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2)화 (22/144)

22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야. 저녁 메뉴로 허여멀건한 죽과 샐러드만 나왔다고. 내가 위장이 약하니 그런 것만 먹어야 한다면서?”

“아니에요! 전 그런 메뉴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메뉴는 분명 토마토와 가지를 얹은 고기 그라탕이었다. 와인에 재워 부드럽게 만든 고기라면 클라우스가 소화하기 쉬울 것 같아서, 따뜻하고 새콤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는데 죽이라니?

“오늘 요리를 누가 올렸지요?”

“부주방장인 로널드 락케가.”

이 인간이 결국 일을 저지르는구나. 아체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화난 표정으로 눈을 빙글 굴렸다.

“공작님, 오늘 제가 준비한 메뉴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락케 씨가 공작님을 위해 새로 메뉴를 구상한 모양인데, 입에 맞지 않으셨다면 제 불찰입니다.”

“당연히 네 불찰이지. 네가 자리를 비우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수석 요리장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나?”

오늘만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째 듣는 건지. 아체리아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면 다가 아니지.”

아. 그럼 뭘, 어쩌라고?

“제가 어떻게 사죄를 드리면 좋을까요?”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여유를 부리듯 어깨를 들썩했다. 그러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을 했다.

“그 마렌인지 뭔지를 야식으로 만들어.”

“……예?”

“못 들었나?”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귀하신 공작님께서 그런 군것질거리를 야식으로? 아니, 그보다도 클라우스가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 오라’는 말을 하다니?

아체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얀 헨릭의 말을 생각했다.

‘이제 그곳에서의 모험은 네 것이야.’

내 주방에서, 내가 모시는 사람에게 내가 뭘 만들어 주건 누가 무슨 상관이람?

“그러면 주방으로 내려오시겠어요?”

클라우스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건 왜?”

아체리아는 양념 냄새가 잔뜩 밴 소매를 걷으면서 씩 웃었다.

“마렌은 구운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맛있거든요.”

* * *

주방은 다행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싫다는 클라우스를 기어이 주방까지 끌고 내려온 아체리아는 나무로 된 의자 하나를 그에게 내어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싫은데.”

“그럼 서 계시든지요.”

클라우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의자를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불을 켠 채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체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먼저 길게 풀어져 있던 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린 아체리아는 벽에 걸려 있던 디케트를 내려 자신의 머리에 썼다. 그렇게 하자 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손을 닦은 뒤 앞치마를 두르고, 감자를 가져다 능숙하게 껍질을 깎는 모습에서는 방금 전까지 가식을 떨며 ‘죄송합니다’ 운운하던 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식재료를 다듬는 아체리아에게서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이채로운 기색마저 느껴졌다.

순식간에 채소를 다듬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썬 아체리아는 오늘 로널드 락케가 사용하지 않은 고기와 긴 꼬챙이를 꺼냈다.

“정말 그런 데에 재료를 꽂아서 먹는 거란 말이야?”

“네, 왜요?”

“사람 찌를 때나 쓰기 딱 좋아 보여서.”

“살벌한 소리 마세요. 이것도 엄연히 주방 도구라고요.”

“요새 내 앞에서 혀가 좀 자유분방하게 굴러간다는 생각 안 해?”

“싫으시면 공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녀가 꼬챙이에 재료를 꽂는 것을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짐짓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말을 해도 듣지도 않을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아셨어요!”

아체리아가 빈 꼬챙이를 휙 휘둘렀다. 클라우스는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그 모습을 본 아체리아는 유쾌하다는 듯이 깔깔 웃어 댔다.

“뭐가 웃겨?”

“공작님께서 놀라시는 모습이요?”

“에른스트도 이런 식으로 넘어오게 한 거군.”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예? 그게 무슨…….”

“설마 그 녀석이 너한테 홀딱 반해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잊을 만하니 또 튀어나오는 화제다. 이전에 누구와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

“그야 대공 전하께서 장난을 치시는 거지요.”

“그렇게 믿나? 아니면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거야?”

“그렇게 믿습니다. 설마 그런 분께서 저를 진지하게 생각하실 리가 없잖아요.”

아체리아는 불을 올린 그릴 위에 마렌을 놓고 재빠르게 소스를 만들었다. 원래 마렌은 매콤달콤한 소스를 발라 만들지만, 클라우스는 매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밤에 매운 걸 먹였다가는 저 연약한 위장이 언제, 어떻게 탈이 날지 몰랐다.

