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체리아는 카드 게임에서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당연했다. 겨우 규칙만 아는 정도였으니까.
페터와 릴리엇은 아마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에른스트가 고의적인 바보짓을 여러 번 저질러 주지 않았다면, 아체리아는 오늘 밤 카드 게임 테이블에 영혼까지 저당 잡힐 판이었다.
“전 이제 더는 못 하겠어요.”
아체리아가 뒤로 나자빠지듯 기대자 페터가 킁,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실룩였다. 그 모습이 마치 공작저에서 기르던 커다란 개 같아서,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지도 않은 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테이블 위로 한순간 적막이 흘렀다. 릴리엇은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에른스트는 헛기침을 하며 페터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인 페터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체리아, 요리 이야기 좀 해 줄래?”
릴리엇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급히 말했다. 아체리아가 곤란을 겪지 않도록 얼른 화제를 돌려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아, 음. 네. 요리요…… 좋죠. 어떤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란츠호프 아가씨?”
“으음, 저기…… 그러니까.”
릴리엇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 요리라고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단지 얼마나 우아하게 식사를 하느냐만이 관건인 귀족 아가씨다웠다.
“몇 주 전에 우리가 공작저로 식사를 하러 갔을 때, 그때는 얀 헨릭이 요리를 했었지. 그때 바닷가재로 소스를 만든 게 있었는데 혹시 알고 있나?”
에른스트가 썰렁해지려는 분위기를 겨우 구원했다. 릴리엇이 다행이라는 듯이 반색을 했고, 아체리아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건 아메리켄느라고 하는 소스입니다. 바닷가재의 살과 내장을 넣어서 만드는 소스죠. 좋은 바닷가재를 쓰면 아주 달콤한 감칠맛이 나요.”
“난 가재에게 내장이 있다는 게 신기해. 그걸 먹는 것도.”
릴리엇이 말했다.
“게의 내장으로 만든 요리도 있습니다. 아주 맛있어요.”
“그건 평민들이나 먹는 거지.”
페터가 불만스럽게 이죽거렸다. 아체리아는 단박에 반박을 하려 했지만 에른스트가 발끝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페터 드라인은 성격도 까다롭거니와 그리 정중한 남자가 아니었다. 신경 건드려 봐야 별로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방금 전에도 분명 아체리아가 자신을 비웃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게의 내장으로 만든 요리라고 하면 클라우스는 아마 스푼을 들기도 전에 식탁을 떠나 버리겠지?”
릴리엇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클라우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체리아가 에른스트 쪽을 흘긋 쳐다보았고, 그녀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쯤 할까? 결국 오늘도 릴리엇이 이겼군.”
“두 사람은 내게 이기려면 멀었어요.”
릴리엇이 새치름한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체리아는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릴리엇과 에른스트 덕분에 시비가 걸릴 만한 상황에서는 벗어났고, 분위기도 무던하게 풀어져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릴리엇과 페터가 돌아간 후, 에른스트는 아체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뭐지?’
자연스럽게 같은 방으로 들어오는 에른스트 때문에 아체리아가 당황한 사이, 그는 시종을 불러 포도주 두 잔을 가져오게 했다.
“대공 전하, 이 시간에 포도주를요?”
“배고프지 않아? 아까부터 뭣 좀 먹었으면 좋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데.”
‘어떻게 안 거지?’
그의 예리한 눈썰미에 아체리아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써 있어.”
자신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가리키며 에른스트가 말했다.
시종이 포도주와 치즈 조각을 가지고 들어왔다.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잔을 채워 주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까 클라우스에 대해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아체리아는 작은 포크로 치즈 조각을 집어 입에 넣으려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 게임을 하느라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던 화제였다.
“말씀해 주실 건가요?”
“아까는 릴리엇과 페터가 있어서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둘밖에 없으니까 괜찮겠지. 클라우스의 편식, 그건 여기랑 관련된 거야. 그리고 여기.”
에른스트는 검지를 세운 채 자신의 머리와 가슴 한복판을 차례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체리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생각과 마음의 문제라는 거야. 클라우스의 외조부를 만나 본 적 있어?”
