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5)화 (25/144)

25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폐하께서 내게 무슨 말을 하실지 벌써부터 예상이 되는 것 같은데.”

클라우스가 말했다.

“널 설득해서 시드레와 결혼하도록 만들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신 것 같지 않아?”

“정말 그런 이야기라면 사람을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고른 거지. 하긴, 그런 판단력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태기는 해. 어쨌든 빠른 시일 내에 다녀오도록 해. 왕명이니까 어쩔 수 없어. 네가 왕궁 같은 데에 얼굴 비치는 걸 싫어하는 걸 알지만 나도 널 빼내 줄 방법이 없거든.”

에른스트가 유감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에른스트가 시드레와 결혼을 하려는 마음을 먹는 날이 오긴 올까?

* * *

로널드 락케의 기를 꺾어 놓으려 했던 일이 커지는 바람에, 아체리아는 비는 시간에도 시장 구경을 가거나 편히 쉬지 못하고 제 방에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연회라면 최소한 준비해야 하는 가짓수만 해도…… 혼자서는 무리지. 만약에 요리사들을 둘로 나눈다면 날 도와줄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껍게 저를 도와줄 만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체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굽슬굽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내 실수야. 사람들을 좀 더 살피고 챙기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는데.”

얀 헨릭은 무시무시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요리사들의 여러 가지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간 얀 헨릭의 그림자에 아체리아 자신조차도 의존해 오지 않았던가.

‘수석 요리장’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큰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아냐, 할 수 있어. 내가 누군데?”

아체리아는 무릎 위로 주먹을 꾹 쥐며 혼잣말을 했다.

“할 수 있어.”

그 시간, 로널드 락케는 바키와 듀켄, 요아킴을 모아 놓고 낄낄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체리아가 괜히 나서서 깝죽대다 망신을 당하게 생긴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부주방장님, 정말 잘됐지 않습니까? 고 건방진 것이 언젠간 부주방장님 손에 쥐 잡듯이 잡힐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요.”

“다른 요리사들도 모두 부주방장님을 도울 것 같더군요. 하긴, 그렇게 어린 여자애의 지휘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주방에는 다른 여자 요리사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아체리아를 껄끄럽게 여기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유는 단 하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여자라는 점까지 더해져 옹졸한 자들의 심기를 무진장 긁어 놓았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는 계집애다. 워낙 잔머리를 잘 굴리니까 말이야.”

로널드 락케가 교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요아킴.”

“네?”

“네 녀석이 아체리아 쪽에 붙어라.”

“……네?”

요아킴이 멍청하게 되묻자 락케가 그의 정수리를 퍽, 후려쳤다.

“멍청한 놈, ‘네?’는 무슨. 네가 그 시건방진 계집애 쪽에 붙어서 우리 쪽에 정보를 흘려 주란 말이다. 뭘 준비하는지, 재료는 어디서 구할 건지, 누가 돕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내 오라고. 알겠어?”

“아, 알겠어요. 저, 하지만 부주방장님…….”

“뭐야?”

“그, 그렇게 되면 아체리아는 저에게 뭘 안 맡기려고 할 것 같은데요. 저도 연회 요리를 만드는 걸 배우고 싶은데…….”

“흥, 네놈 같은 견습 요리사를 데리고 있어 봐야 별 도움이나 되겠냐고. 그런 데라도 이용해 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아마 아체리아도 네 녀석에게는 설거지나 시키고 싶어 할걸?”

듀켄이 비웃자 로널드 락케와 바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요아킴은 얻어맞은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이 상해서 입술이 절로 실룩거려졌다.

만찬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다. 아체리아가 앞치마를 두르며 주방으로 내려오자 구석에 모여 앉아 떠들고 있던 락케 패거리는 뻐기듯이 어깨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체리아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경연이 끝나면 그쪽이든 자신이든, 어느 한쪽은 영원히 입도 벙긋 못 하는 처지가 될 테니까.

그러나 로널드 락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벌써 아체리아를 다 이기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한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제 ‘수석’ 요리장님께서 그 앞치마를 입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체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락케를 돌아보았다. 다른 요리사들은 또다시 신경전이 시작되는가 싶어 눈치를 살폈다.

“연회라니, 아무래도 공작님께서 널 몹시 내쫓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연회용 요리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너에게 그런 걸 경연이랍시고 내놓으신 걸 보면 말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아체리아가 본격적으로 주방 일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연회라는 것이 거의 사라졌을 시기였다. 선대 비스몽트 공작이 죽은 후, 혼자 남은 비스몽트 공작 부인은 어리고 유약한 아들 하나만을 끼고 슬픔에 잠겨 살았다.

