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연회 요리 대결이라고?”
에른스트는 오늘도 공작저에 놀러 와 유유자적 아체리아를 귀찮게 굴었다.
그는 클라우스와 달리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주방뿐만이 아니라, 텃밭까지 따라와도 뭐 해 될 게 있냐는 태연한 표정이다.
아체리아는 샐러드를 만들 양배추를 손으로 일일이 뜯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클라우스가 초대장을 보냈군.”
“공작께서 벌써 초대장을 보내셨다고요?”
“그래. 얼마나 놀랐는지 이렇게 달려왔잖아. 그런데 본인은 집을 비우고 없다니. 대체 어딜 간 거야?”
“잠시 산책을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양배추를 한 겹, 한 겹 다 뜯어낸 아체리아는 제법 무거워 보이는 소쿠리를 힘도 들이지 않고 번쩍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
아체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에른스트는 예의 그 잘생긴 얼굴에 근사한 웃음을 띠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아무도 없을 때 주방에 저와 단둘이 계신 건 부적절한 행동이 아니신지요?”
“부적절해? 뭐가 부적절하지?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클라우스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아체리아는 에른스트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 괜히 신경 쓰였다.
“아니면…….”
에른스트가 슬그머니 아체리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친구가 아닌 관계를 원해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
그때, 흙 묻은 당근이 에른스트의 턱께에 불쑥 들이대어졌다.
“……아니, 아체리아. 아무리 그래도 당근으로 위협하는 건 좀 너무한다고 생각지 않아?”
“호박이 있었으면 그걸 들어 올렸을걸요?”
아체리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귓가에 걸린 머리칼을 살짝 넘겼다.
“잠깐 놀 상대를 고르시는 거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십시오, 대공 전하.”
“너무하는군. 난 너에게 진심이야.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대공 전하 같은 분과 제가 가당키나 하느냐고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그때 바깥에서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른스트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항복의 표시로 양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 오늘은 일단 물러나도록 하지.”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해 주세요, 전하.”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주방을 나섰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클라우스는 모처럼 파리한 뺨에 혈색이 돌았다. 승마라도 하고 왔는지, 긴 부츠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쩐 일로 외출을 다 했어, 너 같은 방구석 폐인이?”
에른스트가 낄낄거리자 클라우스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장갑을 벗어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건넸다.
“무슨 일이야?”
“네가 초대장을 보냈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달려왔지. 아마 릴리엇과 페터도 올걸?”
“공작저에서 연회 여는 것 정도가 뭐가 대수라고.”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여는 연회만큼 신기한 구경거리가 또 있을까? 아마 저택을 확장하는 게 좋을 거야.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까지 몰려들어 홀이 미어터질 테니까.”
에른스트의 말은 약간의 과장이 섞인 것이긴 했지만 아주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비스몽트 공작이 된 후, 공작저의 문은 세상을 등진 채 아예 꽉 닫혀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작저의 문이 다시 열릴 날이 언제가 될 지 점쳤지만, 맞아 들어간 예상은 이제껏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 연회는 클라우스가 공작이 된 후 공식적으로 여는 첫 연회였다. 구경꾼들이 몰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재밌는 걸 한다면서? 요리 경연이라니.”
클라우스는 초대장에 굳이 그 말을 끼워 넣었다. 공작저에서 자랑하는 ‘두 요리사’의 경연이 있을 예정이니, 부디 고매한 미각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공작저를 방문하여…… 어쩌고저쩌고. 뭐 그런 내용이었다.
“아체리아가 그런 걸 용케도 하겠다고 했네.”
“안 하겠다면 어쩔 거야?”
“요새는 아체리아와 사이가 좋은가 봐, 클라우스.”
에른스트의 말에 클라우스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사이가 좋다’니.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에 ‘사이가 좋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체리아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가? 도저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아체리아도 아마 그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요즘 들어 아체리아와의 관계가 이전보다 매끄러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클라우스가 음식 투정을 덜 하게 되고,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시건방지다’고 생각하는 말을 덜 하게 되었다.
아니, 아체리아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클라우스가 그녀를 불쾌하게 여기는 감정이 덜해졌다고 봐야 옳았다.
‘대체 왜지?’
클라우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늘 관심이 많군.”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뒤, 찻잔을 든 클라우스가 말했다. 에른스트는 ‘글쎄’라고 말하듯이 양쪽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차향을 음미하며 시선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아름다운 아가씨이기는 하잖아.”
