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만약 에른스트에게 내막을 듣지 않았다면 순간 멱살이라도 잡을 뻔했다. 그가 자신의 속을 뒤집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수프에는 양배추와 감자, 그리고 약간의 소고기가 들어갔습니다, 공작님. 맛내기용으로는 소금과…….”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군.”
클라우스가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여기에 뭐가 들어갔는지 네가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어. 내가 만드는 과정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럼 오늘부터는 조리 때마다 공작님께서 주방을 살피시지요.”
“농담하는 거지? 나더러 주방에 들어가란 말인가?”
들어오면 죽냐? 아체리아는 성질대로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자, 아체리아 클링. 넌 참을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아체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아체리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이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걸 믿으시겠어요? 공작님께서 식사하시기 전에 제가 직접 먹어 보면 될까요?”
“건방지게 내 식사에 먼저 손을 대겠다고?”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 주시지요.”
클라우스는 할 말이 없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한 스푼을 먹고 마뜩잖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아체리아는 그가 식사를 시작한 것만으로도 뿌듯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아체리아는 속으로 히죽대면서 아무도 볼 수 없게 등 뒤로 주먹을 꾹 쥐었다.
* * *
릴리엇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에른스트의 표정이 심드렁해지면 심드렁해질수록, 릴리엇의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
“한 수만 물러 줘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에른스트가 말했다. 릴리엇은 토라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더니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다 조심스럽게 나이트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에른스트가 피식 웃었고, 릴리엇은 기어이 골을 냈다.
“뭐예요, 정말! 체스 둘 때 그러는 거 정말 싫다고 했는데!”
“아니, 난 웃지도 못해?”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거잖아. 몰라, 이제 두고 싶지 않아요.”
릴리엇이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그녀는 시종에게 일러 새로운 차를 한 잔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거리며 틀어 올린 머리를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오늘 저녁에 있을 왕성 연회에 가기 전에 시간이나 보낼 겸 에른스트를 찾아왔던 릴리엇은 막판에 이렇게 토라지게 될 걸 알면서도 그에게 체스를 청했다.
에른스트는 솔직히 릴리엇과 체스를 두는 게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마음대로 판이 풀리지 않으면 꼭 수를 물러 달라고 조르거나 게임을 중간에 끝내는 그녀의 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려 놀던 사이인 친구를 매몰차게 외면할 수도 없어서 늘 그녀의 상대가 되어 주고는 했다. 하긴 릴리엇이 체스를 두자고 청하는 상대라고 해 봐야 온 세상을 다 통틀어도 에른스트 한 명뿐이었으니까.
시종이 차를 가지고 왔다. 릴리엇은 흠 하나 없는 동작으로 찻잔을 살짝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하고는 기분이 풀어진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대공가의 차는 일품이라니까.”
“그렇게 마음에 들면 찻잎을 보내라고 말할게.”
에른스트가 마음씨 좋게 말했다. 그러나 릴리엇은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대공가에 와서 마시는 거라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있는걸.”
“어디서 끓이건 차 맛이 다 똑같지.”
“그렇지 않다니까요. 에른스트는 참 섬세하지 못하다니까.”
“뭘 새삼스럽게.”
“가끔 보면 클라우스보다도 섬세하지 못한 거 같아요.”
릴리엇이 심술궂게 종알거렸다. 에른스트는 일부러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행동이 어린 여동생 같은 릴리엇을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소리를 해?”
에른스트가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릴리엇은 까르르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체리아는 어떻게 됐을까?”
릴리엇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에른스트는 찻잔을 기울이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공작가에서 다시 일하게 됐겠지.”
“클라우스가 다시 쫓아냈으면요?”
“그렇지 않을걸.”
릴리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른스트는 마치 못된 장난을 치다 들킨 꼬마처럼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에른스트, 알면서 시치미 떼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안다는 거야?”
“아체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에요. 다 알아,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에게 관심이 있잖아요. 안 그래요?”
릴리엇이 말했다. 에른스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릴리엇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에른스트 쪽으로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아체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해?”
기가 막혀. 릴리엇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에른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르데사 왕국은 신분 격차에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옛날에는 대륙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노예 제도가 있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과 평민의 격차가 조금씩 줄어들어, 옛날처럼 귀족이 다니는 길로 평민들은 걸음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귀족과 평민 간의 혼인은 귀족 사회에서 수치스러운 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에른스트는 왕국의 유일한 대공이다. 그런 그가 평민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아마 반대하는 세력이 벌 떼처럼 일어날 것이 뻔했다.
“에른스트, 내 말 잘 들어요.”
“어, 이거 혼나기 직전에 듣는 말인데.”
“능청 떨지 말아요! 아체리아를 좋아하는 건 말도 안 돼요. 일찌감치 마음 접는 게 좋을 거라고요.”
에른스트는 턱을 괸 채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릴리엇을 보았다.
“왜? 아체리아가 평민이기 때문에 절대로 대공비가 될 수 없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우리 후작가 아가씨께선 말이야.”
“빈정거리는 걸로 내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라면 꿈 깨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당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체리아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아체리아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날 응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체리아가 대공비가 되는 걸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두고 볼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시끄럽게 떠들어 댈 사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에른스트는 베르데사 국왕의 조카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공이라는 지위를 가진 이상 국왕으로부터 혼사에 대해 얼마간 참견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릴리엇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체리아를 좋아해서 둘이 연애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만약, 아체리아가 끝내 대공비가 되는 걸 사람들이 반대한다면 그땐 어떡할 거죠? 대공의 지위 같은 건 다 내려놓고 둘이 산속에라도 들어가 살 거예요?”
“아체리아가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 당신이 얼마나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에른스트? 이건 당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체리아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요. 만약 아체리아가 당신의 정부라는 소문이라도 나 봐요. 그 애의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릴리엇은 결코 아체리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에른스트의 말이 그만큼 꿈속을 헤매는 것 같고,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만약 아체리아가 귀족이라면, 에른스트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나더라도 만회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은? 귀족의 노리갯감으로 쓰이다 버려졌다는 추문이나 따라붙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체리아는 당신 때문에 인생 전체가 꼬이게 될 거라고요.”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라니까, 릴리엇.”
“에른스트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거였으면 내가 반대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릴리엇은 화가 난 기색으로 드레스를 휙 감아쥐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 명심해요, 에른스트. 진짜 아체리아를 위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 보라고요.”
에른스트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릴리엇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팡, 내리치고는 대공저를 나가 혼자서 왕성으로 떠나 버렸다.
혼자 남은 에른스트는 두다 만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단호한 릴리엇의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