아체리아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선대 공작께서 데릴사위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하녀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른스트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면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클라우스의 외조부는 선대 비스몽트 공작, 그러니까 클라우스의 부친을 아주 싫어했어. 무능하고 둔하다고 늘 욕을 해 댔지. 그분은 몸이 좋지 않아 말년을 공작가의 별장에서 보내셨는데, 우리가 놀러 갈 때마다 마치 독사 같은 눈으로 쏘아보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셨어.”
“공작가의 별장에…….”
그러고 보니 그런 곳이 있었다. 어릴 때, 몸이 약한 클라우스가 아프면 종종 그 별장으로 가 몇 달 동안 요양을 하다 돌아오곤 했던 기억도 났다.
“그분, 아니 그 영감이라고 할까?”
“……대공 전하께서 하실 만한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뭐 어때, 우리 둘뿐이잖아.”
에른스트가 웃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사위가 너무 싫은 나머지 손자에게 끔찍한 말들을 들려주기 시작했어. 클라우스가 별장에 가서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독살을 당할 수 있다느니, 네 아버지처럼 뚱뚱하면 기품 있는 귀족이 될 수 없다느니, 귀족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느니…… 그런 말들 말이야.”
“……맙소사.”
아체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심지어 내가 같이 있을 때도 그런 말을 해 댔으니, 그 불쌍한 어린애가 혼자 있을 때는 어땠겠어? 결국 클라우스는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됐어. 그리고 점점 무서워하게 됐지. 그 녀석이 그렇게 음식을 안 먹고 까다롭게 구는 건 그 일 때문이야.”
아체리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공작저를 뛰쳐나오기 전에 클라우스를 향해 외쳤던 모든 말들이 한마디씩, 한마디씩 떠올라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온몸의 솜털이 다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부끄럽고 열이 올랐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네요.”
아체리아의 말에 에른스트는 눈썹을 까딱이며 치즈 조각을 집어 먹었다.
“글쎄. 하지만 네가 화난 것도 이해해. 그리고 클라우스는 네게 이런 짓을 해선 안 됐어. 갈 곳도 없는 사람을 빈손으로 내쫓다니, 그건 어떤 이유로도 해선 안 되는 짓이지.”
에른스트가 위로하듯 말했지만 이미 아체리아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얼마나 무정하고 무례했는지. 이 순간 클라우스가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 사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공작저에서 쫓겨났고, 더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아니다.
“대공 전하, 오늘 베풀어 주신 호의는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체리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에른스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잔을 손에 든 채 그녀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저……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클라우스에게 사과라도 하러 가려고?”
에른스트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지만 부정도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던 클라우스의 얼굴이, 왠지 머릿속에서 빙빙 돌며 자꾸만 과장된 모습으로 변해 갔다. 그 창백하고 가냘픈 얼굴은 아체리아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어리게 변해 가다가, 곧 폭언을 하는 늙다리 영감에게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할 만큼 조그만 꼬마로 바뀌었다.
마치 자신이 그 불쌍한 꼬마를 윽박지른 것 같은 자책감에 아체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공 전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공작저로 갈 수 있도록 마차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 빚은 제가 어떻게든 갚을게요.”
“내가 널 보내기 싫다면?”
“그러시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이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유를 발라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머리칼을 매만지던 그는, 열렬하게 불타는 것 같은 아체리아의 시선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마차는 한 시간 동안 공작저 앞에서 기다릴 거야. 그전에 네가 나와서 다시 마차를 탄다면, 그때는 내 말대로 대공저의 요리사가 되도록 해. 내가 널 고용해도 괜찮겠지?”
“감사합니다.”
아체리아는 서둘러 욕실로 가 에른스트가 빌려주었던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이 벗어 두고, 원래 자신이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을 본 에른스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띠면서도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선물인 셈 치고 가져가도 괜찮은데.”
에른스트의 말에 아체리아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오늘 베풀어 주신 호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아체리아는 치맛자락을 펼친 채 무릎을 굽혀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방 한쪽에 두었던 낡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 길로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탕, 하고 문 닫히는 소리만 남긴 채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에른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잔 안에 반쯤 남은 포도주를 마셨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에른스트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