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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9)화 (19/144)

19화

점심 식사 준비를 마친 아체리아는 오늘 자리에서 일어난 후 처음으로 의자에 앉을 짬이 났다.

오늘따라 릴리엇이 예고도 없이 점심때에 맞춰 나타나는 바람에, 그녀를 위한 메뉴를 급하게 새로 만들어야 해 주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릴리엇은 좋고 싫은 메뉴가 분명했다. 아체리아가 클라우스를 위해 만든 새콤한 맛의 메뉴들은 그녀의 입에 맞지 않았다.

결국 아체리아는 짧은 시간 안에 머리를 쥐어 짜내어 릴리엇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생각해 냈다. 오래 묵은 와인으로 만든 소스를 끼얹은 양고기 스테이크가 호평을 받은 것만으로도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고생했어, 아체리아.”

“아, 예시카…….”

얀 헨릭과 동기쯤 되는 나이 든 하녀장 예시카 바브로바였다. 아체리아는 그녀의 툽툽한 손을 끌어다 잡으면서 응석을 부리듯 히죽 웃었다.

얀 헨릭이 어린 아체리아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 예시카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아무도 서로를 도와줄 짬이 없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아체리아가 허둥지둥거리다 실수하지 않도록 이끌어 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녀였다.

“이리 와요, 예시카. 디저트 파이가 좀 남았어요.”

아체리아는 오븐 위에 올려놓았던 체리 파이를 한 조각 잘라 와 예시카의 앞에 놓아 주고 물을 끓였다. 얀 헨릭이 있을 때는 이따금 이렇게 셋이 마주 앉아 남은 디저트를 먹거나 차를 마시곤 했던 것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얀의 가게에 갔다 왔다면서?”

두툼하게 자른 파이 조각을 입에 넣으며 예시카가 말했다.

“네, 이틀 전에요.”

“나도 한번 가 보려고 했지만 도통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래, 어떻든? 듣기로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던데. 호즈만이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네가 공작님께 얀의 가게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다면서?”

“예시카도 못 들으셨던 거예요?”

“뭘 못 들어?”

“얀 헨릭의 가게에 대해서 피로소프라는 음식 평론가가 헛소리를 한 일 말이에요.”

예시카는 얀 헨릭과 동기이기도 했지만 사적으로도 몹시 친밀한 관계였다. 그런 예시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번 일로 인해 얀 헨릭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난 못 들었지. 얀 헨릭이 나간 뒤로 만나지도 못했는걸.”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 그 평론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얀의 주먹 한 방이면 대번에 나자빠질 놈일 텐데.”

예시카가 차를 마시며 낄낄 웃자 열을 내던 아체리아도 그제야 픽 웃었다.

“얀의 불주먹이 좀 아프긴 하죠. 진짜 나라도 나서서 때려 주고 싶을 정도라고요!”

“어이구, 이 말괄량이가 또 잔뜩 골이 나셨네. 그래서, 공작님께서는 뭐라시던?”

“알아본다고 하셨어요. 웬일인가 몰라.”

“말버릇 하고는.”

“요즘 식사도 좀 잘 한다니까요?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가 봐요.”

“그거야 네 솜씨가 좋은 덕분이지. 난 네가 잘 해낼 거라고 계속 믿었다. 너랑 얀 때문에 내가 살 뺄 시간이 없다니까!”

예시카가 호탕하게 웃으며 남은 체리 파이를 입 안에 쑥 집어넣었다. 아체리아는 이 성격 좋고 대범한 사람이 정말로 좋았다.

“사실, 제가 진짜 잘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좀처럼 시무룩한 법이 없는 아체리아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예시카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뚱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어울리게 왜 이러니?”

“다른 요리사들 말이에요. 아무래도 전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거 같아요.”

예시카는 체리 파이를 한 조각 더 잘라 오면서 퉁퉁한 볼을 실룩거렸다.

“다 네가 질투 나서 그러는 것들이지. 옹졸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질투요?”

“당연하지! 어디 보자, 널 못살게 구는 게 누굴지 안 봐도 불 보듯 훤하다. 로널드 락케지?”

“못살게 군다기보단, 음…….”

“어이구, 이 답답한 녀석아. 평소에는 똑 부러졌으면서 왜 이럴 때만 이렇게 바보 노릇을 하나 몰라? 생각 좀 해 봐라. 너처럼 어린 나이에 귀족가 수석 주방장이 된 사람이 이 나라에 누가 또 있을 거 같으냐? 얀 헨릭은 널 데리고 있으면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뭘 한 거람?”

