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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화 (8/144)

8화

아체리아가 식사를 거의 끝마쳤을 무렵,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고용인이라고 생각해 디저트에만 열중하고 있던 아체리아는 문득 코끝에 끼치는 낯설지 않은 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다가 그만 테이블 아래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아야!”

“아체리아!”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에른스트였다. 아체리아는 얼얼한 무릎을 주무르면서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께서 여긴 왜…….”

“식사는 입에 맞는가 싶어서 들러 봤지. 천천히 식사해.”

“아뇨, 다 먹었어요. 정말 너무 맛있는 것들뿐이네요!”

“그래? 네 마음에 들었다니, 우리 요리사들도 꽤 실력이 좋은 모양인데.”

“그걸 이제 아셨어요?”

아체리아의 말에 에른스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를 만족시키는 건 생각보다 꽤 힘든 일일 것 같아서 말이야.”

“전 맛있는 것을 좋아해요. 까다롭게 굴자면, 이 수프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에른스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왜?”

“양파가 조금만 덜 들어갔다면 좋았을 뻔했어요. 고기 육수로 걸쭉하게 끓인 건 좋았는데, 양파 특유의 향이 다른 맛들을 가려 버리더라고요. 매운맛을 좀 빼거나, 아니면 푹 익은 양파를 이용했다면 좀 더 감칠맛이 나고 좋았을 것 같아요.”

“요리장에게 그렇게 전해 둘게.”

에른스트가 말하자 아체리아는 코코아색의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굴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제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니겠죠?”

“음, 내일이면 대공저의 요리장이 바뀌는 정도일 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대공 전하!”

에른스트가 다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아체리아.”

“절 그만 놀리세요. 그렇게 재미있으신가요?”

“물론이지. 이 재미를 모르다니, 클라우스 녀석은 돌로 만들어진 게 분명해. 아니면 바보거나.”

클라우스의 이름이 나오자 아체리아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에른스트는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대공 전하?”

“음? 이 소리를 내면 마법이 시작되거든.”

“마법이라니요?”

그때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파티션과 드레스, 장신구가 든 함 같은 것들을 들고 줄지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체리아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어리둥절해하고 있다가, 하녀의 손에 의해 졸지에 파티션으로 가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하녀는 아체리아가 입고 있던 옷을 능숙한 솜씨로 벗겨 내었고, 에른스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녀가 당황해 꺅꺅거리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 나가세요!”

“대공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능하신 폐하밖에 없지.”

“아니…… 하지만, 제, 제가 벗을게요!”

기함한 아체리아가 고함을 치자 에른스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아체리아 클링이 당황하는 것도 보고, 이거 아주 멋진 밤인데?”

“대공 전하!”

“걱정하지 마. 여기서는 아체리아 너의 머리밖에 안 보이니까.”

아체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눈을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른스트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하녀가 가지고 온 드레스를 본 아체리아는 더욱 기겁을 했다. 농익은 포도주 빛깔의 비단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윤택해 보였다. 이런 걸 입고서는 걸음이나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실수해서 드레스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아, 저기, 너무 당기지 마……세요. 이런 거에 익숙하지가 않, 악!”

“너무 조이지 마. 아체리아는 허리가 가늘어서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에른스트가 말하자 코르셋의 끈을 당겨 주고 있던 하녀가 손에서 살짝 힘을 빼었다. 아체리아는 단단하게 붙들린 것 같은 배를 만져 보면서 짧은 숨을 헐떡였다.

“대체, 이걸 어떻게…… 매일 입고 사는 거죠?”

“그걸 매일 입고 사는 아가씨들은 네가 어떻게 매일 그렇게 요리만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걸?”

“말도 안 돼…… 이런 걸 입고 있으면 식사도 못 하겠어요.”

아체리아는 이제야 귀부인들이나 귀족 아가씨들이 새 모이만큼 식사를 하고 배부르다며 접시를 물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대의 공작 부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어머니였던 선선대의 공작 부인, 그리고 그녀들의 손님들도 모두 그랬다.

‘이런 걸 입고 있었으니 당연하지!’

속으로 투덜거리던 아체리아가 문득 눈을 깜빡였다.

‘혹시 그 녀석도 이런 걸 입고 있는 거 아니야?’

