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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7)화 (17/144)

17화

아체리아의 하루는 주방에서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면 만찬 준비를 하기 전까지 잠깐의 자유 시간이 있었다. 이때 아체리아는 주로 번화가에 있는 시장으로 가서 신기한 식재료가 없나 살피기도 하고, 혹은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요리들을 맛보기도 했다.

오늘은 날씨도 쾌청한 것이 시장을 구경하며 돌아다니기에는 최적이었다.

아체리아는 시장을 다닐 때 절대로 큰 거리에 있는 상점들만 둘러보지 않았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북부인이나 남부인들이 작게 차린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야말로 아체리아의 주 무대였다.

“아가씨, 오늘 볼다구 좋은 양념 들어왔수다. 보시구 가란.”

“흑종초가 오늘 아주 좋아요! 보고 가소, 예?”

아체리아가 좋아하는 골목 시장에는 온갖 지역의 방언들이 넘쳐 났다. 반쯤은 못 알아들을 지경인 그 말들도 아체리아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왁왁대는 듯한 시끌벅적한 상점가를 천천히 돌아보던 아체리아는 무 꼭지처럼 생긴 초록색의 뭔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저기요, 이건 뭔가요? 맛볼 수 있어요?”

향신료를 주로 파는 가게들은 사고 싶은 향신료를 맛볼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이 많았다. 아체리아가 묻자, 턱이 납작한 주인은 왠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맛볼 수 있구말구.”

그러더니 안쪽에서 말린 생선 껍질처럼 생긴 이상한 강판을 가지고 나와 그것을 벅벅 갈기 시작했다. 물기가 섞인 걸죽한 즙을 살짝 찍어 먹은 아체리아는 코가 뻥 뚫리는 매운맛에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이게 대체 뭐예요? 어우, 매워!”

“동쪽에서 온 향신료라우. 고추냉이라는 거지.”

“맙소사, 이런 걸 어디에…….”

잠깐만. 아체리아는 눈을 깜빡이면서 돌아서는 주인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잠시만요! 한 번만 더 맛보게 해 주세요!”

주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라는 듯이 작은 종지를 아체리아에게 내밀었다. 손끝으로 살짝 찍어 먹자, 다시 한번 콧속이 화해지는 매운맛이 혀끝을 찌르듯이 치밀고 들어온다.

‘이걸 익히면 매운맛이 좀 덜해지지 않을까? 공작님은 매운 음식을 많이 드시면 안 되지만, 맵기를 살짝 조정해서 이 톡 쏘는 맛만 살릴 수 있을 거 같기도 한데…….’

오늘 아침 버섯 마리네를 다 먹은 것을 보면, 다소의 자극적인 맛이 클라우스의 입맛을 오히려 자극해 식욕을 돋우는지도 몰랐다.

그간 얀 헨릭이 짠 클라우스의 식단은 주로 밋밋하고 담백한 건강식 위주였다. 그야 그의 식사가 워낙에 불규칙한 데다 식사량도 적고, 틈만 났다 하면 위통에 시달리니 요리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체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적당한 자극이 오히려 입맛을 돋워 줄 수 있을 것이다.

‘식욕이 돌아야 뭘 먹어도 먹을 거 아니야?’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고추냉이와 더불어 아사포에티아라는 향신료를 함께 샀다. 기름에 볶으면 신기하게도 양파와 비슷한 풍미를 내는 향신료였다.

‘이걸 넣고 토마토랑 깍지콩을 넣고 비프 수프를 만들어 보자.’

깍지콩 역시 클라우스가 질색하는 재료 중 하나였지만, 뭐 어떠랴?

즐겁게 시장을 둘러본 아체리아는 좁고 복잡한 골목을 벗어나 광장으로 향했다. 베르데사 왕국의 수도에는 북쪽과 남쪽에 각각 큰 광장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체리아가 있는 곳은 남쪽 광장, 콘피라트라는 정식 이름보다도 ‘향기 광장’으로 더 많이 불리는 곳이었다.

향기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름 그대로 이 광장에서 온갖 향기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체리아가 방금 지나온 향신료 시장에서 나는 향기에서부터, 반달 모양의 둥근 호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음식점의 향기, 그리고 향수 가게들이 즐비한 서쪽 구역에서 나는 향기까지.

얀 헨릭은 이 향기 광장의 가장 좋은 목에 음식점을 차렸다. 향기 광장의 식당가에는 얀 헨릭처럼 귀족가에서 일하다 은퇴한 요리장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실력의 요리사가 아니면 가게를 차린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폐점하고 만다는 소문이 있는 살벌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얀 헨릭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라면 언제, 어디서 가게를 차려도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룰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체리아는 텅 비어 썰렁한 가게 안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가게를 잘못 찾아온 건가 싶어 문밖으로 나가 간판을 다시 보기까지 했다.

