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3)화 (23/144)

23화

다음 날.

로널드 락케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서 주방에 내려오자마자 아체리아가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를 본 아체리아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칼을 탕,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락케.”

로널드 락케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어리둥절하게 주변의 요리사들을 둘러보았다. 아체리아는 수석 요리장이 된 후로도 늘 그에게 ‘락케 씨’라며 고분고분한 존칭을 써 왔기 때문이다.

얀 헨릭이야 요리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데다가 지위도 높았으니 누구에게도 존칭을 쓰지 않았지만, 꼬마 시절부터 주방에 있는 것이 익숙했던 아체리아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요리사들에게는 어릴 때처럼 늘 존대를 했다.

아체리아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것은 로널드 락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요리사들 역시 하던 일을 뚝 멈추고 그녀와 락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아체리아가 자신을 향해 ‘락케’라는 호칭을 썼음을 그제야 깨달은 로널드 락케가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방금 뭐랬습니까? ‘락케’라고?”

“그래요, 락케. 당신, 어제 내가 준 레시피를 사용하지 않고 멋대로 메뉴를 바꾸어 공작님께 드렸더군요.”

요아킴과 다른 요리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들도 어제 로널드 락케가 마음대로 메뉴를 바꾸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님께서는 위장이 약하시다고! 게다가 그렇게 입도 짧으신데, 요새 아체리아 클링이 하는 것 좀 보라지! 그런 음식을 드셨다가 공작님께서 위통이라도 앓으시면 그 죄는 결국 우리가 뒤집어쓸 거라고!’

로널드 락케는 그런 식으로 요리사들을 선동했다.

물론, 요즘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요리를 꽤 잘 먹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방에는 여전히 아체리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반이었고, 그중 목소리가 큰 바키나 듀켄은 로널드 락케에게 달라붙어 아첨이란 아첨은 다 하는 이들이었다. 아체리아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요리사들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그래. 내가 그렇게 했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나는 어디까지나 공작님을 위해서 그런 요리를 한 거다.”

“내게 공손하게 말하지 않는 걸 봐주는 것도 오늘까지야, 락케.”

아체리아의 목소리가 퍽 낮아졌다. 로널드 락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순간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계집애가,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얀 헨릭이 정식으로 임명한 이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야. 얀 헨릭이 은퇴했으니, 이제는 내가 이 주방의 주인이지. 공작님 또한 인정해 주신 지위야. 로널드 락케, 당신은 부주방장으로서 내 말을 따르고 존중해야 해. 공작님을 위한 참신한 시도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겠어. 하지만 멀건 죽을 내놓다니? 그건 공작님께서 질색하시는 음식이 아닌가? 공작님을 위해서 그랬다기에는 너무 게으른 행동 아니야? 어디 한번 말해 봐.”

“그…….”

“누구든 두 번 다시 어제와 같은 행동을 했다가는.”

아체리아의 냉랭한 시선이 얼어붙은 요리사들을 쭉 훑었다.

“그날로 토그 브란슈를 벗어야 할 각오를 해야 할 거야.”

토그 브란슈란 요리사들이 쓰는 모자를 말했다. 그것을 벗는다는 것은 곧, 요리사 일을 그만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얼굴이 시뻘게진 로널드 락케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체리아는 주먹으로 도마 옆을 쾅, 소리가 나게 찍었다. 젊은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이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자,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요리사들까지도 어깨를 움찔했다.

“불만이 있으면 나와 대결이라도 해 보겠어?”

“뭐, 뭐라고요?”

“음식을 만들어 누가 공작님을 만족시키는지 대결이라도 해 보잔 말이야. 공작님께서 당신이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하신다면, 수석 요리장 자리를 내어 주지.”

로널드 락케는 이제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많은 요리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것을 견딜 수 없기도 했거니와, 자신에게 망신을 준 상대가 얀 헨릭 같은 사람도 아닌 아체리아 클링이라는 것이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수시로 아체리아를 몰아낼 궁리만 하고 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간 꼬박꼬박 요리사들에게 웃는 얼굴만 보여 주던 아체리아가 이토록 화를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로널드 락케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도 충격을 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저 건방진 계집애가 지금 뭐라고 했어? 나더러, 나더러 대결이라고? 요리 경력이라고는 내 절반도 안 되는 계집애 주제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그대로 표정에 드러낸 채 툽툽하게 생긴 입술을 씹고 있던 로널드 락케가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냈다.

