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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0)화 (20/144)

20화

클라우스는 잠시 아체리아의 표정을 따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곧 자신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고,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람.’

아체리아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도, 요즘 클라우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말랑말랑해진 거 같기도 했다.

대공저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나? 아니, 그 이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정확히는 자신이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후부터.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사람을 찔러 대던 무자비한 말이나, 보기만 해도 뼛골이 서늘해질 만큼 찬바람이 부는 태도 같은 것들이 분명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아체리아로서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시간, 클라우스는 옆에 앉은 아체리아의 기척이 신경 쓰여 자꾸만 편지에 쓸 말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실, 파티 초대를 거절하는 간단한 답장이었는데도 몇 번이나 글자를 틀릴 뻔했다.

에른스트가 눈에 띄게 아체리아를 챙기는 것을 본 이후부터 클라우스는 왜인지 모르게 그의 행동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요리사의 신분에 불과한 그녀를 그토록 애지중지 대접하는 에른스트의 행동이 우스워서라고 생각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속에서 또렷해져 가는 것은 아체리아의 모습이었다. 클라우스 자신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단풍색 머리카락을 허리께까지 늘어트린 아체리아의 모습이 왜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떠나지 않는지를.

“다 찍었습니다.”

마지막 봉랍을 찍은 아체리아가 봉투를 내밀었다. 그때, 녹아 흐르던 밀랍 한 방울이 아체리아의 손가락 위로 뚝, 떨어졌다.

“앗!”

아체리아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심하게 델 정도는 아니었지만 깜짝 놀랄 만큼은 충분히 뜨거웠다. 아체리아가 손을 털어 내려 한 순간,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조심해야지!”

클라우스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아체리아의 손가락 위에 떨어진 밀랍을 순식간에 닦아 냈다. 그러고서는 본인이 더 당황한 표정으로 아체리아의 손목을 툭 놓았다.

‘뭐야.’

황당했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아체리아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고였죠.”

“헛소리 마. 정신 똑바로 차렸으면 이런 일이 왜 일어나?”

아니, 지금 걱정을 하는 거야? 아니면 속을 뒤집자는 거야?

하나만 하란 말이야, 괜히 사람 헷갈리게!

클라우스가 고개를 돌린 사이 그를 향해 이 가는 시늉을 해 보인 아체리아는 다시 눈이 마주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표정을 싹 바꾼 채 공손한 태도로 돌변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래, 가 봐.”

아체리아는 한 점 아쉬움도 없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 공작의 서재를 나갔다.

그녀에게 얀 헨릭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어야 했다는 것을 클라우스가 깨달은 것은, 문이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닫힌 후였다.

* * *

“이건 말도 안 돼!”

아체리아가 신문을 펴 든 채 소리를 꽥 지르자, 각자 앉아서 쉬고 있던 요리사들이 아체리아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그래요?”

“무슨 기사가 났기에?”

“이걸 좀 봐요!”

아체리아가 화난 표정으로 귀퉁이의 기사문 하나를 가리켰다. 늘 로널드 락케를 졸졸 따라다니는 견습 요리사 요아킴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

“얀 헨릭의 가게에 대한 기사예요.”

피로소프가 아닌 다른 음식 평론가가 쓴 칼럼은 지독한 것이었다. 얀 헨릭의 가게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이런 요리사를 수석 요리장으로 고용했으니 비스몽트 공작의 건강이 좋잖을 만도 하다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얀 씨의 가게 음식 맛이 그렇게 형편없을 리 없잖아!”

얀 헨릭을 유난히 따르던 요리사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정도는 제각각이었지만 기사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도저히 못 참겠어.”

아체리아가 벌떡 일어나 앞치마를 벗더니 주방을 뛰어나갔다.

“아체리아, 어디 가?”

“얀 헨릭의 가게에 갈 거야!”

곧 만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요리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체리아는 좁은 시장 골목을 곧장 내달려 향기 광장으로 향했다. 음식점들은 저녁 손님을 맞기 위해 불을 밝히고 문을 활짝 연 채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중에서 얀 헨릭의 가게만이 깜깜하게 불이 꺼진 채 덩그러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체리아는 화난 표정으로 문을 쾅,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얀! 얀, 어디 있어요?”

“아체리아냐?”

희미한 불을 밝혀 놓았던 주방에서 뛰어나온 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갑자기 아체리아의 머리를 꿍, 쥐어박았다.

“아야! 왜 때려요!”

“너, 여긴 왜 왔어! 곧 공작님의 만찬을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니냐!”

“지금 그게 문제예요! 신문! 신문 봤어요?”

“…….”

한순간 얀 헨릭의 말문이 막혔다. 아체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빈 테이블을 탕, 두들겼다.

“그런 걸 봐 놓고 지금 이렇게 불까지 다 끄고 뭘 하는 거예요?”

“아니,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내가 말했지. 이런 식당은 내가 일하던 곳과는 다르다고.”

