레 백작과 혼인할 것을 충고해 주거라. 너는 그 아이의 친우였으니, 너의 말이라면 그 아이는 내 말보다 소중히 아끼고 새겨들으리라.”

말을 마친 루뷘 왕은 그만 나가 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어전에서 물러난 클라우스는 오랜만에 두통이 오는 것을 느끼며 복도를 따라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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