“좋습니다.”

로널드 락케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팔짱을 끼면서 턱을 들고 로널드 락케를 내려다보았다. 키는 아체리아가 훨씬 컸기 때문에, 그녀가 시선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락케는 굴욕감으로 어깨가 떨렸다.

“그럼 공작님께 말씀을 올리도록 하지. 만약 당신이 진다면,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똑똑히 새겨 둬야 할 거야. 명심해.”

* * *

“요리 대결?”

“네.”

클라우스는 헛웃음을 치며 읽고 있던 책을 거꾸로 덮어 내려놓았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건지 말이나 들어 보지.”

“제가 주방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기강을 잡는다? 그런 거라면 뭣 하러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말을 안 듣는 놈이 있다면 그냥 쫓아내. 내가 허락할 테니.”

이거 솔깃한 말인데? 순간 마음이 흔들릴 뻔했던 아체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 또?”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저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을 테니까요, 공작님. 신하를 폭압하는 왕이 존경을 받던가요?”

“지고하신 폐하를 아무렇게나 언급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요리사들이 저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제 실력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주방이 엉망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공작님께도 좋을 것이 하나 없습니다. 설마 고용인들을 다 쫓아내고 새로 들이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느니, 차라리 이번에 제가 로널드 락케를 이겨 그를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클라우스는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체력이 부족한 그로서는 잠시 앉아 책을 읽는 것도 힘든 날이 많았다. 앉아만 있어도 쉽게 지치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아체리아의 요리가 있어서 속이 허해 어지럼증을 일으키거나 입맛이 떨어져 필요 이상으로 성질이 예민해지는 일은 덜했다.

만약 아체리아가 주방을 장악하지 못하면 어제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요리를 잘한다 한들,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데 무슨 수로 자신의 혀를 만족시킬 메뉴를 내놓겠는가?

“좋아.”

클라우스의 입에서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체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단, 나 하나만이 심사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지.”

“예?”

“그렇잖아. 난 네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으니, 내가 심사하면 공정성이 없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나오지 않겠나? 그러니 사람들을 더 부르도록 하지.”

“사람들을 더 부르신다 하시면…….”

미간을 꾹꾹, 짚고 있던 클라우스는 책 사이에 갈피를 끼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튼실하고 탐스러운 체격은 아니지만, 호리낭창하게 마른 그의 몸은 꼭 맞는 옷을 입어 우아한 새처럼 보였다.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연회를 열도록 하겠다. 그 준비를 로널드 락케와 둘이서 해 보도록 해. 손님들이 어떤 요리를 더 좋아하고 즐기는지를 살펴보면 공정한 대결이 되겠지. 어때?”

아니, 이렇게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연회 준비라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방의 모든 요리사들이 다 달라붙어 며칠을 매달려야 하는 큰일이었다.

비스몽트 공작저에서는 선대 공작이 타계한 이후 결코 연회를 여는 법이 없었다. 얀 헨릭이 그 점을 때때로 아쉬워했던 것을 아체리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연회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다. 너희를 도울 요리사들을 포섭하는 일부터, 손님들의 혀를 만족시키는 일까지 해야 하는 거지. 대결을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아니, 하지만…….”

“그럼 그렇게 알고 호즈만에게 초대장을 발송하라 이르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왠지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이 커져 버리자 되레 당황한 것은 아체리아였다.

연회의 요리를 준비하는 것은 문제없었지만, 그걸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다. 만약 요리사들을 두 패로 나눈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널드 락케를 도우려고 할 것이다. 어디로 보나 아체리아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자신 없어?”

클라우스가 물었다.

순간, 아체리아는 얀 헨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도 처음에는 젊은 나이에 승진을 해 괴롭힘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수석 요리장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했고, 몇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얀 헨릭도 해낸 일을 내가 못 할 게 뭐지?

“……아뇨, 하겠습니다.”

“좋아. 로널드 락케를 불러 오도록. 그에게도 대결 내용을 말해 주어야 할 테니까.”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채 그의 서재를 나섰다. 마음속 한켠으로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치밀었지만, 떨쳐 버리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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