“그래서 이대로 망하고 말겠다는 거예요? 얀 헨릭이라는 이름이 울겠다고요!”

아체리아는 당장에 소매를 걷어붙인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불기라고는 없이 싸늘한 주방이라니, 도무지 얀 헨릭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그가 공작저에 있을 때에는 주방에서 훈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솥에는 언제나 육수가 끓고 있었고, 소스를 만들기 위해 채소와 과일들이 절여지고 있는 새콤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뭐예요, 이게! 어휴! 재료는, 보자……. 흠, 그래도 재료는 쟁여 뒀네요.”

“아니, 아체리아. 너 뭐 하려는 거냐? 당장 공작저로 돌아가지 못해?”

“얀이 이렇게 정신 놓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돌아갔을 거예요. 그리고, 필요한 준비는 다 해 놓고 왔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툭 쏘아붙인 아체리아는 조리 도구가 거의 새것으로 갖추어진 주방을 휘둘러보고는 아래에 바퀴가 달린 그릴을 끌어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

“됐으니까 빨리 도와줘요. 자, 빨리요! 저녁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잡아야죠!”

얀 헨릭은 아체리아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저녁 식사하러 오는 사람들을 잡는다면서, 그릴은 왜 밖으로 끌고 나가는 거지?

그것은 사실, 얀 헨릭과 아체리아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였다.

대대로 귀족가의 요리사로 살아온 집안에서 태어난 얀 헨릭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법한 나이부터 이미 뭉뚝한 칼을 가지고 감자나 당근 따위를 자르면서 놀았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견습 요리사가 된 나이가 불과 열한 살, 그때부터 몇십 년 동안 귀족들이 즐길 만한 휘황찬란하고 새로운 요리를 많이 개발해 냈지만, 정작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리는 실제로 자주 만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선대 비스몽트 공작이 살아 있을 때는 그나마 요리의 배리에이션이 다양했지만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은 어떤가. 하루에 우유죽이라도 한 끼 먹어 주면 고마운 수준인 사람이었다.

반면 아체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온갖 것들을 먹었고, 자라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고 시장에 나다니며 갖가지 신기하고 괴상한 음식들을 맛보며 미각을 길들였다.

그러니 이런 광장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잡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는 얀 헨릭보다 아체리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었던 그의 이름을 내건 식당이라면 당연히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요리를 기대하겠지만―그리고 얀 헨릭도 그쪽으로 노선을 잡았지만― 이번엔 아니라, 이 말씀이야!

“얀, 감자랑 양파, 순무요. 그리고 마침 딱 숙성된 쇠고기가 있던데, 이거 다 써도 되는 거죠?”

“그래, 다 써도 된다.”

“좋아요. 이제 가게 불 켜요! 영업할 시간이라고요.”

얀 헨릭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아체리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체리아는 재빠른 솜씨로 채소와 고기를 다듬어 뭉뚝뭉뚝한 크기로 썰고는, 기다란 쇠꼬챙이에 재료들을 한 줄로 주르륵 끼웠다.

“아니, 아체리아. 대체 내 가게에서 뭘 팔려는 거야?”

“기다려 봐요. 이거랑 한 가지 더 만들 거예요. 돼지고기 있어요?”

“뭐? 아니, 돼지 뼈로 낸 육수는 있다만…….”

“좋아요. 오래되지 않은 거죠?”

“이 녀석이, 날 뭐로 보고!”

“그럼 빨리 데워 줘요. 그리고 순무를 갈아서 육수를 끼얹은 다음에, 매콤한 맛 하나랑 달콤한 맛 하나로 만들어 줘요. 이 남은 감자들은 베이컨이랑 같이 볶아요.”

그리고 아체리아는 그릴 아래에 숯을 잔뜩 놓고 불을 피웠다. 광장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붉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아가씨가 후르르 피어오르는 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체리아, 너 설마 마렌을 팔겠다는 거냐? 내 가게에서?”

마렌은 꼬치구이의 일종이었다. 뭉툭하게 썬 큼직한 감자와 양파, 그리고 고기를 촘촘히 꽂아 그 위에 달콤하거나 매콤한 소스를 끼얹어 만드는 것으로, 당연히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는 팔지 않는, 일종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죠. 얀 헨릭, 그새 나한테 해 줬던 말을 잊었어요? 음식은 오감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는!”

“……후각이다.”

그것은 분명 얀 헨릭 자신이 아체리아에게 마르고 닳도록 가르친 말이었다.

“이런 넓은 곳에서 사람들을 모으려면 이게 최고라고요.”

아체리아는 얀 헨릭이 가져다준 소스를 휘젓는 퍼포먼스를 해 보이더니, 두툼하게 썬 채소와 고기를 꽂은 마렌 꼬치를 그릴 위에 줄줄이 얹으면서 외쳤다.

“자, 맛보고 가세요!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둘이 먹다가 뒤에 있던 일곱 놈이 넘어져도 모르는 얀 헨릭의 마렌 꼬치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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