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6)화 (16/144)

16화

에른스트가 제법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의외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에게 평소처럼 얄미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저는 요리사에 불과한걸요. 저 같은 사람들은 누가 왕이 될지 마음껏 말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에른스트가 헛웃음을 쳤다.

“우리 둘은 ‘아무도’에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야?”

“그야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친구’를 초대한 것이라고요. 저도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친구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아체리아가 지지 않고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런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뜻밖에도 어깨를 흔들며 작게 웃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입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겠지, 에른스트?”

“……너희 둘이야말로 정말이지 입조심이라는 걸 좀 알아야 하겠어. 어린애 앞에서 찬물 마신 격이 돼 버렸군.”

클라우스가 몸을 일으키자 에른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가려고?”

“그래야지.”

“아쉬운걸. 네가 카드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내 평생의 불행이야.”

에른스트가 응석 부리는 소리를 해도 클라우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페터나 릴리엇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그럼 카드 게임을 하자!’고 말해 주기라도 했으련만.

아체리아 역시 클라우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저를 나와 다시 마차에 올랐을 때, 문이 닫히자마자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른스트가 왕이 되면 어울릴 거라는 건 무슨 뜻이었던 거야?”

“……네?”

“아까 말했잖아. 에른스트가 왕이 되면 어울릴 것 같다고. 뭐가 어울릴 것 같다는 건지 말해 봐.”

갑자기 이런 걸 왜 묻지?

아체리아로서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꼬투리 잡아 또 혼내려는 거겠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왜, 왕께서 들고 계시는 왕홀이나…… 왕이 걸치는 옷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게 에른스트 전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제 잔소리가 쏟아지겠지? 아체리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웬일일까.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말을 비웃거나 시건방지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아체리아는 다른 고용인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눈을 뜨는 타입이었다. 아침에 배달 오는 신선한 식재료를 받기 위해서이다.

단순히 식자재를 배달받고 서명만 하면 되는 거라면 견습 요리사에게 시켜도 될 일이지만, 아체리아는 얀 헨릭의 철저한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요리하는 재료는 모두 자기 눈으로 확인할 것.’

그것은 아체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얀 헨릭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온 잔소리 중 하나였다.

공작저에 식자재를 대는 사람 중에는 부주방장인 로널드 락케의 이복동생, 피롤 락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식자재를 배달하는 사람들 중 아체리아를 달가워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로, 아체리아가 물건을 꼼꼼히 살필 때마다 아니꼽다는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수석 요리장님, 우리 가게 물건에 언제 하자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빤히 들여다보실 필요 없다니까요.”

피롤이 마뜩잖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체리아는 그런 소리 따위야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생선의 꼬리를 손끝으로 만져 보고, 눈이 얼마나 생생한지를 살폈다.

“생선 같은 건 저만이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도 까다롭게 고를 텐데요, 피롤 씨.”

아체리아가 힐끔 시선을 던지며 말하자 피롤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얼음에 파묻힌 생선을 꼼꼼히 살핀 아체리아는 커다란 도미와 농어를 한 마리씩 골랐다. 이윽고 채소와 과일을 담은 수레들도 속속 도착했고, 아체리아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제 대공저에서 드신 걸 생각하면…… 아침은 조금 산뜻한 걸로 해도 괜찮겠다. 그리고 점심에는 손님이 오실 걸 대비해서 양을 넉넉하게 만들고, 만찬은…….’

좋아. 오늘의 메뉴 선정을 끝낸 아체리아는 하품을 하면서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요리사들도 하나둘씩 주방에 모습을 내밀었다.

“요리장님, 이런 건 저희가 할게요.”

견습 요리사 중 한 명인 해나가 황급히 아체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로널드 락케는 다른 요리사들과 어울려 불쾌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왜 그런 걸 직접 하십니까? 아랫사람들 눈치 보이게.”

존대와 반말이 교묘하게 섞인 말투로 락케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요리사들이 순식간에 움츠러들며 아체리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공작저에는 수많은 고용인들이 있고, 그 고용인들 사이에도 엄연히 위계질서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주방의 위계는 특히나 엄격했다. 얀 헨릭이 있을 때는 감히 수석 요리장에게 저런 말투를 쓴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얀 헨릭이 있을 때도 재료를 직접 다듬는 것에는 항상 그가 관여했었다. 이제 와서 아체리아에게만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시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스파라거스를 얇게 저미고 있던 아체리아는 락케의 말투에 신경질이 확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탕, 소리 나게 칼을 내려놓자 락케 옆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요리사들의 어깨가 비로소 움츠러들었다.

