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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6)화 (6/144)

6화

아체리아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터덜터덜 길을 헤맸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간 지 오래, 거리에는 램프가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지만 어둠이 깔리자 대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주점에 불이 켜지기 무섭게 슬금슬금 술꾼들이 모여들었고, 으슥한 골목에서는 싸움이 일어났는지 더러 소란이 있었다.

아직 집에 당도하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부산한 거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아체리아는 갈 곳이 없었다.

“아가씨.”

고개를 돌리자 키가 그녀의 허리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노파가 너저분한 넝마 아래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불쌍한 노인에게 동전 한 닢만 적선하시오.”

“미안해요, 할머니. 저도 가진 게 없어요.”

아체리아는 증명이라도 하듯 치마의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호즈만으로부터 받은 은화 주머니가 생각났다. 아체리아는 얼른 가방을 뒤져 주머니 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있다! 여기요, 할머니.”

“고마우이. 대신 내가 점을 하나 봐 주지. 하나 골라 보구려.”

노파는 누덕누덕 기운 천 주머니를 아체리아 앞으로 내밀었다. 아체리아는 점술사를 믿지 않았지만,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김에 흥미가 생겨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차갑고 매끈하다. 아마도 조약돌이나 그 비슷한 것이리라. 거리의 점술사들은 주로 낡은 카드를 사용해 점을 쳤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더러 이런 방식을 쓰기도 했다.

달각달각 소리가 나는 것들 중 하나를 골라 집어 꺼냈다. 아체리아의 머리 색처럼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자그만 구슬이었다.

“흐음. 아가씨, 아주 높은 자리에 오를 운명이로구만.”

“네에? 높은 자리요?”

아체리아는 깔깔 웃으며 천 주머니 속에 구슬을 다시 집어넣었다.

“왕이라도 되면 좋겠네요.”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하지만 아가씨는 충분히 좋은 운을 타고났어. 사실 그 구슬은 말이지, 자…….”

노파가 주머니 입구를 벌려 안을 보여 주었다. 온통 파란색과 녹색뿐인 구슬이 들어 있었다. 아체리아가 뽑은 것과 같은 색의 구슬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구슬은 특별한 힘이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구슬이야. 아가씨가 믿거나 말거나 말이지.”

“할머니 말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전 오늘 밤 잘 곳도 없는걸요.”

“아가씨는 오늘 밤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될 거야. 그건 내가 보장하지.”

노파는 이가 빠진 입술을 실룩거리며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다가 이내 길을 떠났다. 노파가 가고 난 자리를 바라보던 아체리아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어머나, 클링 양? 아체리아?”

높고 새된 여자의 목소리에 아체리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휘황찬란한 마차가 한 대 서 있었고, 마차에 난 작은 창문으로 뜻밖의 인물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란츠호프 아가씨?”

“세상에, 이런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마부! 문을 열어 줘요.”

그녀는 클라우스의 친구 중 한 명인 릴리엇 란츠호프였다. 오늘 점심때 보았던 것과는 머리 모양도, 입고 있는 드레스도 달랐다. 아마도 어딘가 저녁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인 거 같았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지만 아체리아는 망설이면서 릴리엇을 바라보았다. 클라우스의 오랜 친구라 어렸을 때부터 릴리엇을 보아 왔지만, 그녀가 한 번도 친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릴리엇은 뭘 하고 섰느냐는 듯이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아체리아, 어서 타.”

“하지만 아가씨, 저는…….”

“어서. 이 거리는 밤이 되면 위험해.”

아체리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이내 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릴리엇의 몸에 맞게 만들어진 마차인 듯, 작고 아담한 좌석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이런 시간에 왜 밖에 나와 있었어? 공작저로 데려다줄게.”

“아, 아뇨. 아닙니다. 저는…….”

릴리엇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지 인형이라고 하면 꼭 맞을 법하게 사랑스러운 외모였다.

아체리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속에 든 것을 토해 내듯이 빠르게 말했다.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공작저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릴리엇의 눈동자가 정말로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체리아는 그녀의 눈이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쫓겨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체리아는 결국 사건의 전말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릴리엇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클라우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잖아!”

