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오늘 낮에 얀 헨릭의 가게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피로소프라는 평론가가 얀의 가게에 대해 터무니없는 혹평을 해서, 식당에 손님이 하나도 없더군요. 너무 억울해서, 계속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피로소프? 그자가 얀 헨릭의 가게에 대해 혹평을 했다고?”
어라, 의외로 관심을 가져 주는걸?
아체리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우스가 밉살스럽게도 픽 웃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요리를 내놨기에?”
“얀의 잘못이 아니에요!”
또 기어이 언성을 높이고야 만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의외로 침착한 태도였다.
아체리아는 진정하려는 것처럼 숨을 길게 내쉬고는 차분하게 설명을 계속했다. 얀 헨릭이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요리에 있어 얼마만큼의 자부심과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으로 있는 동안 그의 요리에 실망한 적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클라우스는 소테로 만들어 부드러운 생선을 잘게 썰어 조금씩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네. 아주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클라우스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워, 아체리아는 남몰래 주먹을 꾹 쥐었다.
“알겠다.”
알겠다니, 뭘?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한 클라우스는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제가 뭘……. 그보다 뭘 ‘알겠다’는 것인지요?”
“얀 헨릭의 가게에 대한 것 말이야. 내 집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로 혹평받는 건 용납할 수 없지. 얀 헨릭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겠지만, 우선 공작가를 우습게 보는 태도야. 그런 것은 용서 못 한다.”
“……공작님의 말씀은, 그럼…….”
“일의 전말을 알아볼 테니까 내 식탁 앞에서 죽상 하고 있지 말란 얘기야.”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약간 누그러진 듯 들렸다. 아체리아는 식사를 하느라 고개를 숙인 그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혼자 비죽이 미소를 지었다.
* * *
“대공 전하!”
왕성 복도를 걸어가던 에른스트는 자신을 부르는 높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드레.”
시드레라는 이름의 여자는 에른스트 앞에서 치맛자락을 나붓하게 펼치며 정중하게 절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아 백작이 된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대공 에른스트의 신붓감으로 점 찍힌 인물이었다. 비록 에른스트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우겨 대는 바람에 여전히 후보로만 남아 있는 상태지만,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에른스트의 신부가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대공 전하, 돌아가십니까?”
“아니, 잠시 폐하를 뵈러 갈 예정이네만. 내게 용건이 있는가?”
“아니요, 그저…….”
시드레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에른스트는 씁쓸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건만, 철없던 시절의 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녀와 그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에른스트의 가슴속을 싸하게 훑고 지나갔다.
“대공 전하께서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함께 서쪽 후원을 보러 갈 수 있을까 하여 여쭤보았습니다. 저…… 6왕녀께서 귀한 나무를 구하셨다기에.”
그때, 에른스트는 멀찍이 선 채 이쪽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소곤거리고 있는 귀부인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시드레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 귀부인들은 분명 시드레를 따라온 사람들이리라. 무어라 소곤거리고 있는지 들리지는 않지만, 듣지 않아도 에른스트는 그녀들이 하고 있는 말을 알 수 있을 듯했다.
‘대공 전하께서 과연 시드레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이실까요?’
‘글쎄요,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시지 않겠어요? 여자가 먼저 청하는데, 남자가 거절하게 되면…….’
‘시드레 백작의 입장이 좀 난처해지겠지요.’
그런 말들을 하고 있겠지. 즉, 그녀들은 시드레가 에른스트를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대공과 백작이라는 직위로만 따진다면 에른스트가 시드레의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남녀 간의 관계라는 조건이 하나 더 끼어들면 일이 아주 미묘해지고 만다.
에른스트는 시드레에게 괜한 환상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갖춰야 하는 예의마저도 저버릴 만큼 그녀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럼, 폐하를 뵙고 와서 잠시 그대와 걷도록 하지. 괜찮겠나?”
시드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기쁜 표정이 역력한 투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물론이지요, 전하. 그러면 저는 이곳 별궁의 초상화 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다녀오십시오.”