“락케.”

아체리아가 들었던 칼로 도마를 탕, 내리쳤다.

“떠들 시간이 있으면 이쪽으로 와서 일이나 해.”

이제는 경어를 쓸 생각조차 없는 아체리아의 태도에 로널드 락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듀켄이 아첨을 한답시고 락케를 거들고 나섰다.

“말버릇 하고는! 부주방장님은 너보다도 한참 경력이 많은 요리사인데 그 말버릇이 뭐야!”

“듀켄, 내가 아직도 당신 밑에서 칼질을 배우던 꼬마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때는 당신이 내 머리를 쥐어박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거든?”

아체리아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설령 이 주방에 있는 모든 요리사들이 전부 다 자신을 공격한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기색이었다.

칼을 쥔 채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주방을 둘러보는 아체리아의 기백에 아무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락케 패거리도 마찬가지였다. 드러내 놓고, 들으란 듯이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 아체리아. 요리할 때는 집중하는 거야.’

아체리아는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 일에 흔들리면 안 돼. 얀 헨릭도 말했잖아. 내가 굳이 얀 헨릭의 뒤를 따라갈 필요는 없어. 나는 나대로 내 주방을 운영해 나가면 되는 거야.’

* * *

에른스트는 저녁 식사도 공작저에서 클라우스와 함께했다. 아체리아는 릴리엇이 또 예고도 없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해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를 두어 가지 더 만들어 놓았지만, 결국 클라우스와 식사를 함께한 것은 에른스트 한 사람뿐이었다.

“아체리아, 이 과일 타르트 아주 맛있는데? 훈제한 거위와 아주 잘 어울려.”

에른스트가 칭찬하자 아체리아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이고는 대답했다.

“가금류를 훈제한 것과 과일 타르트는 맛도 잘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영양 면에서도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준다고 합니다. 식사를 즐겨 주시니 기쁩니다, 대공 전하.”

“수프의 육수는 뭘로 만든 거야?”

“토끼의 뼈를 오븐에서 구운 다음 푹 끓였습니다.”

“뼈를 구워서 끓이는군. 요리라는 건 생각보다 재밌다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클라우스?”

그렇게 묻는 에른스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 속내를 알아차린 듯 밉살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힐끔 보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에른스트가 클라우스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늘상 테이블 앞에서 불평불만만 하며 깨작거리던 그가, 오늘은 어쩐 일로 아무런 말도 없이 제법 의욕 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클라우스가 접시 하나를 거의 다 비우는 모습을 평생 처음 본 에른스트로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또 기쁜 마음에 장난을 치고 싶을 만도 했다.

“에른스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식사나 마저 해.”

“나는 다 먹었는데? 다 먹고 또 먹는 것뿐이야. 아체리아가 요리를 좀 맛있게 만들어야지. 이번 연회에서는 도대체 뭘 내놓을지 기대가 크다고.”

아픈 데를 건드리네, 이 사람이. 아체리아는 보일 듯 말 듯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아체리아, 어때?”

“뭐가 어떻냐는 말씀이신지요?”

“연회에 내놓을 요리 말이야. 뭘 낼 건지 결정했으면 이 자리에서 힌트를 좀 주겠어?”

아직 내놓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을 솔직하게 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기는 더 싫다. 아체리아는 속으로 에른스트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비밀에 부칠 겁니다. 그날 오셔서 확인해 보시지요.”

“뭐야, 우리 사이에.”

그러자 클라우스가 뾰족한 태도로 툭 끼어들었다.

“둘이 무슨 사이인데?”

에른스트가 짓궂게 웃었다. 아체리아는 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의도를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것인지 에른스트는 희희낙락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단둘이 이야기도 나누고, 당근 뿌리로 협박을 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는 사이지.”

“……전하, 저는 협박을 하려는 의도는…….”

탕!

요란한 소리가 식당을 메웠다. 클라우스가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테이블에 거세게 내리치는 소리였다.

“치워. 그리고 자네도 이제 그만 돌아가. 폐하께는 내일 찾아뵐 테니까.”

“같이 가겠나?”

“필요 없어.”

클라우스는 쌀쌀맞게 말하고는 먼저 식당을 나가 버렸다. 식탁의 주인치고 예의라고는 없는 태도였지만, 그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다지 거슬리거나 놀라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체리아가 말했다.

“공작께서 그런 화제를 불편하게 여기신다는 걸 아시잖아요.”

“난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그가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길까?”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에른스트가 싱글싱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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