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만찬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들을 보던 아체리아는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주로 아체리아와 에른스트 사이에서만 진행되었고, 클라우스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공 전하! 이거 정말로 맛있네요. 어떤 치즈를 쓴 거죠?”
“글쎄. 나는 잘 모르겠으니 네가 한번 맞혀 보지 그래?”
에른스트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자 아체리아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치즈라면 꽤 잘 알고 있는 종류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새로운 풍미였다.
나뭇결을 씹는 것처럼 쌉싸름한 향과 더불어, 아주 짠맛이 나는가 하면 그다음에는 달콤함이 느껴졌다.
“하나는 르블로숑이군.”
클라우스가 여상하게 말했다.
“정확한데.”
에른스트가 긍정하자 아체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 이 사람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맞힌 거야? 나보다도 먼저? 아니, 그보다, 르블로숑은 이렇게 강한 맛이 나지 않는다고!
“르블로숑이라고요?”
“르블로숑과 다른 치즈, 그리고 재료들을 삼나무에서 숙성시켜 구운 거야. 우리 요리장의 특기 요리지.”
잘 모르겠다던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에른스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아체리아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재료의 맛이 좀 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아체리아의 시선이 옆으로 뱅글 돌아갔다.
“공작님께서 이걸 알고 계실 줄은 몰랐는걸요.”
클라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체리아를 보았다.
“음식을 싫어하는 거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런 말까지는 안 했는데요!”
“아체리아, 귀족들은 음식에 대해서도 수업을 받아. 아주 약간의 음식을 맛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찾아내는 거지. 사교 모임에서는 주방장의 요리 솜씨를 정확하게 칭찬하는 것도 예절의 한 부분이거든.”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도 어렸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수업들을 받으며 자랐다. 걷는 법, 말하는 법에서부터 음식을 어떻게,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요리했고 어떤 재료가 들었는지를 알아야만 귀족들의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클라우스처럼 먹는 것을 꺼리고 입이 짧은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절 클라우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는 에른스트는 그를 두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건 몰랐어요. 그런 수업을 받다니…….”
‘부러워요’라는 말을 하려던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입술 바로 뒤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힘드셨겠네요.”
그편이 오히려 클라우스에게는 맞는 말이리라.
가뜩이나 먹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 안에 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맞혀야 했다니 오죽했을까?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잠깐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코웃음을 치며 에른스트를 보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이야?”
에른스트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니, 뭐가?”
“어쩐 일로 나를 여기 초대했느냐는 말이지. 내가 알기로 오늘은 왕성 연회가 있는 날인데. 또 빼먹었다가 폐하께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내가 그런 자리에 불참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그보다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식사하는 게 훨씬 더 즐거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눈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체리아는 공연히 붉어지려는 뺨을 숨기듯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맙소사, 그런 얼굴로 이렇게 웃지 말란 말이야! 사람 설레게.’
“‘친구들’이란 말이지.”
클라우스의 어조에는 미묘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실은 릴리엇과 좀 다투었거든. 그래서 돌려보내고 나니 혼자 남았지 뭐야.”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클라우스는 릴리엇이나 페터가 있을 때보다 에른스트와 둘이 있을 때 더 말을 잘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아체리아도 더욱 본격적으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다음 회의에서 디카트 후작의 발언이 있을 거야.”
에른스트의 말에, 모처럼 즐거워 보이던 클라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노인네는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는 모양이네.”
“정정하지.”
아체리아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 얌전히 디저트만 떠먹고 있었다.
이 나라의 귀족들은 크게 세 파로 나뉘어 있었다. 디카트 후작을 위시하여 주로 나이 많은 귀족들이 분포해 있는 보수파, 그리고 릴리엇의 아버지인 란츠호프 후작가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 마지막으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클라우스 비스몽트와 같은 중립파.
디카트 후작은 보수파의 수장으로서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주로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들을 못마땅해 하며, 왕국의 기강이 더욱 바로 서려면 연로하고 노회한 귀족들의 입지가 더욱 탄탄히 다져져야 한다고 쉼 없이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지 않아? 이번 회의에는 너도 나오는 게 어때?”