“얼굴만 보고 살 정도로 유유자적한 분이셨나, 우리 대공 전하께서?”
클라우스가 냉소적으로 지껄여 댔지만 늘상 있는 일이라 에른스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공 전하라고 하니 생각이 났는데.”
“…….”
“폐하께서 자네를 찾으셔.”
에른스트의 말에 클라우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폐하께서 나를? 왜지?”
“글쎄. 내가 알겠어, 누가 알겠어? 자네를 보아야겠다고 직접 말씀하셨으니, 조만간 왕성을 방문하도록 해.”
“내가 폐하를 뵙고 드릴 말씀이 없을 텐데.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시고.”
“그건 자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에른스트가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왕국 권력의 정점인 왕의 판단을 어느 누가 감히 지레짐작한단 말인가. 비록 그 왕이 온갖 성병과 부귀병으로 오늘내일하는 처지라지만,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이 얹혀 있는 동안에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했다.
“알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오늘은 사실 그 말을 하러 온 거였는데, 아체리아와 수다를 떨다가 그만 깜빡 잊었군.”
“수다를 떨어?”
클라우스가 약간 까칠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른스트는 그게 클라우스의 평소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좀 능글맞게 굴었더니 아체리아가 날 흙 묻은 당근으로 협박을 하더라니까.”
“둘이 죽이 아주 잘 맞는 모양이네.”
이번에도 클라우스의 비꼼을 알아듣지 못한 에른스트가 유쾌하게 답했다.
“재미있는 아가씨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난 사실 자네가 아체리아를 왜 그렇게 홀대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나라면…….”
“자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대공저의 요리사로 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꿈 깨도록 해.”
에른스트는 그제야 클라우스의 반응이 평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보다 더 까끌까끌하게 구는 것 같은데?’
“클라우스, 넌 아체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공적으로 왕명을 전달할 때와는 달리, 클라우스를 향한 호칭은 어느새 다시 ‘너’가 되어 있었다. 클라우스는 별 이상한 질문도 다 듣겠다는 듯이 에른스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찡그린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그저 요리사일 뿐이지.”
“그런 것치고 들려오는 소문엔, 네가 요즘 음식도 잘 먹고 활발해졌다고 하던데.”
“어느 경박한 입이 지껄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라고 하려던 클라우스는 별안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는 원래 거짓말은 잘 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입맛이 당길 만한 걸 잘 만들어 내기는 하더군.”
“뭐야, 소문이 정말이었군. 이거 놀랄 일인데? 클라우스 비스몽트 입에서 ‘입맛이 당긴다’는 말이 나오게 하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대공저로 데려가야 하겠어.”
에른스트가 낄낄 웃으며 농담을 하자 클라우스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건 안 된다고.”
“왜? 아체리아가 레시피만 남겨 두면 자네의 다른 요리사들이 똑같이 만들 거 아닌가. 자네는 어차피 아체리아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서? 자네와 달리 난 아체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거든. 그러니 내가 아체리아를 데려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진심으로 좋아하다니, 설마 진짜로 그녀와 결혼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지?”
“자네도 릴리엇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왜? 그녀가 귀족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자네는…….”
시드레와 결혼해야 하지 않느냐. 그 말을 하려던 클라우스는 찰나의 순간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시드레 백작의 말을 꺼내는 것만큼 에른스트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설령 말한다고 해서 저에게 불같이 화를 낼 그는 아니었지만, 오랜 친구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쯤은 클라우스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네는 대공이야. 그냥 그런 귀족들과도 천지 차이인 신분이라고. 뿐인가? 폐하의 총애하는 조카이기도 하지. 그런 자네가 어떻게…….”
“클라우스, 난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이에는 신분도, 계급도, 성별도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자네 진보파였나?”
“중립을 가장하고 있으니 몰랐나? 하긴, 왕의 혈통과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정치의 저울을 기울이지 못하는 게 이 나라의 규칙이니까. 하지만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네.”
“폐하께서 아시면 놀랄 만한 일이군.”
왕 역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중립을 지키는 편이었지만, 지금의 루뷘 왕은 어디로 보나 노골적으로 보수파의 편을 드는 인물이었다. 란츠호프 후작가와 같은 진보파가 보수파에 비해 발언권이 적은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