“아니에요, 제 잘못이죠. 공작님께 감히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까…….”

“아체리아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정말 공작저에서 쫓아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체리아가 어떤 처지인지 알면서!”

아체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릴리엇은 아체리아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민감하게 눈치채고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미안해, 아체리아. 넌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데.”

아체리아는 얼른 표정을 고치고 방긋 웃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그럼 오늘 잘 곳도 없겠구나. 사실 난 지금 에른스트의 저택에 가던 길이었어. 오늘 셋이 모여서 카드 게임을 하기로 했거든. 클라우스는 안 오겠다고 거절했지만……. 아, 봐. 벌써 거의 다 왔네.”

릴리엇의 말대로 마차는 이미 화려한 대공저의 정문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환하게 빛나는 대공저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저기, 아가씨. 저는 다른 곳으로…….”

“아냐! 안 돼. 이 밤에 대체 어딜 가려는 거야? 대공저에는 방이 많아. 에른스트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며칠 동안은 문제없을 거야. 그동안 나도 클라우스를 잘 설득해서 아체리아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볼게.”

돌아가고 싶나? 아체리아는 별로 달갑지 않은 릴리엇의 호의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했던 말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그녀는 평소보다 아체리아에게 과도하게 친절했고 또 호들갑스러웠다.

“아니……?”

시종의 안내를 받아 대공저 안으로 들어간 아체리아가 화려찬란한 내부에 넋을 빼앗긴 사이, 릴리엇을 맞으러 나왔던 에른스트가 어리둥절한 소리를 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어떻게 같이 오게 됐어?”

에른스트는 의아해하면서도 기뻐 보였다.

“저기, 에른스트. 사실은 아체리아가…….”

릴리엇이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또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해서, 아체리아는 다시 한번 쓸데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사정을 들은 에른스트는 헛웃음을 치면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사실이냐는 듯이.

아체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히는군. 클라우스 그 자식,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쫓아내? 공작가에서는 고용인을 늘 이런 식으로 대하나?”

그는 예상외로 화가 난 듯했다. 에른스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릴리엇과 아체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 저택에서 고용인을 무작정 쫓아내는 것이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리 와, 아체리아. 방을 안내해 주지.”

지켜보던 시종들뿐만 아니라 릴리엇마저도 놀라게 한 에른스트의 말이었다.

대공 에른스트는 왕의 조카였다. 아체리아가 아니라 다른 누가 손님으로 오더라도 자신이 직접 방을 안내할 필요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

아체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낡은 가방을 앞으로 들고 서 있다가, 릴리엇과 시종을 한 번씩 돌아보고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에른스트를 뒤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이르렀을 때, 에른스트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클라우스 그 자식, 가만 안 둘 거야.”

아체리아의 갈색 눈동자가 잠깐 깜빡였다.

“대공 전하, 란츠호프 아가씨께 이야기를 들으셨잖아요.”

“그래, 들었지. 그게 뭐?”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만.”

“넌 잘못한 거 없어. 클라우스가 징그럽게 까다로운 건 사실이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공작님은 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던 기억밖에 없는데, 제가 오기 전에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체리아가 공작저에 처음 가게 된 것은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클라우스의 나이는 아홉 살, 그때도 그는 이미 음식이라면 극도로 꺼리는 이상한 아이였다.

에른스트는 음, 하는 소리를 내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얘기해 줄 수는 있지만, 카드 게임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말이야. 일단 넌 뭘 좀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좀 쉬도록 해. 그러다 내키면 카드 게임을 하러 내려와도 괜찮고.”

“대공과 후작의 딸, 그리고 남작 아들이 앉아 있는 카드 게임 테이블에 일개 요리사가 낀다고요? 참 재미있기도 한 농담이십니다.”

“뭐 어때? 당장은 요리사가 아니잖아. 단지 우리 친구일 뿐이지. 카드 게임이란 게 꽤 재미있어.”

“전 규칙을 전혀 모릅니다, 대공 전하.”

“내가 전부 가르쳐 줄게.”

그 순간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무척 낮게 깔려 다정하게 들렸다. 아체리아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되어 볼을 부풀렸다가, 뻣뻣한 태도로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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