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래서, 여기서 나가면 다시 대공저로 돌아갈 건가? 에른스트가 너에게 대공저의 요리사 자리라도 준다고 했어?”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아체리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시큰둥하게 시선을 내렸다.
“이미 한 시간이 지나서 그건 어렵겠습니다.”
클라우스가 고개를 들어 아체리아를 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대공께서 마부에게 한 시간 동안만 저를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이상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제가 공작저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알고 포기하시겠다고요. 공작님께 사과만 드리고 다시 나갈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일이 이렇게 되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네요.”
“그래서, 내 탓이란 말이야?”
아체리아는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하긴, 클라우스가 쓰러져 있지만 않았던들, 그리고 그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어 줄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누가 공작님의 탓이라고 말했나요?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굳이 탓을 하자면 공작님의 외조부님 탓이겠네요.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공작님께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시어 이렇게 쓰러지시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애초에 제가 쫓겨날 일도 없었겠죠.”
“감히 내 앞에서 누구를 거론하는 건가?”
클라우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누구도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해선 안 되는 거니까요.”
“아까부터 자꾸 뭘 안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지 모르겠군.”
클라우스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체리아가 한 말들은 분명 그의 성격상 결코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아체리아가 아니라 다른 누가 했더라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에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거나, 아니면 짐도 챙길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내쫓아 버리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클라우스는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아체리아가 에른스트에게 정말로 대공저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에른스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아체리아 한 명이 공작저에 있든 없든 자신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거슬리는 치통처럼,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그 생각이 클라우스의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지금 아체리아를 내보내면 에른스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그녀를 데려가겠지.
‘그래서 뭐, 어쩌자고. 대공비라도 만들겠다는 거야?’
웃기는 소리지.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널 당장에라도 쫓아낼 수 있지만.”
“…….”
“그러면 오히려 넌 기뻐하겠지. 안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시중을 드는 것보다는 에른스트의 시중을 드는 것이 백배는 편할 테니까. 그렇게 두고 싶지 않군. 넌 괘씸하고 시건방져. 네가 편하게 지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이건 또 무슨 심술이야?’
아체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클라우스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클라우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작저에서 계속 내가 먹을 것을 만들도록 해.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에 강등시킬 테고 봉급도 깎아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절 자르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네가 희희낙락 대공저로 옮겨 가서 편하게 지내는 꼴은 못 보겠다고 했잖아. 이제 나가. 난 자야겠으니.”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친 클라우스는 더 이상 이 화제에 대해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듯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 버렸다. 아체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돌아누운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쟁반과 빈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는 호즈만이 초조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한 그릇 다 드시고 잠드셨어요. 속은 괜찮아지신 것 같아요.”
호즈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체리아 역시도 긴장으로 뻣뻣해져 있던 목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아체리아, 너는 이제 어떡할 거냐?”
호즈만의 물음에 아체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님께서 그냥 여기서 일하라고 하시네요.”
“뭐? 그게 정말이냐?”
“쉿, 목소리 낮추세요. 네, 정말이에요.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 좀 끔찍한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공작님께 또 무례한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글쎄요.”
아체리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주방에 팽개쳤던 낡은 짐 가방을 들고 다시 자신이 쓰던 방으로 올라온 아체리아는 먼저 벽난로에 불부터 지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 속의 수분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불이 환하게 타오르자 아늑한 온기가 식어 있던 손발을 감쌌다.
“피곤해 죽겠네.”
외마디 탄식을 내뱉은 아체리아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대공저에서 목욕을 했던 일이 마치 전생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체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 할머니 말이 진짜 맞았네. 어쨌든 따뜻한 곳에서 자게 됐잖아.”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이 바닥 위로 붉은 그림자를 만들며 일렁거렸다.
아체리아는 바람에 흔들리는 깃털처럼 살랑대는 불길을 바라보다가, 어느 결엔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늦었어요! 공작님께서 벌써 식사 준비를 마치셨을 거라고요!”
아체리아는 아침부터 주방 요리사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수석 요리장이 두 번씩이나 바뀐지라, 요리사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비컴, 수프 다 됐어요?”
샐러드를 만들고 있던 아체리아가 묻자, 수프 담당인 비컴이 코를 벌름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락케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요리사인 그도 아체리아처럼 젊은 여자가 수석 요리장인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비컴! 수프 다 됐냐구요!”
“아, 예이. 다 됐습니다.”
아체리아의 독촉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한 비컴은 누가 봐도 불성실한 태도로 수프 솥을 내렸다. 아체리아는 불쾌했지만, 지금은 시시콜콜한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일찍 일어난 클라우스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클라우스는 아침 식사를 가장 싫어했다. 눈을 뜨자마자 음식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야 하는 게 미련하게 느껴진다나?
‘웃기는 소리. 아침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체리아는 서둘러 식사를 내어 가게 한 후, 접시를 들고 가는 시종들을 뒤따라 식당으로 나갔다.
“얼마나 기다리게 할 참이야? 순무를 씨앗에서부터 길러 오기라도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건가?”
기다렸다는 듯이 클라우스가 이죽거렸다. 아체리아는 자신이 이 집에서 다시 일하게 된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고민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무와 양배추, 그리고 가리비로 만든 샐러드입니다. 뿔닭 육수로 만든 크림수프는 지방이 적고 부드러워 속이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제도 양배추를 먹이더니 오늘도 양배추를 먹이는군. 아주 날 밭에 갖다 심지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거든.’
아체리아는 욱한 마음을 꾹 누르고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양배추는 위염에 좋습니다, 공작님. 당분간 조찬, 정찬, 만찬 중 한 번은 양배추를 메인으로 한 요리를 내놓을 것입니다.”
“지금 선전포고하는 거야? 내가 안 먹겠다면 어쩔 건데?”
“공작님.”
별안간 아체리아가 목소리를 낮추자, 한쪽에 서 있던 호즈만 집사장이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뭘 하려는 생각이든 하지 말라는 신호라는 걸 알았지만, 아체리아는 참지 않았다.
“다 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또 위염으로 쓰러지실 테니까요. 치료사가 말하길, 공작님의 위염은 만성인지라 계속 악화되면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하더군요. 모두가 비스몽트 공작가는 공작님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길 것이라 함부로 입방아를 찧어 댑니다.”
“아체리아!”
호즈만이 다급하게 아체리아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께서는 억울하지도 않으신가요? 식사를 제대로 못 하게 된 게 공작님의 잘못도 아닌데요.”
“아체리아, 그만두지 못해!”
“내버려 둬.”
클라우스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즈만은 즉시 물러났지만,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아체리아가 주방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즉시 흠씬 혼을 내주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눈이었다.
“내가 왜 음식을 싫어하는지 알아?”
아체리아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클라우스는 대답을 못 할 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사무적인 태도로 웃으며 손끝으로 수프 그릇을 툭, 쳤다.
“여기에 네가 말하는 요리 재료 이외에 뭐가 더 들어갔을지 알고 마음 놓고 먹는단 말이지?”
“……네?”
아체리아는 순간 멍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클라우스는 전장에서 완전히 승기를 잡은 장군처럼, 그 초췌한 얼굴에 기세등등한 미소를 띤 채 턱 아래로 깍지를 낀 손을 받쳐 괴었다.
“내 말뜻을 모르겠나? 요리사인 네가 날 독살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이걸 깨끗이 먹어 치우겠냐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