그래서 아체리아는 새로운 소스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원래의 달콤한 소스에 레몬즙과 연한 겨자를 살짝 다져 넣어, 새콤달콤한 맛을 살린 소스로 만들었다. 불이 피어오르고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재료가 익기 시작하자 넓은 주방 안이 맛있는 냄새로 꽉 찼다.

클라우스는 갑자기 식욕이 동하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약간 놀랐다. 로널드 락케가 뻐기면서 내놓았던 죽인지, 수프인지 모를 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맛이 없었던 것이다. 아체리아가 요리를 맡게 된 뒤로 겨우 식사를 좀 할 수 있나 싶었는데,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이것 봐라?’ 하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띠었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분 좋은데요?”

“……왜?”

“그야 공작님께선 뭘 드시는 걸 싫어하시니까요. 그런 사람이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요리사로서 기쁜 일이죠.”

채소와 고기가 적당한 정도로 그을리자 아체리아는 소스가 뚝뚝 흐르는 마렌을 긴 접시에 담아 내어 왔다. 클라우스는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음식을 내려다보고, 아체리아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기막히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마렌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먹으라고?”

“그렇게 드셔야 더 맛있어요.”

“빼 줘. 어차피 맛은 똑같잖아.”

“아이, 참! 아니라니까요! 이대로 드셔 보세요. 자요, 꼬챙이가 뜨거우니 조심하시고요.”

클라우스는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의외로 오래 저항하지는 않았다. 꼬챙이 끄트머리를 쥔 채 뜨거워서 좀처럼 입을 대지 못하는 그를 보는 것도 아체리아에게는 새로운 재밋거리였다.

맨 위에 있는 감자를 이로 살짝 물어 빼 먹은 클라우스는 입 안에 퍼지는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오랫동안 삶은 것이 아니라 불에서 구워 내어 겉은 쫄깃쫄깃하고 바삭했다. 혀끝에 착 감기는 소스는 가벼운 산미가 입맛을 돋우는가 싶으면 달짝지근한 뒷맛이 따라왔다. 뭉뚝하게 썬 고기도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꼬챙이에 꽂혀 있던 재료의 반을 먹어 치운 클라우스를 보며 아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짓는 동안, 클라우스는 뜨거운 양파에서 흘러나오는 들큰한 즙을 음미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맛있어.”

“정말요? 맛있으세요?”

“의외로 그렇군.”

아체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팔을 안으로 확 당겼다.

“해냈다!”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클라우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뭐야?”

“공작님께서 뭔가 드시고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그렇게 기쁘다는 거야?”

“당연하죠. 당연히 기쁘지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만면에는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짐짓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면서 남은 마렌을 먹었다.

“호들갑 떨기는.”

“제 특기인데 모르셨나 봐요.”

“에른스트야 알겠지.”

아체리아의 표정이 순간 이상하게 변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에른스트 이야기를 하는 거지?

“자꾸 그런 쪽으로 엮으시네요. 글쎄, 대공 전하께서 제게 너그러이 대해 주시긴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신다는 착각까진 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되묻는 클라우스의 어조는 어딘가 초조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그런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릴 만큼 섬세한 성격이 못 되었다.

“그야 전 요리사일 뿐이니까요.”

아체리아가 대답했다. 클라우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시선을 약간 내린 채 남은 마렌을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참, 그 피로소프라는 평론가 말인데.”

턱을 괸 채 클라우스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아체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그 근처 식당의 주인에게 뇌물을 받은 것 같더군. 명망 높은 평론가라고 떠들어 댔지만, 결국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그런 식으로 돈을 받아 왔다는 걸 밝혀냈다. 다시는 그런 글은 못 쓰겠지.”

“……네? 그게 도대체 무슨…….”

“내 집에서 나간 고용인을 그런 식으로 폄훼하는 걸 내가 가만히 두고 볼 줄 알았나?”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또 그렇게 쳐다봐?”

“공작님께서는 매번 그렇게 물으시네요. 좀 본다고 닳나요?”

“또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아무튼, 감사합니다. 얀 헨릭의 가게가 그렇게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건 제게도 괴로운 일이었어요. 그런 평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공작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사실 클라우스는 얀 헨릭의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자신을 위해 그가 평생 최선을 다해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요리사였는지도.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를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아체리아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클라우스 앞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네가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가 아니어도 내가 했을 일이니까.”

“하지만 얀 헨릭은 저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니까요. 공작님께서 신경 써 주셨으니, 당연히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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