시드레의 인사를 뒤로한 에른스트는 이런 때에는 우유부단해질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왕의 침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폐하께 고해 주게.”
시종장 뮬이 안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왕의 서재나 침전과 같은 곳은 적게는 세 개, 많게는 대여섯 개 이상의 문을 지나야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 문을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는 사람도 왕궁 안에서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어서 오너라, 에른스트. 내 조카야.”
왕은 대낮임에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파리했으며,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보았을 때에 비해 살은 전혀 내리지 않은 것이, 몸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이 옷 바깥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레이넌의 대공 에른스트가 왕국의 빛이신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말거라. 원, 녀석도. 어릴 적부터 뭐 하나 변하질 않는구나.”
이전 같았으면 오히려 에른스트의 깍듯한 인사를 당연하게 받았으련만, 아픈 이후로부터 왕은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숙부님.”
에른스트는 천천히 왕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이불로 반쯤 덮인 그의 몸에서는 병자의 냄새가 풍겼다.
“몸은 어떠십니까?”
“내가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구나.”
왕의 입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자,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에른스트의 얼굴에도 당황스런 빛이 스쳤다.
“왜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숙부님께서는 얼마든지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가 아니십니까.”
“젊다니,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보아라. 젊었던 시절이 까마득하니…… 쿨룩! ……죽기 전에 마지막 일은 마무리를 짓고 가야 할 텐데, 아무래도 답이 보이지 않는구나.”
병든 왕의 마지막 일. 에른스트는 속으로 수많은 왕자와 왕녀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누구에게 왕관을 씌워 줄 것인가.
왕은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고민 때문에 병이 낫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폐하의 자손들은 모두 한결같이 총명하게 장성했지요.”
할 말이 궁해진 에른스트가 겨우 대답을 하자, 왕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끌끌거리고 웃었다.
“네 말에 진심이 없구나.”
“오해이십니다, 숙부님.”
“아니, 내 자식 놈들은 전부 실패작이다. 하나같이 어리석은 허영 덩어리들…… 내 죄업인가 싶구나.”
이자가 정말로 미쳐 버린 것은 아닐까? 에른스트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숙부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남의 앞에서 속내를 터놓거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왕이었다. 나면서부터 태자의 자리를 약속받은 선왕의 적장자, 왕관을 쓰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던 군주.
젊었던 시절의 그는 총명하고 과단성 있는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색을 너무 밝히는 것이 흠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지만, 자손을 번성시키는 것도 왕의 의무라면 의무. 무엇이 문제냐며 되레 왕을 두둔하고 나선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정부로 바쳤다.
그 결과 왕은 수많은 서자를 두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화근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왕이 세상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왕자들을 생각하니 에른스트마저도 머리가 아파 오는 심정이었다.
“요즘도 비스몽트 공작가와 교분이 있느냐?”
갑자기 클라우스에 대한 것은 왜 묻는 것인가. 에른스트는 의아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를 좀 불러와야 할 것 같구나.”
“비스몽트 공작을요? 어쩐 일로…….”
“내가 그에게 할 말이 있다. 다음에 한번 입궁하라 일러라.”
“잘 알겠습니다.”
클라우스에게 할 말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에른스트는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그를 이제 와서 왕이 찾을 만한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나가 보거라. 아참, 그리고.”
“……?”
“늦기 전에 시드레 백작과 네 혼사를 결정짓고 싶구나.”
역시나. 오늘은 왜 이 말이 나오지 않는가 싶었다.
“숙부님,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아니, 에른스트. 너는 결혼을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
에른스트는 약간 뿔이 난 심정으로 이맛살을 약하게 찌푸렸다.
“외람되지만, 숙부님. 어째서입니까? 왜 제가 꼭 지금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말하기 어렵구나. 그러나 너와 시드레 백작의 혼사는 늦든 빠르든,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있거라.”
“숙부님.”
“더 이상 토 달지 말거라.”
말을 마친 루뷘 왕은 기침을 하면서 퉁퉁 부은 몸을 다시 누였다. 에른스트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