식사 중에 굳이 듣고 싶지 않은 디카트 후작의 이름을 꺼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클라우스는 얼마 먹지도 않은 접시를 밀어 놓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날 꼬드기지 마, 에른스트.”
“너무하는군. 넌 내가 혼자 고생을 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이쯤 되자 아체리아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디카트 후작이라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에른스트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 모양이다. 그래서 에른스트에게는 지원군이 필요한 것이리라고 아체리아는 혼자 생각했다.
대공 에른스트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자였다. 현재 베르데사의 왕이자 그의 삼촌인 루뷘 이스펙타터 레이넌이 왕가의 친인척들이 파벌을 형성하는 것을 강력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른스트 본인은 란츠호프 후작과 같은 진보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디카트 후작 같은 자와는 어울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의 건강은 어떠시지?”
클라우스가 물었다.
“늘상 그렇지.”
대꾸하는 에른스트의 대답에는 삼촌을 걱정하는 조카의 따뜻한 마음씨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클라우스도 그 점을 알아차렸지만, 아체리아를 의식해서인지 일부러 지적하지는 않았다. 비록 아체리아는 둘이 무슨 대화를 하거나 말거나, 디저트로 나온 자두 구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두 씨를 파내고…… 안에 채워진 건 커스터드 크림인데…… 맛이 좀 독특한걸? 뭘까…… 약간 고소하기도 한 것이, 두유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인가? 돌아가면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자두를 구워서 곁들임으로 내는 것도 괜찮겠는걸. 단맛이 훨씬 잘 살아.’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간단하게 차를 마셨다. 클라우스는 앞에서 나왔던 진수성찬보다도 차가 몇 배는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공작가에서 쓰는 찻잎도 만만한 가격의 물건들은 아니지만, 대공가에는 공작가에서 구경하기 힘든 희귀한 찻잎들이 많이 있었다.
“이 차, 마음에 드는걸.”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럼 사람을 시켜서 좀 보낼게. 어차피 혼자서는 다 마시지도 못할 테니까.”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클라우스는 차 한 모금을 더 마시고는 갑자기 짓궂은 미소를 띠면서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혼자일 생각이지? 폐하께서 요즘은 네 혼사에 대해 잠잠하신 모양이네.”
루뷘 레이넌 왕에게는 적자와 서자가 여럿 있지만 조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자인 조카는 에른스트 한 명, 여자인 조카는 이미 외국의 귀족이나 왕과 결혼을 한 사람들이 둘 있었다.
루뷘은 자신의 영향력을 주변에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더 신경 써야 할 자식들은 내버려 둔 채, 조카들의 혼인 문제에 더 열을 올리는 기이한 행태를 보였다. 그 와중에 스물다섯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에른스트가 혼사 문제로 그에게 들들 볶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요즘은 내 결혼에 신경 쓰실 여유가 별로 없지.”
에른스트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본인 몸 건사하기도 바쁘시니 말이야. 거기에 더해서 그 많은 정부들까지.”
아체리아는 찻물을 호로록 들이켜다 말고 슬금 눈치를 보았다. 내가 이런 대화를 듣고 있어도 되는 건가?
루뷘 왕이 수많은 정부를 두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서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는 것은 평민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작 왕비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겨우 낳은 적자가 딸인 데다 이미 타국의 대공과 혼인까지 한 상황이라 아직까지 제대로 된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다가 폐하께서는 요즘 건강이 무척 안 좋으시거든.”
에른스트는 차 옆에 딸려 나온 담백한 쿠키를 입 안에 톡 털어 넣었다.
“그러니 다들 눈이 벌게져서 태자가 되려 하지 않겠어? 뭐,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과연 상관이 없을까? 그 서자들 중 제대로 된 인물이 몇이나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너를 다음 대 왕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인물들도 적잖이 있을 텐데.”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클라우스. 큰일 난다.”
에른스트가 주의를 주자 클라우스가 픽 웃었다.
“나야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니 큰일 날 일도 없어.”
“대공 전하께서 왕이 되시면 어울리긴 할 것 같은데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체리아가 별생각 없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
“어울리실 거 같다고요. 왕이 되시면요.”
“아체리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왕자들이 대체 몇 명이나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런 소릴 함부로 하면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어. 괜히 이 녀석한테서 이상한 거 배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