<범고래 해적의 집>. 분명히 얀 헨릭의 가게였다. 이 기막힌 네이밍 솜씨 좀 보라지. 얀 헨릭이 아니면 누구도 이 근처에서 이런 이름의 가게를 내지 않을 것이었다.

“얀! 얀, 저 왔어요!”

아체리아가 외쳤다. 주방에서조차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가게를 비운 건가? 문 잠그는 것을 잊고?

“아, 이런. 무슨 소린가 했더니 너로구나.”

“얀!”

얀 헨릭의 모습을 본 아체리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공작저를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볼의 살이 쑥 패어 있었다.

“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세상에, 눈 퀭한 것 좀 봐! 사흘 밤낮 굶은 사람처럼!”

얀 헨릭은 아체리아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픽 웃으며 꺼칠한 뺨을 문질렀다.

“음, 사흘 밤낮 굶다시피 하긴 했지. 티가 좀 나냐?”

“굶긴 왜 굶어요! 사람이 식사를 해야지! 대체 이게 뭐예요? 왜 이렇게 가게가 텅 빈 거예요?”

“그게 말이다…….”

한숨을 푹 내쉰 얀 헨릭이 해 준 이야기는 기막힌 것이었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전前 수석 요리장이 차린 식당이라는 소문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손님은 물밀듯이 밀려왔다.

얀 헨릭은 매우 능숙하게 손님들의 오감을 만족시킬 만한 요리를 내놓았다. 불과 며칠 만에, 전체 매출로만 따지면 그 거리의 모든 식당가 중에서도 1, 2등을 다투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야.”

얀 헨릭이 가게를 연 지 일주일쯤 되던 날, 피로소프라는 이름의 남자가 가게를 찾아왔다.

“피로소프요? 그, 신문에 자주 나오는?”

“그래. 그 음식 평론가 말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 사람이 어쨌기에요?”

“내 가게의 음식들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의 저질이라는 글을 기고했단다.”

아체리아는 너무 황당해서 입을 떡 벌렸다.

“뭐라고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분노한 아체리아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얀 헨릭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피곤이 덕지덕지 쌓인 얼굴을 문질렀다.

“대체 혓바닥이 제대로 달려 있긴 한 거래요? 그렇게 명망 높은 평론가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가 있어요!”

“내 생각에는 말이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단다.”

얀 헨릭이 말했다.

“돈을 받아요?”

“그래. 내가 가게를 차린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누군가가 피로소프를 매수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자식이 감히 그런 짓을? 아체리아는 너무 화가 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지경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체리아는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솔직하게 맛있다고 칭찬하는 것, 재료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 것, 음식을 만든 사람의 공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아체리아가 요리사로서, 또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진 마음가짐이었다.

피로소프는 아주 혹독한 평론가이기는 했지만, 맛있는 음식과 대충 만든 음식을 분별할 능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도 아체리아처럼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며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요리사는 아닐지언정 그의 섬세한 미각과 음식에 대한 찬사가 담긴 표현은 아체리아도 존경하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그렇게 비열한 인간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정말.”

아체리아가 화를 내도 얀 헨릭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럼 뭘, 어쩌겠느냐. 손님을 상대하는 장사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과 또 달라.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모험을 좋아하지 않지. 아체리아 너도 알 거다. 독특한 음식만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미각을 자랑하고 싶은 거란다. 하지만 평론가에게서 악평을 받은 식당은…… 그런 모험을 하는 사람들도 오지 않아. 그게 시장이다.”

“말도 안 돼요! 얀 헨릭의 음식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중 하나라고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아체리아는 붉은 입술을 꾹 다물면서 이를 득득, 갈았다.

“절대로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돼요.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았다가는 얀 헨릭의 이름에도, 그리고 비스몽트 공작저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게 되는 거라고요.”

그런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아체리아는 아몬드빛의 커다란 눈을 굴리며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표정이 왜 그렇지?”

클라우스의 질문에, 아체리아는 아차 싶은 얼굴로 호즈만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감히 주인이 알아챌 정도로 죽상을 하고 있다니, 고용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호즈만은 아체리아를 향해 눈을 부릅뜬 채 시선으로만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있었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쓸데없이 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작님. 식사를 하시는 데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게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

왜 사사건건 간섭이람!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신경을 써 줬다고!

아체리아는 낮의 일로 쌓인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참자.’

천천히 숨을 고른 아체리아는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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