“락케 씨, 눈치를 볼 시간이 있으면 와서 도우시는 게 어때요?”

“…….”

“그리고, 눈치가 보인다면 앞으로 좀 더 일찍 일어나도록 하세요. 부주방장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셔야지요.”

아체리아가 쏘아붙였다.

아체리아라고 해서 로널드 락케가 마음에 들었겠는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락케가 요리사로서의 임무보다도 지위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얀 헨릭이 수석 요리장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도, 그에게 요리를 배우기보다는 아첨을 하려다 혼이 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락케의 입장에선 자신을 제치고 아체리아가 수석 요리장이 된 사실에 대해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지도 충분히 짐작되는 바였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될 수 있으면 락케를 무시하려 애썼다. 그녀가 락케와 전면적으로 대치하기 시작하면, 요리사들 사이에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체리아, 잘 들어라. 주방에서는 요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바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얀 헨릭이 그렇게 말했어. 아체리아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면서 락케를 노려보았다.

“자, 뭣들 하고 있어요? 이제 일합시다! 곧 공작님께서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아체리아가 말하자 주춤주춤 눈치를 보고 있던 요리사들이 각자 자기 자리로 움직였다.

“어제 저녁 식사에 사용하지 못한 것 중에 남은 건 뭐가 있죠? 아, 이건 샐러드로 활용하면 되겠어요. 내 주방에서 버리는 음식은 없다! 얀 헨릭이 항상 말했잖아요. 그렇죠?”

요리사들 중에서는 락케만큼 아체리아를 적대시하진 않지만, 아직 그녀가 수석 요리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얀 헨릭의 이름을 대는 것이 잘 먹혔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얀 헨릭의 그림자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존경할 만한 요리사지만, 아체리아는 자신만의 주방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진두지휘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오게 될까? 아체리아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우스의 아침은 다른 귀족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는 편이었다. 몸이 약한 탓인지, 그는 아침에 눈뜨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했다.

‘그렇게 안 먹으니 당연히 기운이 없지.’

아체리아는 아침에 표정이 좋잖은 그를 볼 때마다 속으로 그렇게 이죽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아침에 아무리 비척거려도 빈정대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요리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는 것에 더 열과 성을 기울였다.

“오늘의 조찬은 생허브를 곁들인 버섯 마리네, 당근과 쌀 포타주입니다.”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가 그녀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아차.’

그가 왜 바라보는지, 아체리아는 금세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달았다.

“확인하겠습니다.”

아체리아는 견습 요리사에게 포크와 스푼을 한 벌씩 더 가져오게 하고는 만든 요리들을 클라우스 앞에서 조금씩 맛보았다. 밭에서 아침에 갓 따 온 허브의 상쾌함과 새콤달콤한 버섯 마리네의 맛이 입안에 퍼지자 자신의 식사가 아님에도 입 안에 침이 한가득 돌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이어서 아체리아는 당근과 쌀 포타주도 한 스푼 떠서 입 안에 넣고는 클라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나요?”

“……흥.”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수프를 삼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식기를 들었다. 허브의 맛이 강하다느니 어쩌다느니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 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식사를 했다.

‘어제부터 좀 의외인걸?’

“이 버섯 마리네는 뭐가 들어간 거지?”

클라우스가 물었다.

“어떤 버섯이 들어갔는지 물으시는 겁니까?”

“말했지, 나 바보 아니라고. 소스 말이야.”

“소스는 별거 없습니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 그리고 레몬즙 약간과 파슬리가 들어갔죠. 거기에 케이퍼를 살짝 다져 넣었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바꾸어 드릴까요?”

“……아니, 됐어.”

새콤하고 톡 쏘는 감칠맛이 좋다 싶었더니 케이퍼였군. 보통 버섯 마리네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 재료라 알아채기 힘들었다.

클라우스는 몇 년 만에 아침 식사를 깨끗하게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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