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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4)화 (14/144)

14화

“뭘 그렇게 노려보니?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부러워?”

아체리아의 말에 하녀가 얼굴을 확 붉히며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아체리아는 긴 팔을 엇갈려 팔짱을 끼면서 그녀를 향해 기세등등한 시선을 던졌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해, 안지.”

“누가 부…… 부럽대? 그냥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별꼴이야, 정말. 안지라는 이름의 하녀는 투덜거리면서 욕실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분명 호즈만으로부터 아체리아의 치장을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혼자 있는 게 훨씬 편했다. 저렇게 뾰로통해져서 심술을 부리는데, 해면으로 등이라도 벅벅 밀어 대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을 참아야 할 게 아닌가.

아체리아는 머리부터 물을 끼얹어 대강 몸을 씻고는 금방 바깥으로 나왔다. 공작의 그 성격에 오래 기다리게 했다가는 또 무슨 비아냥을 들을지 모를 일이다.

안지는 심술을 부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드레스를 꺼내 놓는 것은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른 것인지, 아니면 공작이 가져다준 것인지는 몰라도 가슴 주변의 목깃이 깊게 파여 선뜻 입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옷이었다.

‘게다가 이 색깔은 뭐야?’

와인을 연상시키는 붉은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체리아는 혼자 뚱한 표정을 짓고 옷을 입었다.

아체리아가 옷을 입고 나가자 호즈만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몰라보게 변한 듯한 아체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헛기침을 하면서 정중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가시지요.”

“……집사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오늘은 공작가의 요리장이 아니라 공작님의 손님이니 이렇게 대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 가시지요.”

‘소름 돋아!’

아체리아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호즈만의 팔 위에 손끝만 살짝 걸친 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왠지 초조한 듯한 기색의 클라우스가 서 있었다. 뭔가 나쁜 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발끝을 흔들고 있던 그는 계단을 내려오는 아체리아를 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럭저럭 봐 줄 만하군.”

‘내가 무슨 미술품인 줄 알아?’

클라우스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아체리아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아체리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클라우스는 그녀를 데리고 공작저를 벗어나며 말했다.

“에른스트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그것은 아체리아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클라우스와 단둘이 앉아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둘이 아닐 수도 있지만…….’

클라우스가 대공저에 초대를 받아 가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는 대체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왕성에서 신년 연회나 연말 파티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내밀지만, 지치고 피로한 기색으로 금세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차에 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은 채 말이 없었다. 아체리아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클라우스도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둑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체리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님.”

“왜?”

“공작님께서는……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든지, 그런 게 전혀 없으신가요?”

단박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건만, 의외로 클라우스는 대꾸 없이 잠잠했다.

그때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소란스럽게 덜컹거렸다. 아체리아는 줄곧 말이 없는 클라우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조그만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클라우스는 또 바람 새는 소리로 픽, 웃더니 아체리아의 머리 옆을 가리켰다.

“눈은 뒀다 뭐 하나?”

클라우스가 가리킨 곳에는 비단으로 만든 끈이 매달려 있었다. 아체리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끈을 붙잡으면서 종알거렸다.

“끈이 있으니 잡으라고 말씀하시면 어디가 덧나십니까?”

“외조부가 내게 저주를 걸어서 혓바닥이 제대로 안 굴러가.”

아체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불편한 화제를 꺼내는 건 반칙 아니냐!

“먹고 싶은 음식이라, 아주 옛날에 딱 한 번 맛있는 걸 먹어 본 적이 있었지. 뭔가를 먹고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게 처음이었어.”

“그게 무엇인가요?”

아체리아는 양손으로 끈을 붙잡은 채 클라우스 쪽으로 몸을 확 기울였다.

“그러다 지붕 무너지겠군.”

“그 음식이 뭔지 알려 주세요!”

“몰라, 기억도 안 나. 너무 옛날에 먹은 거라서.”

“대체 어디서 드셨던 건데요? 얀 헨릭의 레시피라면 제가 거의 다 알고 있는데…….”