아체리아는 그제야 어리둥절하게 입을 벌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요리를 잘하며 혀가 민감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얀 헨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아체리아 자신은 본인의 재능이 얼마나 특별하고 출중한 것인지 그리 뚜렷하게 자각을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로널드 락케가 자신에게 심술을 부리는 이유도 까짓 수석 요리장의 지위가 탐나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실상 락케의 경우에는 그게 사실이었지만서도, 다른 요리사들이 아체리아를 경원시하는 데에는 그녀의 재능에 대한 질투가 단단히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풀 죽을 필요 없다, 이거야. 그런 녀석들에게 숙이고 들어가면 네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예시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예시카가 가고 난 후, 호즈만이 아체리아를 부르러 왔다.

“공작님께서 찾으신다.”

“저를요? 지금요?”

“그래. 얼른 따라와라.”

아체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호즈만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클라우스는 서재에 있었다. 차를 끓이는 시종들이나 하녀들은 따로 있는데, 도대체 나를 여기에 왜 부른 거지?

“들어가 봐라.”

호즈만이 말했다. 아체리아는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거기 앉아.”

내가 개야, 뭐야?

그래도 이제 익숙해지니 불만스런 표정도 제법 능숙하게 숨길 줄 알게 되었다.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을 쓰고 있던 클라우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거기 말고.”

“그러면요?”

“이쪽, 여기에 앉으라고.”

그럼 그렇게 말을 해 주던가!

아체리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한 채 클라우스가 가리키는 옆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옆으로 당기면 어깨가 닿을 듯한 위치, 클라우스의 앞에 놓인 찻잔에서 머리를 맑게 해 주는 허브 향기가 피어올랐다.

“이거 좀 거들어.”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앞에 내민 것은 수없이 많은 봉투들이었다.

“……거들라고 하시면…….”

“봉랍 찍는 방법은 알잖아.”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초에 밀랍을 녹여 봉투 위에 뚝뚝 떨어트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봉랍인을 찍었다.

‘이제 별걸 다 시키네!’

“공작님.”

“왜.”

“……이런 일은 저보다는 호즈만 집사장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얼른 찍어. 찍을 게 산더미라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속으로야 얼마든지 투덜거려도 좋지만 감히 바깥으로 티를 낼 수는 없다. 아체리아는 마치 봉랍을 찍는 오토마타처럼 도장을 꾹꾹, 눌러 찍다가 클라우스의 옆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요 며칠 제대로 식사를 챙겨서인지 위통이나 빈혈로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뺨이며 해쓱한 듯 날카로운 턱 선이 차디찬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체리아가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면박을 줄 줄 알았던 클라우스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질 줄은 몰랐던 아체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봉투에 봉랍인을 꾹 눌러 찍으며 다시 물었다.

“오늘 저녁에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없어.”

역시 이 화제는 무리였나. 아체리아는 다시 말할 거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답잖은 수다라고 잔소리를 들을지언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남자 옆에서 도장만 찍고 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디저트는 백합 뿌리로 만들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백합 뿌리로 디저트를 만든다고?”

클라우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건 보통 수프를 만들잖아.”

“어머, 아시네요!”

저도 모르게 감탄한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뚱한 표정을 보고서야 또 속으로 아차 싶었다.

“내가 바보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는 요리에 도통 관심이 없으시다고만 늘 생각해서요.”

“죄송하다면서 할 말은 따박따박 다 하는군.”

클라우스는 다시 답장을 쓰던 종이 위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 봐.”

“네?”

“백합 뿌리로 무슨 디저트를 만들 건지 말이나 해 보라고.”

이 남자가 정말 이상하게 구네?

아체리아는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밀랍을 더 녹였다.

“소금을 넣고 살짝 삶은 백합 뿌리에 캐러멜을 끼얹어서 만들어 볼까 해요.”

“맛이 이상할 거 같은데.”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커스터드 크림도 얹을 건데요.”

“그런다고 해서 어울릴 거 같지가 않아.”

“피, 드셔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셔야지요.”

클라우스가 아체리아 쪽으로 시선을 힐끗 던졌다.

“이젠 가지가지로 무례한 짓을 하는군.”

“뭐가요?”

“방금 말이야. 코웃음 쳤잖아.”

내가 그랬던가? 아체리아는 최대한 순진해 보이는 투로 눈동자를 굴렸다. 클라우스는 못마땅한 건지, 아니면 못 볼 걸 봤다는 건지 모를 투로 오만상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표정 이상해.”

“제 표정이 뭐가, 어떻단 말씀이신지.”

“방금 그거 말이야. 그 이상한 표정.”

“그러니까 어떤 표정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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