그녀가 생각하는 ‘그 녀석’이란 물론 클라우스였다. 본인이 들었더라면 노발대발 화를 냈을 생각을 하면서 아체리아는 혼자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몇 번 웃자 배가 쿡쿡, 쑤셨다.

코르셋 때문인지, 아체리아가 입기에는 조금 작은 듯하던 드레스는 희한할 정도로 꼭 맞았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아체리아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허리께에서부터 주름을 잡아 풍성하게 만든 치맛자락은 발치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흘러 떨어졌다.

하녀들이 파티션을 치웠다. 아체리아는 어색하고 쑥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고?”

당치도 않다는 듯 반문한 에른스트가 하녀의 손에서 붉은 귀걸이를 받아 들더니 직접 아체리아의 귀에 달아 주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귓불의 솜털을 어루만지는 에른스트의 손길은 다정했다. 아체리아는 목 뒤의 솜털들이 곤두서는 묘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그 감각을 털어 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마구 매만졌다.

에른스트는 아체리아를 에스코트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테이블 위에 카드를 펼친 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랐다.

“아체리아! 세상에나.”

릴리엇이 외쳤다.

“누군지 못 알아볼 뻔했어.”

아체리아는 여전히 어색하고 뻣뻣한 미소를 띤 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드라인 남작가의 후계자인 페터는 평소처럼 입술을 실룩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둥글게 팬 목깃 아래로 드러난 흰 살갗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야, 페터. 숙녀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건 실례잖아.”

에른스트의 농담 섞인 말에 페터는 귓불을 붉히면서 뭐라 구시렁거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에른스트는 아체리아가 앉을 의자까지 직접 빼 주었다. 릴리엇은 그 모습을 마치 진기한 구경이라도 되는 듯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귀여운 얼굴에 황급히 미소를 띠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꾸며 놓으니까 정말 귀한 댁의 아가씨 같은걸.”

릴리엇의 반응에 아체리아는 입속으로 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하면 아체리아에게 실례지, 릴리엇. 너답잖게 왜 그래?”

에른스트가 부드럽게 지적했다. 릴리엇은 “어머” 하고 소리치며 입가를 가리더니 볼을 붉혔다.

“미안해, 아체리아. 그런 뜻이 아니고…….”

“괜찮습니다, 란츠호프 아가씨. 제가 귀한 댁 따님이 아닌 건 사실인데요, 뭐.”

아체리아는 일부러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릴리엇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쳐 카드들을 집어 섞었다.

“아체리아, 카드 게임 해 본 적 있어요?”

“아뇨, 저는 처음인데…….”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괜찮아. 처음에는 나랑 한 팀이 되어서 어떻게 하는지 규칙을 잘 익혀 보라고.”

에른스트가 말했다.

“그럼 일단 세 사람 분으로 돌릴게요.”

릴리엇은 능숙한 솜씨로 카드를 섞고 패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테이블 위에 뒤집어진 카드를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무늬와 숫자를 잘 봐야 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무슨 패를 가졌는지도 생각해 봐야 하고.”

에른스트가 말했다. 아체리아는 빨간색과 검은색의 무늬들을 바라보다가 에른스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무 어려울 거 같은데요, 대공 전하.”

“걱정하지 마. 두어 판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자, 키스해.”

키스하라고? 아체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가, 그의 손에 금화가 하나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 키스하라고요?”

“그래. 오늘 아체리아는 내 행운의 여신이니까.”

아체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에른스트의 금화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릴리엇와 페터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생전 이런 장면은 처음 본다는 듯이, 혹은 무슨 진기한 곡예라도 보는 듯이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봐, 릴리엇. 너도 내 금화에 키스해 주지 그래?”

페터가 말하자 릴리엇은 샐쭉한 태도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수는 없지. 넌 내 경쟁 상대잖아, 페터.”

“너무하는군. 그럼 오늘 판은 에른스트가 다 따는 거잖아.”

페터가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는 와중에 첫판이 시작되었다. 아체리아는 규칙을 외우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카드 판이 돌아가는 것을 유심히 살폈다. 패가 한 장 나가고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하자, 아체리아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비스킷이나 먹었으면 좋겠다. 짭조름한 치즈랑 같이.’

귀족들은 이런 게 정말 재밌어서 하는 걸까? 아체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에른스트의 손에 들린 카드 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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