“외조부께서 살아 계실 때 별장에서 먹은 것이었다.”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탄식하며 한숨을 쉴 뻔했다. 그 별장은 이제 아무도 방문하지 않아서 최소한의 사용인들만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누구인지 클라우스가 알 리도 없거니와, 본 저택의 하인들 역시 별장의 하인들을 세세히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껏 그가 ‘맛있게 먹었다’는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이래서야 모르느니만 못한 결과였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종류도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디저트라든가, 생선 요리라든가…….”

“글쎄, 모르겠는걸. 네가 한번 알아보지 그래. 내가 ‘접시를 핥도록’ 만들고 싶다면서?”

클라우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해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얼굴에 무척 잘 어울리는 미소였건만, 아체리아의 눈에는 얄밉게만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마차가 대공저 앞에서 멈춰 서자 문이 열렸다. 하인들은 정중한 태도로 아체리아와 클라우스를 마중했다. 대공저의 하녀장이 아체리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숄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예? 숄…… 숄은 없는데요.”

하녀장은 그제야 아체리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알아본 것일까? 그보다도 숄을 꼭 걸치고 왔어야 하는 거였나?

아체리아는 계면쩍은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클라우스의 뒤에서 숨듯이 걸으려 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공작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체리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 위에 얹어 놓았다.

“손님으로 왔으면서 쭈뼛거리지 마라. 실례야.”

“대관절 제가 왜 여기에 이런 꼴로 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말했잖아. 에른스트의 희한한 취미 때문이라고.”

말투는 시니컬했지만 클라우스는 이 상황이 왠지 즐거운 듯했다.

아체리아가 새삼스럽게 대공저의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아치형의 지붕이 드리운 모퉁이 너머에서 에른스트가 모습을 내밀었다. 그는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고 잠시 눈을 깜빡이며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야?”

“친구보다 여자가 먼저인 모양이지?”

클라우스가 신랄하게 농담을 건넸지만 에른스트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콧방귀를 뀌며 아체리아의 에스코트를 넘겨받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체리아를 데리고 왔으니 자네를 용서해 주지, 클라우스.”

에른스트가 근엄하게 말했다. 클라우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용서라니, 내가 자네에게 잘못을 빌 일이 있었던가?”

“아체리아를 한밤중에 쫓아냈었잖아.”

한밤중은 좀 과장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른스트의 표정은 진지했고, 클라우스는 그래서 한층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 친구가 아체리아 클링을 진지한 눈으로 보고 있단 말인가? 그냥 농담 따먹기나 하는 상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쳐다보나? 하여간 자네, 나한테 한 대 빚졌네.”

“날 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단 말이지. 거참, 눈물 나는 연정이로군.”

“비꼬지 마, 난 진심이니까.”

아체리아는 이 모든 소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멀쩡히 눈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없는 사람인 양 저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다니.

에른스트의 한쪽 팔에 얹힌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아체리아는 다른 손으로 갑자기 클라우스의 팔도 홱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졸지에 두 남자 사이에 낀 상태로도 당당하게 말했다.

“시답잖은 말씀들은 그만하시고, 초대하신 분은 초대하신 분답게 대접을 해 주십시오. 초대받으신 분은 초대받으신 분답게 예의를 지키시고요.”

아체리아의 일침에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의 눈이 동시에 둥그렇게 커졌다. 한쪽은 놀라움, 그리고 다른 한쪽은 희미한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에른스트가 웃음을 터뜨리자 클라우스의 표정에서는 금세 노여움이 지워지듯 사라졌다.

“좋아, 이래서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가자고. 아주 끝내주는 만찬을 준비했으니까.”

에른스트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의 말이 왠지 마음속에 가시처럼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이 아체리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때는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이다.

대공저의 식탁은 과연 화려했다. 이전에 공작저에서 잠깐 쫓겨났을 때 아체리아 혼자 받았던 식사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때도 이만저만 호화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식 만찬과 비교하니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적선하는 수준이었다.

‘맙소사, 이게 다 몇 가지야?’

아체리아는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면서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곧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식기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어쩌면 이렇게 담음새까지 완벽하죠? 이건 음식이 아니라 예술이네요, 대공 전하.”

“네 칭찬을 받으니 기분 좋은데? 우리 요리사가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군. 어서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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